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도 땜시 산다이~잉?"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우리가 남도 땜시 산다이~잉?"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산다이
  • 입력 : 2017. 05.12(금) 00:00
지난 2015년 10월 극단 갯돌이 목포의 눈물 80주년 기념 렉처 콘서트 '근대에 길을 물어'에서 공연한 '산다이 풍경' 한 장면.
푸른산 너메로 보이는 가거도/ 나뭇짐만 아니어도 내가 살만 하겄네/ 못하고 살겄네 못하고 살겄네/ 이놈의 가거도 나는 못살겄네/ 못살겄네 못살겄네/ 이남물통 이고서 나는 못살겄네/ 가거도 앞단에 일중선 뜨고/ 정든님 술잔에 담벅곰 떳네/ 잠을 자도 가거도 꿈을 꿔도 가거도/ 영원한 가거도 살수가 없네


가거도 산다이 노래다. 한국 최서남단의 섬 가거도의 고독이랄까. 혹독한 벼랑위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노래는 남도 토속 민요의 하나인 '산아지타령'이다. 가거도 사람들은 이 노래의 연행을 '산다이'라 한다. 산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심경을 읊었다는 특징이 있다. 명절 때나 일하기 위해 모일 때면 심심찮게 노래판을 벌였다. 가거도 사람치고 '산다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대중화된 음악행위다. 섬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능도구 노릇을 해왔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가거도에서만 연행된 노래이자 놀이일까? 그렇지 않다. 남도전역에서 발견된다. 작게는 남도지역의 뱃길이 있는 곳에는 모두 산다이가 있다. 산다이를 알면 남도사람임이 틀림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도 산아지타령에 국한되지 않는다. 젓가락 하나 들고 장구 하나 들쳐 매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노래가 '산다이'다. 기원설이 여러 가지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산다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몇 가지 설이 있다. 일본어라고 보는 견해가 일차적이다. 흔히 술상을 놓고 젓가락으로 장단 맞춰가며 노래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다. 1973년 5월 9일자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파시 아가씨들은 월급 깎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실적을 올리려 든다. 파시 술집의 매상기준은 '산다이'와 '오산다이'라는 일본 국적의 단위, '산다이'는 배 1척당 평균 인원 10명 중 5, 6명이 참석하여 6~7만원의 매상을 올리는 것을 말하고 '오산다이'는 10명 이상이 참석, 보통 12만 원 이상 올렸을 때를 말한다'

하지만 이 기사나 사람들의 이해하는 방식만으로 산다이가 일본어에서 비롯되었고 말하기 어렵다. 상이나 선반을 말하는 일본어 다이(たい, 臺, 台)는 그렇다쳐도 붙임말 '산'을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젓가락 두드리는 '상'으로 봐도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더구나 일본어 상다이(さんたい)는 놀이나 술과 관련 있는 말이 아니다.


전통 산대희(山臺戱)에서 선데이(Sunday)설까지

1941년에 발간된 '조선의 향토오락'에 보면 전통극 '산대희'와 비슷한 이름이 분포한다. 경기도나 황해도지역에서는 '산대희'가 가면극을 지칭하지만 남도에서는 아이들이 산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노는 놀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명칭이 남도 해안지역의 청춘남녀 놀이인 산다이로 정착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우리말 산다이를 제대로 표기하지 못하고 한자를 빌어 표기한 것이 '산대희(山臺戱)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 하나의 설은 산다이가 영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다. 거문도 사건과 관련이 있다. 1885년 3월부터 1887년 2월까지 23개월간 거문도에 영국군이 무단 주둔했다.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한다는 구실이었다. 주둔군이 800여명 군함이 10여척 되었다. 병사들이 평일에는 병영에서 근무하고 일요일이면 술도 마시고 놀았다. 지역사람들이 당신들 놀이가 뭐냐고 물어봤다. 선데이(sunday)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산다이가 되었다는 주장. 하지만 남도 전역 산다이의 보편성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기에 큰 의미가 없다.


'산다이'는 남도지역의 지방말일까?

산다이를 주목한 학자들은 몇 안 된다. 목포대의 나승만과 이경엽이 일찍부터 남도지역의 이 현상에 주목해왔다. 두 분이 함께 쓴 '산다이, 청춘들의 노래와 연애생활사(민속원)'에 상세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 이 연구들에 의하면 산다이가 국가적 큰 행사였던 '산대희'에 대한 남도지역의 대응 용어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남도 이외 지역에서 지역의 대응 용어가 없다는 점, 어원에 대한 해명이 없는 점 등을 들어 더 탐색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우리말의 8~9할이 어원을 밝힐 수 없는 낱말이다. 국어학자들의 얘기다. 용어만으로 어떤 문화를 추적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 혹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용어보다는 오히려 유래설의 다양함과 그 전승의 실체들을 주목하는 것이 더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한국 혹은 남도지역에만 있는 놀이일까?

