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500년 세월 가로질러 夢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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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500년 세월 가로질러 夢心의 의미
명가의 조건, 남원 몽심재(夢心齋)||우리는 무엇을 명가(名家)라 하며||명문(名門)이라 이르는가||지리산 골골이 짙은 숲들을 지나||남원 견두산 자락 단아한 고택서||죽산박씨 종가의 격조는 물론||명가의 조건을 새삼 되돌아본다
  • 입력 : 2022. 07.14(목) 15:31
  • 편집에디터

남원몽심재 안채. 이윤선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가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다. 여배우 이애리수(1910~2009)가 막간 무대로 나와 이 노래를 불렀다. 갑자기 객석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훗날 남인수가 불러 국민가요가 되었던 <황성옛터>, 본래의 노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이다. 전수린이 작곡하고 왕평이 작사하였다. '황폐한 도성의 흔적', 개성 만월대를 보고 지은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망해버린 왕조 고려에 투사했으리라. 허물어진 성터가 주는 영감은 벼랑에 폭포수 쏟아지듯 망국의 조선사람들에게 번졌으니, 일제가 서둘러 금지곡으로 지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잡초 우거진 도성 터, 이것이 어디 개성의 만월대에 그치겠는가. 흥망성쇠의 왕조에 그치겠는가.

남원몽심재 마당 바위에 새겨진 각자. 이윤선

몽심(夢心)에서 원불교의 공심(公心)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리산 골골이 어둡고 짙은 숲들을 지나 남원의 견두산 자락에 이르면 고즈넉한 마당 단아한 고택이 나온다. 남원 몽심재, 내 여기 이르러 떠올린 것이 '황성옛터'다. 황장목 붉은 기운 틈틈이 땡볕 피해 건너편 대나무들은 고개를 숙이는데 영웅호걸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경사를 따라 지은 고옥의 자태가 여전히 곱지만, 방초의 격조함은 어찌할 수 없다. 말끔하게 정리해둔 고택의 모퉁이, 한 시기 번영했던 영화의 흔적들만 수북하다. 길 건너 풀벌레 소리 요란하니 잠시 마루에 앉아 머리를 기댄다. 감은 눈 깊은 곳으로 누구실까. 초연한 선비 한 분이 몽심재의 마당을 가로질러 온다. 흰 도포자락 휘날리는 걸음걸이가 성큼성큼하다. 이윽고 노래 한편을 읊는다. "격동류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고려말 유신 송암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보낸 싯구다. 박문수가 누구인가?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이들 중 두문동 72현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름이 다 전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에 박문수가 있다. 조선 건국 후 이들이 두문동에 들어 빗장을 걸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골자다. 전 왕조에 대한 충절이랄까.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옛 이름이기도 하고 개성 부근 보봉산 북쪽 골짜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72현이니 48인이니 따위의 호명이 분분한 것은 이 고사의 전거가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두문(杜門)은 팔문(八門) 중의 하나다. 문을 닫아걸다라는 뜻으로 차용한 것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남원몽심재 마당 바위에 새겨진 각자. 이윤선

