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소리 '열사가' 민족혼 고취… 외손자 김정호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창작판소리 '열사가' 민족혼 고취… 외손자 김정호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 명창 박동실
열사가, 일제 항거 열사들 행적
판소리 장르에 담아낸 성악곡
이준ㆍ안중근ㆍ윤봉길ㆍ유관순 구성
  • 입력 : 2018. 05.03(목) 21:00
담양 한국가사문학관 마당에 세워진 명창 박동실 기념비. 전남도 제공


산으로 들로 개구리 잡으러 다니던 계절, '이름 모를 소녀'를 입에 달고 살았다. 개구리는 잡아서 닭에게 던져주었다. 한달음에 뒷까끔(뒷산)에 올라 '하얀 나비'를 불러댔다. 밤이면 집 뒤 묏등에 모여 달이 기울도록 '작은 새'를 불렀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다. 장솔(長松)들 사이로 날아드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을 귀가 간지럽도록 들으며 자랐다. 어린나이에 왜 이토록 궁상스럽고 처량하였던 것일까? 가요의 흐름이 이를 설명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70년 초까지만 해도 트로트와 팝의 시장 점유율은 8:2 정도로 이른바 '뽕짝(비하의 의미로 쓰인다)'이 대세였다. 1973년을 넘어서면서 트로트와 팝의 점유율이 뒤바뀌게 된다. 통기타가 로망이었던 '포크-팝'의 시대가 왔던 것.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이중 김정호는 독특한 성음과 궁상스런 창법으로 인기 절정을 달렸다. 포크-팝이라고 하지만 '미국(서양)식 대중음악 스타일의 한국판 팝'이라고나 할까. 어린 나이의 내게 이 청승맞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나이가 들고 나서야 김정호의 창법이 육자배기와 남도소리에서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소녀'의 천재가수 김정호

1974년 '발라드 문법의 포크-팝 계열 뮤지션'으로 호명되는 김정호가 일약 스타덤에 합류했다. '작은 새', '사랑의 진실', '이름 모를 소녀' 등 노래가 나올 때마다 인기몰이를 했다. 한대수 송창식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박인희 등 온 국민을 울리고 웃기던 싱어송 라이터들의 활약이 도드라졌던 시기다. 독특한 창법을 구사했던 김정호는 애석하게도 1985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김정호(본명 조용호)를 주목한 연구서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죽음과 포크-팝 시대의 석양은 궤를 같이할 것이다. 김정호가 가요만 열중했던 것은 아니다. 거의 드러나진 않았지만 꽹과리를 잘 쳤다. 꽹과리는 사물악기 아닌가? 그렇다. 그의 노래와 성음에서 묻어나는 진한 전통의 냄새, 그것은 우리가 '국악'으로 호명하는 전통음악에 기반 한다. 내가 김정호의 노래들을 남도의 육자배기라고 단언하는 이유다. 예컨대 한(恨)에 붙잡혀 있던 남도음악의 한 시대적 정체를 포크-팝의 형태로 상속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요사에 대한 관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줄곧 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관련한 깊은 이야기는 장을 따로 하여 소개하기로 하겠다.



김정호에서 박동실로 거슬러 올라

김정호는 담양 사람이다. 김정호의 어머니 박숙자는 담양의 이름 난 판소리 명창이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딸이다. 월북하였기에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어 말소리도 함부로 내지 못하던 시절을 살았다. 박숙자(희숙)의 아들 본명이 조용호 즉 김정호다. 국악을 피했던 것일까? 하지만 본질은 피하지 못한 듯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종 시절 남도의 유명한 명창 중 담양사람 박원석에 닿는다. 박원석은 배희근(영광)의 딸 배금순과의 사이에 2남 3녀를 둔다. 장남이 박동실이다. 한겨레신문 기자로 있는 정대하의 연구에 의하면 담양의 박동실, 곡성 옥과의 한애순, 화순의 공창식 명창 집안은 모두 남도의 이름난 무계다. 광주(남도)소리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판소리로만 말한다면 박동실에서 서편제의 전반을 거슬러 오르는 계보와 전통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박동실과 안기옥을 중심으로 전통음악인들이 대거 월북하면서 판소리, 가야금 등의 남한지역 판도가 바뀌게 된다. 제자들이 근자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숨기고 발설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판소리뿐만이 아니다. 최승희를 비롯한 무용계, 안기옥을 비롯한 기악계 등 이른바 국악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 장르나 범주가 매우 넓고 깊다. 이들을 추적하고 복원하지 않은 이상 전체의 양상을 보기 힘들다.

