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오승용칼럼
전차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입력 : 2016. 07.19(화) 00:00
영국의 철학자 풋(Philippa Foot)은 전차문제(trolley problem)라 부르는 퍼즐을 고안했다.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달리는 전차 선로 앞에 다섯 명이 서 있다. 기관사가 선로를 유지하면 다섯 명을 치어 죽일 수도 있고, 다른 선로로 틀면 한 사람만 치어 숨지게 할 수 있다. 기관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종종 이런 퍼즐은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산 호세에서 대프니 존스라는 역무원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의 선로를 바꿔 한명을 치어 죽이는 대신 다섯 명을 구했다. 생존자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칭송했지만, 검찰은 그를 2급 살인죄로 기소했다. 이와 유사한 다른 사례도 있다. 필라델피아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외과의사 로드니 메이프스는 고속도로 연쇄추돌 사고로 이송된 환자 6명 중 급히 장기이식을 받지 않으면 사망할 수밖에 없는 5명을 살리기 위해 그 중 상태가 가장 좋았던 35세 남자의 장기를 적출하여 나머지 다섯 환자에게 이식했다. 메이프스는 5명을 살렸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죽였고, 그 역시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자,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먼저 독자 여러분의 퇴로부터 차단하겠다. 나는 선택하지 않고 방치ㆍ방관하겠다고 대답하진 마시라. 그럴 경우 살인죄는 벗을 수 있어도, 직무 유기라는 또 다른 법적 책임추궁이 따를 수 있다. 세월호 선원의 선택과 당신의 선택이 크게 다를 바 없어진다. 윤리적ㆍ도덕적 책임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필라델피아의 의사는 어떤가? 자기가 신이 아닐진대 누굴 죽이고 누굴 살릴지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을 죽여 다섯 사람을 살리는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부합한다는 명제도 있다. 공리주의는 한 명의 불행이 다섯 명의 행복보다 클 수 없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다수결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야말로 공리주의와 찰떡궁합이다.

모든 결정은 결국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무엇이 이익인가와 연결된다. 하나의 이슈, 사안에 대해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 상황에서 정책결정자는 다양한 측면을 검토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선 공평무사하거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의나 행복, 이익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발견한다. 자, 그럼 다음 차례는 누구의 정의, 누구의 행복, 누구의 이익에 부합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정부와 자치단체의 모든 정책들은 이 범주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다.

하나의 결정은 결국 누군가의 정의, 누군가의 행복, 누군가의 이익을 충족시켜준다. 만약 당신이 이 결정을 반대한다면 나의 정의, 나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은 국민의 행복, 국가 이익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무엇이 공동체의 이익, 공동체의 행복, 공동체의 정의란 말인가? 나는 이 문제를 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련다.

우선 정책결정자들은 그들의 결정을 정당화할 명분과 근거를 어느 정도 찾아냈고, 얼마나 설득적이었나? 누군가의 이익, 행복을 공동체 전체의 이익, 행복으로 받아들이게 할 만큼 충분한 논리적 근거와 설득의 과정이 있었다면, 모든 일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그런 논리와 설득이 없다면, 여론분열과 내부 갈등으로 공동체와 국가의 미래가 위협받는 위험상황은 피할 수 없다. 혹시 당신 혹은 누군가는 정책결정의 합리성이나 영향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누군가가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의 이익, 공동체의 행복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만약 반대를 먼저 결정하고, 그 연후에 반대의 근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증오일 뿐이다.

민주주의체제에서는 정책결정자가 푼 전차문제를 대중도 같이 풀고 서로 답을 맞춰보게 된다. 일치 비율이 높으면 문제될게 없지만, 불일치가 많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전차문제가 꼭 한명을 희생시켜 다섯 명을 살리는 선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다섯 명을 희생시켜 한 명만 살리는 선택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충분히 어리석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오승용칼럼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