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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호남 보건교육의 메카 광주보건대학교와 설립자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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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호남 보건교육의 메카 광주보건대학교와 설립자 정부

1911년 함평서 출생 숭일학교·신흥학교 졸업
일본 유학후 광주사범학교에서 교직생활 시작
수피아여자실전 등 설립 광주보건대 역사 시작
개교 50년 광주보건대 보건계열 명문학교 우뚝
호남 최초 보건대 설립 82세까지 학장직 수행

게재 2022-03-16 16:48:40
호남 보건교육의 메카, 광주보건전문대학교 전경
호남 보건교육의 메카, 광주보건전문대학교 전경
평생 교육의 외길을 걸은 정부 학장
평생 교육의 외길을 걸은 정부 학장
서원전문학교 시절 입학식
서원전문학교 시절 입학식
간호학과 예비 의료진
간호학과 예비 의료진

코로나19 시대, 국민의 건강을 지켜내는 보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국민의 건강이 중요함을 절감하고 호남 최초의 보건대학을 설립한 분이 있다. 정부 박사가 그다. 그러나 오늘 정부 박사를 아는 자는 거의 드물다. 호남 최초로 보건대학을 설립한 정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평생 교육의 외길을 걷다

정부(鄭 , 1911~2012)는 1911년 12월 8일 전남 함평에서 출생한다. 호는 남재(南齋)다. 16세 때 전남 함평군 문장리의 귀밀교회 교회학교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다. 교회는 신앙 활동의 근간이었지만, 교육 기회가 적었던 당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숭일학교 보통과를 졸업한 그는 1931년 20살의 늦깎이 나이에 전주 신흥학교(고등과)에 입학, 1935년 졸업한다. 숭일학교와 더불어 신흥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호남 최초의 사립학교였다. 그가 광주 숭일학교 및 전주의 신흥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신흥학교 졸업 후 그의 첫 직장은 전남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던 서봉학교로 4년제 보통학교였다. 교사 시절 그는 박봉이었지만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보태주었고, 남은 돈은 유학을 위해 저축한다. 3년 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에서 입학한 학교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닌 학교로 잘 알려진 교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 대학 법학부였다. 도지샤 대학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건립된 사립대학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한국이 일제의 속국이 된 가장 큰 이유를 경제발전의 미약이라고 보았고, 독립을 쟁취하고 국력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경제 부흥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경제학과였다. 1943년 9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지만, 그가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었다. 그게 당시 해방 직전 조국의 현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직장은 일본인 회사인 대택산업주식회사 경성지점이었다. 도지샤 대학 시절 친분을 쌓은 일본인 친구의 소개 때문이었다. 입사 후 2년도 채 안되어 광복이 되자, 신흥학교 은사였던 민정장관 보좌관인 이교선의 주선으로 동방무역주식회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회사 생활은 길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고심했고, 내린 결론은 국가와 민족을 새롭게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를 길러내는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교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낙향하였고, 평생 교육의 외길을 걸었던 연유다.

그의 교직 생활의 출발은 1947년 광주사범학교에서였다. 이후 모교인 신흥중학교 교감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시기 6·25동란이 일어났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상공부 장관을 맡고 있던 은사 이교선은 그에게 또 무역과장을 권유한다. 부름을 받고 부산으로 갔지만 이교선이 곧 물러남에 따라 다시 교직으로 돌아온다. 전주고등학교였다.

그의 능력을 알아준 또 한 분이 있다. 수피아여중·고 교장 유화례(Florence E. Root) 선교사였다. 1955년 유화례 교장은 세 차례에 걸쳐 학교를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요청을 수락한다. 그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동시에 교육의 결과는 사회봉사와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당시 학교 옆의 기독병원을 보면서 병원에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의 필요성도 절감한다. 1966년, 그는 수피아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된다.

그의 전문 교육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72년 3월 10일, 광주보건전문대학의 전신인 수피아여자실업전문학교를 또 설립한다. 광주보건대학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초대 학장을 맡은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82세까지 학장직을 수행하다

정부가 학장직을 수행한 것은 82세까지였으니, 대단한 건강이 아닐 수 없다. 그는 80이 넘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서너 바퀴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학교 건물을 살피고 교정에 버려진 담배꽁초 등 쓰레기를 줍는 일을 빼먹지 않고 실천한다.

