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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동학농민군 운명 갈랐던 전투지, 나주 서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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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동학농민군 운명 갈랐던 전투지, 나주 서성문

1894년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 농민 봉기
정부군 연파 세력 확산,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
농민군, 나주읍성 점령위해 7차례 치열한 전투
나주서성문 전투서 농민군 패배 읍성함락 실패
전봉준-목사 민종렬 금학헌서 담판…협상 결렬
나주는 동학농민군의 꿈 좌절된 대표적인 현장

게재 2021-06-22 16:25:49
동학농민군의 운명을 갈랐던 나주 첫 전투지, 서성문
동학농민군의 운명을 갈랐던 나주 첫 전투지, 서성문
전봉준과 민종렬의 담판 장소, 금학헌
전봉준과 민종렬의 담판 장소, 금학헌
동학농민군 학살지였던 호남초토영 터에 세워진 표석
동학농민군 학살지였던 호남초토영 터에 세워진 표석
나주 수성군 도통장 정석진의 표석
나주 수성군 도통장 정석진의 표석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났다. 동학 접주인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은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가 오히려 농민을 탄압하자, 고부 봉기는 농민 전쟁으로 번졌다.

3월 20일, 전봉준은 4000여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다시 봉기했다. 동참자가 점점 늘어, 새롭게 본진을 꾸린 백산(전북 부안)에 모인 농민군은 8000명이 넘었다. 백산 일대는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정개혁'과 '보국안민'을 외치는 농민군으로 가득 찼다.

4월 7일,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이끈 농민군은 황토현(전북 정읍)에서 전라도 감영군을 대파했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가 대포와 기관총을 갖춘 중앙군을 보냈지만, 농민군은 4월 23일 황룡촌(전남 장성)에서 중앙군을 물리치고, 4월 27일 호남의 수도인 전주성마저 점령했다.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마저 인천으로 상륙하자, 정부와 농민군은 서둘러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탐관오리 처단', '노비문서 소각', '토지 평균 분작' 등 12개조의 폐정개혁을 합의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웅도(雄都)였던 나주였다. 민종렬 목사를 중심으로 농민군 수탈의 선봉에 선 아전들과 나주 우영 소속 군인들이 수성군을 결성하여 나주읍성을 굳건히 지켜냈기 때문이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나주를 방치할 수 없었다. 나주 수성군의 입장에서 이병수가 쓴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이 나주를 점령해야 할 이유를 "적(동학농민군)들이 꼭 나주에만 호기심을 두고 있는 것은 우리의 성첩(城堞)이 완고하고 병기가 튼튼하기 때문인데 만약 점거당하거나 빼앗기게 되면 저들이 소굴로 삼고 장차 세력을 굳힐 수 있는 곳"이라고 적고 있다.

7월 5일 나주 서성문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말까지 나주 일대에서 7번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봉준이 직접 나주읍성을 찾아 민종렬과 담판을 벌인 이유이기도 했다.

수성군이 주도권 장악한 서성문 전투

나주 수성군과 동학농민군의 첫 번째 전투지는 1894년 7월 5일 나주읍성 서쪽 문에서 벌어진 서성문 전투다. '금성정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7월 초 1일에는 적의 괴수(동학농민군 대장) 최경선이 일당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짓밟으며 본 고을에 직접 쳐들어왔다. 오권선은 괴수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중들을 통솔하고 와서 금안동(金案洞)에 진을 치고 수삼일 동안 침략을 가하면서 금성산으로 개미떼가 붙듯이 올랐고, 초 5일 어두울 무렵에 산 정상으로부터 물밀듯이 내려와 서성문을 공격하였다. …… 관군들은 지휘명령을 받은 즉시 대완포와 장대포를 연발로 쏘아대니 화염이 붉게 솟아오르고 그 소리는 산악을 울렸다. 성 위의 각 초소에서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너희 (최)경선과 (오)권선 두목들은 도망치지 말고 목을 바쳐라'고 외쳤다. 적도들은 혼비백산하여 서북쪽으로 도망치면서 저희들끼리 엎어지고 밟히고 하여 사상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서성문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은 광주의 최경선과 나주의 오권선이 이끄는 연합부대였다. 서성문 전투에서 수성군이 승리하고 동학 농민군의 패배하였는데, 서성문 전투는 이후 전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주 수성군은 동학농민군을 매우 두려워했었는데, 서성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봉준·민종렬 금학헌서 담판