일본 오키나와에는 모-아시비(も-あしび)가 있다. 나승만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산다이와 유사한 놀이다. 놀이의 연행 양상이나 맥락이 같기 때문이다. 반주악기로 '사미센(三絃)'을 사용한다는 점이나 전통 민요를 중심으로 연행한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 남도지역에서 연행되는 청춘남녀들의 노래 놀이가 오키나와와 일련의 연결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서남해 도서지역에 고르게 분포한다.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 신안군 가거도일 것이다. 가거도를 비롯하여 소안도, 노화도, 신지도, 보길도, 추자도 등지의 산다이들이 보고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서 산다이의 함의가 달라지니 일괄적으로 묶어 말하기도 어렵다. 예컨대 마을에서 하는 것은 마을 산다이, 파시의 술집에서 뱃사람들이 놀면서 하는 것은 파시 산다이라 한다. 명절에 하는 것은 명절 산다이, 산에서 일하며 하는 것은 산 산다이, 또래들이 모여 노는 것은 또래 산다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해안 초소의 전투경찰들이 현지 아가씨들과 놀던 것을 '전경대 산다이'라고도 한다. 1970~1980년대의 일이다. 진도의 다시래기나 신안의 밤다래처럼 장례 의례 속에 녹아들어있기도 하다. 어쨌든 청춘들이 제 짝을 찾아 일명 '썸' 타는 신명의 판을 '산다이'라 말할 수 있다.


재구성되고 스토리텔링(storytelling)되는 남도의 '산다이'

위 연구자들에 의하면 산다이는 다시 기억되고 재구성되고 있다. 동창회와 향우회를 통해 기억되고 재현되는 산다이들이 그것이다. 화가 홍성담은 고향 하의도의 산다이를 하나의 가치로 승화시켰다. 방송이나 공연으로도 재구성된다. 소설가 한창훈은 산다이의 놀이 문화적 의미를 추적했다. 김선태 시인은 '섬의 리비도 연작'에서 "산다이 땜시 이 징한 세상을 산다잉"이라고 했다. 산다이는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놀이이자 축제다. 산다이에서는 흥과 한이 구별되지 않고 버무려진다. 무엇이 오늘날의 산다이를 재구성시키며 스토리텔링하게 하는지 남도사람들은 알고 있다. 대선이 끝났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남도사람들은 높은 표를 주어 새 시대의 대통령을 뽑았다. 경이로운 일이다. 정치적으로 성숙한 태도들이 시대와 한국 사회를 견인해왔다고나 할까. 아마도 개표날 저녁 남도의 수많은 거처에서 산다이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나는 기쁨의 산다이요 다른 하나는 슬픔의 산다이였을 것이다. 다만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도의 산다이가 가지는 평화와 연대의 놀이적 의미 말이다. 지금은 축하와 위로가 더불어 필요한 날이다. 그래서 '산다이'아닐까? "우리가 남도 땜시 산다이~잉"


남도인문학 TIP

나승만, 이경엽 공저의 '산다이, 청춘들의 노래와 연애생활사(민속원, 도서해양교양문고8)'를 다시 인용하여 산다이의 의미를 짚어둔다. 산다이는 서남해 도서지역 청춘들이 음식을 나누며 장구를 치거나 술상을 두드리고 '흥타령'이나 '청춘가', '트로트(뽕짝)' 등을 부르며 놀던 놀이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산다이를 열성적으로 하던 때는 말 그대로 노래의 시대였다. 청춘들이 노래를 잘하면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청춘들은 산다이에서 최신의 노래를 부르고 최신의 악기를 연주하려고 했다. 그것이 이성의 호감을 얻는 중요한 매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문화적 혁신을 선도하는 기량이 최우선이라는 점은 각별하게 주목할 부분이다.

음악적 역량은 이성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다. 노래 부르기, 악기 연주하기의 기량이 그 청년의 능력을 측정하는 바로미터였다. 신곡을 부를 줄 알고, 새로운 악기를 연주할 줄 알고, 노래를 뛰어나게 잘하는 청년이 모든 이의 호감을 얻었다. 패션과 화장도 소박하지만 정성을 들였다. 청춘들은 예쁘거나 멋진 옷을 입고, 멋지게 화장을 하고 상대를 맞이했다. 이성과 만나 '썸타기'를 했다. 산다이 판을 만들기 위한 교섭 과정에서는 마을 간의 소통과 교류가 있었다. '썸'타는 과정에서 여성들에 대한 존중과 세심한 배려의 신사정신을 발휘했다. 상대를 만나거나 기다리는 설렘과 긴장의 스릴이 있었다. 상대방 마을을 방문하는 길에 펼쳐지는 길의 문화, 길의 축제, 노래잔치가 있었다. '썸타기' 이후에 전개될 연애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청춘들이 즐기던 놀이의 본향, 산다이에 내재된 쾌락(지극한 즐거움)의 실체였다.
인문학 시민기자ㆍ남도민속학회장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