죽산 박씨, 박문수의 후예가 남원으로 내려와 정착한 것은 손자 박자량 때이다. 조용헌의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숙부 박포(朴苞)가 이방원의 제2차 왕자의 난에 대항하다 패배하여 참수당하였다. 이 때문에 박자량도 좌천되어 전라관찰사로 내려왔다가 처가인 남원 수지면 초리에 눌러앉게 되었다. 몽심재라는 당호는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이 호곡(虎音室)마을에 고택을 마련하여 붙인 이름이다.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절의를 다지면서 시를 보낸 후 16대나 지난 시점이다. 시의 끝 글자를 따 붙인 것이 '몽심재(夢心齋)'다. 박문수의 의도대로라면 몽(夢)은 도연명의 꿈이고 심(心)은 백이숙제의 꿈이다.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은 지금으로 말하면 귀촌 귀향의 대명사요,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백이숙제는 충절과 절의의 대명사다. 귀촌하여 절의를 지킨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을까? 고려의 흥망성쇠와 할아버지의 일편단심을 상고하였던 것일까? 장차 이를 망국의 기운을 감지하였던 것일까? 어쨌거나 호음실 죽산박씨의 의도와는 별개로 승승장구 벼슬길에 오르는 이, 재화를 얻는 이, 사회적 명성을 얻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온다. 두문불출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문과, 소과를 포함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가 82명이나 되고 만석군 거부까지 출현하였다. 세사에 초연하였으므로 얻은 명성이었는지 명성을 얻었기에 세사에 초연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몽심재를 중심으로 실천되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만큼은 두고두고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방이 8개나 되는 사랑채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선비들의 살롱이었다. 전라도 일대의 선비들 사이에서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가장 이름난 곳이었다니 말이다. 조용헌의 분석에 의하면 몽심재에서 1년 동안 네트워크용으로 사용된 쌀이 3천 가마다. 600가구 3천 600명이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양이란다. 한양으로 오르는 이, 고향으로 내려오는 이들이 이곳에서 만나 교환한 정보의 양을 셈하기 어렵다. 헛간에 테두리가 올라있는 큰 멍석을 펴두고 쌀을 나누었다는 후문도 몽심재를 다시 보게 해준다. 하인들을 배려하여 문간채에 정자를 마련해주거나 부엌간의 지붕을 길게 늘어뜨려 휴게의 공간을 배려한 것 등, 한옥 자체의 기능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 있다. 후손 중에는 도쿄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선언에 참여하기도 하고, 1923년에는 사재를 털어 건너편 안산 자락에 수지보통학교(현 수지초등학교)를 건립하고 수지중학교를 건립하여 국가에 헌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불교와의 관련이지 않을까 싶다. 원불교의 대각여래위(大覺如來位) 중 한 분인 상산 박장식 종사(1911~2011)를 비롯해 수십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의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몽심재는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2004년에 원불교 교단에 희사했다.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 받들어 모시는 마음(供心), 대중과 함께 하는 마음(公心)이 혹여 몽심(夢心)의 꿈에서 연유된 것은 아닐까? 풀벌레 우는 소리에 눈을 지긋이 뜨니 구름인 듯 안개인 듯 흰 두루마기자락 휘날리며 누군가 걸어가신다. 500년 세월 가로질러 몽심의 의미를 일깨우러 오신 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명가(名家)라 하며 명문(名門)이라 이르는가. 죽산박씨 종가의 격조는 물론이려니와 명가의 조건을 새삼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남원몽심재 답사중인 관광객들. 이윤선

남도인문학팁

몽심재 바위에 새긴 낙관(落款), 미나리꽝과 남원추어탕

마당의 바위에 새긴 각자(刻字)가 특별하다. 후세에게 남긴 격언이자 유언이라고나 할까. 主壹岩(주일암)은 사심과 잡념 없이 흔들리지 않는 오롯한 마음 자세를 말한다. 存心臺(존심대)는 자신의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아마 이런 정신이 원불교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千蒼崖(천창애)는 천길 절벽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기운과 백성의 기운을 생각하며 새겼다 한다. 후손 박주현(1844~1910)이 상해에 독립자금을 보낸 것도 이런 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靡他基適(미타기적)은 스스로 있는 곳에서 충실하라는 뜻이다. 경사를 따라 설계된 물의 흐름도 특별하다. 장독대에서 부엌간으로 앞마당을 거쳐 요요정(하인들의 정자) 아래 천운담(天雲潭)으로 흐른다. 담장 밑을 지난 물은 다시 마을 입구의 미나리꽝으로 흐른다. 몽심재 전성기 여기서 미꾸라지를 길러 빈객들을 대접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미나리꽝이 남원 추어탕의 원조 아닐까? 남원 하면 떠오르는 추어탕의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라도 몽심재를 주목해보기 바란다. 지금은 고택의 앞쪽으로 흐르던 개울도, 천운담의 물을 받아 운영하던 미나리꽝도 모두 매립되었다. 왕평이 개성 만월대에 들러 황성옛터를 상고하였듯이 나는 지리산 오래된 풍경에 스며들어 몽심재의 꿈과 바위에 새긴 낙관을 상고한다. 남원의 청년들이 들고일어나 몽심의 꿈을 다시 꾸며 실천하는 때, 그것이 어즈버 태평연월 아니겠는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