나주 목사 내아인 금학헌(琴鶴軒)은 1894년 8월 13일 전봉준과 나주 목사 민종렬이 담판을 벌인 곳이다. 7월 5일 오권선·최경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나주성 함락에 실패하자, 전봉준은 8월 13일 부하 10여 명과 함께 나주성 서성문에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민종렬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금학헌에서의 담판은 전봉준의 집강소 설치 및 수성군 해산 권고를 민종렬이 거절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당시의 모습이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이 들어가 만나 뵙고 인사를 마친 다음 사죄하고 말하기를 "소생은 불행하게도 근년에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생활을 할 수 없고 가난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게 됨에……그 외에 다른 뜻은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명공께서는 특별히 불쌍히 여겨 주소서" 말하니, 민공께서는 "위로는 군주의 정치하는데 걱정을 끼쳤으며, 아래로는 만백성들을 사상케하는 참혹한 큰 죄악을 저질렀으니 중벌로 처함이 마땅할 것이다. 아무리 석자나 된 입이라도 어찌 용서를 빌 말이 있겠는가? 내 마땅히 너를 죽여 군중에다 돌릴 것이나 특별히 너의 한오라기 목숨만 용서해 주노니 돌아가서 너희 무리를 타일러, 즉시 귀화하면 천벌을 면할 것이라고 이르라" 하였다. 전봉준은 기가 질려 감히 말을 못하다가……'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군측 입장에서 서술된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전봉준이 성 안에 들어오자) 목사 민종렬은 영문을 제대로 모르고 황망히 일어나며 물어 말하기를 "손님은 누구십니까?"라고 하였다. 이 질문에 전봉준은 "나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이다"라고 대답하였다. …… 목사가 전 대장의 기품을 보고 한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으며 오직 머리를 숙이며 전후 사유를 듣기를 청할 뿐이었다. 전 대장이 천하대세며 홍계훈과 강화하던 말이며 각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서로 국사를 의논한 일 등 전후 사정을 낱낱이 말하니 사리가 그럴듯하고 위풍이 또한 늠름했다. 이에 민종렬은 다만 한마디로 유유(좋소 좋소)할 따름으로 이날로부터 집강소를 설치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어, '금성정의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사서 중 어떤 내용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오지영의 '동학사'에 기술된 "집강소를 설치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는 기록, 즉 집강소 설치는 사실과 다르다.

전봉준은 민종렬과 담판 후 어디에서 하룻밤을 묵었을까?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이 나주 읍성 안의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나주인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말에 의하면 객사(客舍)에서 하룻밤 묵었다는 말도 있다. 객사인 금성관에서 묵었는데도 여관에서 묵은 것으로 기술했다면, 이는 목사 민종렬의 신변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정부의 적이었던 농학농민군의 수괴(대장)에게 관리들이 묵는 숙소인 금성관을 제공했다면, 이는 국가의 법을 위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전봉준이 비무장인 채로 나주읍성을 찾아 민종렬 목사와 담판을 벌인 사건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민종렬은 전봉준을 체포하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를 살려보내고 있다. 민종렬이 전봉준의 인간됨을 알아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전봉준도 민종렬의 인격을 신뢰했던 것 같다.

동학농민군 처형장소, 호남초토영 터

공주 우금치 전투가 실패로 끝나면서 일본군 토벌대 등에 의해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된다. 그 현장 중 하나가 전봉준·손화중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이 수감되거나 처형된 호남초토영(현 나주초등학교)이다. 1894년 10월 28일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에 임명된 민종렬은 나주에 초토영을 설치하였는데, 이 초토영은 호남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본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2월 이후에는 장흥의 이소사, 최동린을 비롯한 각지에서 체포된 수많은 농민군이 이곳에 수감된 후 처형되었다.

동학농민군 진압군 우선봉장 이두황이 남긴 일기인 '양호우선봉일기'에는 "일본 진영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죄인 등 도합 94명도 같이 압송하여 나주에 도착하였다.…… 지난 12월 30일, 94명 중에서 73명은 일본 진영에서 쏘아 죽였고……"라는 기록도 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원이었던 일본인 쿠스노키가 비요키치가 남긴 종군 일기에 "남문으로부터 4정(약 4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의 시체가 쌓여 실로 산을 이루고 있다. 이는 지난번 장흥부 전투 이후에 수색을 엄밀하게 해서 숨어 있을 곳이 곤란해진 농민군이 민보군 또는 일본군에 포획되어 고문을 당한 후 중죄인을 죽인 것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으며, 그리하여 그곳에 시체를 버린 것이 680명에 달하여 그 근방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땅은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하얀 은(白銀)처럼 얼어붙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는 나주를 비롯한 인근 동학농민군의 꿈이 좌절된 현장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폐정개혁을 부르짖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학살한 나주 수성군은 나주인들의 자긍이 될 수 있을까? 금성관 앞마당에는 나주 수성군들이 동학농민군들을 물리친 내용을 기술한 '금성토평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