그가 매일 학교를 두서너 바퀴나 돌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체력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함평의 불갑산 자락에서 컸다. 그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게를 짊어지고 불갑산에서 나무를 하는 일이었다. 그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신흥학교 때는 학비를 벌기 위해 지하실 및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해냈다. 일본에서의 대학 생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6년간 신문 배달을 하였고, 손에 닿는대로 장사를 하였다. 학업과 병행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해야 했다. 그래서 그의 하루는 늘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하루 평균 8킬로미터는 뛰어야 했다. 학창 시절 고단한 삶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고단한 삶이 그의 체력을 단련시켜 주었던 것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학교를 두서너 바퀴나 돌아다닐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가 건강했던 것은 천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흥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5,6세 무렵 그는 씨름꾼으로도 이름을 날린다. 20세 이하만 참가하는 총각씨름판에서 함평, 장성, 나주 3개군을 휩쓸고 다닐 정도였다. 그는 타고난 장사였다.

광주보건대학은 그의 분신이었다. 82세까지 학장직을 수행했던 것은 매일 학교를 두서너 바퀴 돌 수 있었던 열정과 건강 때문이었지만, 교수와 학생 등 학교 구성원들의 존경 때문에 가능했다.

학교밖에 모르는 학교 바보였고, 교육밖에 모르는 참교육자였다. 이런 그를 장동진 이사장은 "교육철학의 실천가"로 회고했다. 또 그의 제자였던 김해성은 "남재(정부의 호) 스승님은 인의예지를 갖추신 참 선비님이신데 대나무같이 푸른 지조를 갖추신 참 스승이신데, 사십여개 성상 긴긴 세월을 교단에서 안으로는 따뜻한 사랑으로 가르치셨고 밖으로는 엄하신 말씀으로 가르치심이여"라고 읊은 '대나무 같은 푸른 지조'라는 고희송(古稀頌)을 바친다.

영화도 여행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학교와 더불어 사는 것이 그의 취미이고 낙이었다. 80이 넘은 나이였지만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1982년 대한민국은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한다. 참교육, 실천 교육에 대한 보훈이었다.

2012년 102세의 천수를 누리고 작고한다.

광주보건대학교, 보건계열 명문이 되다

광주보건대학교의 뿌리는 1972년 옛 숭일학교 터인 광주광역시 양림동 66~1번지 문을 연 수피아여자실업전문학교다. 개교 당시에는 가정과, 영양과, 식품가공과로 출발했다. 그 후 1975년부터는 남녀공학이 되었고, 학교 이름도 광주서원(瑞元)전문학교로 바뀐다. 학교 이름의 개명과 동시에 보건사회부로부터 의료기사 전문 교육기관으로 지정·인가되었고 보건계열의 치위생과·물리치료과·보건행정과 등이 신설되면서 기존의 위생과·임상병리과와 함께 보건계열 특성화대학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1979년에는 방사선과, 1985년도에는 간호과와 치기공과가, 1987년도에는 안경학과가 신설되면서 명실공히 호남을 대표하는 보건계열 명문대학의 위상을 굳힌다. 1991년도에는 간호과·임상병리과·물리치료과·방사선과 3년제로 개편된다.

1979년 서원전문학교는 다시 서원보건전문대학으로, 1980년에는 광주보건전문대학으로 바뀐다. 그리고 1998년에는 오늘의 명칭인 광주보건대학교가 된다. 광주보건대학은 1986년 광산구 신창동으로 이전하면서 양림동 시대를 마감한다. 신창동 캠퍼스는 규모부터가 양림동 캠퍼스의 10배나 된 3만여 평이었다. 대학다운 면모를 갖추면서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광주보건대학만이 갖는 특색을 정부 학장은 교지 서원(瑞元 5호, 1980)에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우리 대학(광주보건대학)은 다른 대학과 달리 1인 1기 교육을 통하여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유익할 수 있는 실천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대학교육이 이론으로부터 실습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친다면 우리 대학은 앞서서 이러한 대학교육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대학은 국민 보건을 위한 학문 연구로부터 실험 실습에까지 1인 1기 습득을 학생 각자에 시키고 있는 것도 타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이라고 생각한다."

개교 50년을 맞는 광주보건대학교는 명실공히 호남 최고의 보건계열 명문학교다. 보건대학 출신들은 오늘 코로나 19를 맞아 최일선에서 지역민들의 보건을 책임지는 전위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보건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선각자 남재 정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정부 학장을 떠 올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