박동실의 열사가와 창작 판소리

김정호의 음악기술은 박동실의 열사가 작곡으로 거슬러 올라 설명할 수 있다. 목포대 이경엽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판소리사에서 박동실 명창의 열사가와 해방가 작곡 위상은 매우 높다. 박동실에게서 소리를 배운 제자들은 한승호, 김동준, 김소희, 한애순, 장월중선, 편재준 등 밝혀진 이들만 해도 십 수 명을 넘어선다. 학습의 요람이었던 담양 남면 지실마을의 초당은 박석기에 의해 마련된 공간이다. 박동실은 초청 강사였다. 현재 잘 알려진 열사가 소리꾼들 중 이성근은 김동준에게 배웠고 목포출신 정순임은 어머니 장월중선에게 배웠다. 수년 전 국립국악원에서 박석기 특집 프로그램을 다루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업적은 조명된 편이나 박동실에 대한 추적은 활발하지 않다. 월북 특히 안기옥과 북한 전통음악의 핵심을 정리했다는 측면이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열사가는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는 열사들의 행적을 판소리라는 장르에 담아낸 성악곡이다. 이준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이나 내용으로 보면 유관순 열사가와 나머지 세 열사가의 두 편으로 구성된다. 관련 연구자들은 전통적인 예술의 방식으로 당대의 아픔을 담아냈다는 의미 외에도 전통의 재창조 사례라는 점을 주목해왔다.



월북 후 활동과 휘모리 선생님 박동실

박동실이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교원으로 일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박동실의 방에서는 약동적인 가락이 울리곤 하였다. 휘모리장단이었다. 어느 날 안기옥이 박동실의 방으로 찾아왔다. 박동실의 '보면대'를 보던 안기옥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정책학습노트'를 보고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동실이 띄엄띄엄 말했다. "사람이 늙어지면 글이 머리에 잘 들지 않누만. 그렇다고 학습을 하지 아니하면 머리에 녹이 앉아 시대의 낙오자가 되고 교육자의 구실도 할 수 없거든. 그래서 이렇게 장단에 맞추어 공부하니 가사 대본처럼 글줄이 머리에 쏙쏙 잘 들어 배긴다네. 어험." 안기옥이 탄복하면서 말했다. "자네 궁리가 그럴듯하이. 그런데 하필이면 왜 빠른 휘모리를 쓰나. 우리 나이에야 느릿한 진양조 같은 것이 더 잘 어울릴터인데…." 박동실이 대답했다. "우리 수령님께서 항일전쟁을 하시던 때 지어 보급하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가'도 속도가 빨랐다네." 이때부터 안기옥의 방에서도 경쾌한 휘모리가락이 종종 울려나왔다. 동료 교원들은 박동실에게 '휘모리선생님'이라는 다정한 별명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양승희가 보고한 '안기옥가야금산조1'에 나오는 일화다. 지금은 출판되어 있으니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자료다. 나는 이 대목을 오랫동안 몇 번이고 읽었다.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주체사상을 정립하면서 판소리가 주체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박동실을 숙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진양조와 휘모리의 은유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교원으로 근무할 때 그가 왜 '휘모리선생님'으로 불렸을까? 속도가 빠르고 기백을 안겨주는 장단이기 때문이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창작판소리 '열사가'를공지어 민족혼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그 기상을 연결해야할까 아니면 이른바 주체사상 중심의 음악 재편에 편승하는 자세로 해석해야 할까? 입장에 따라 철학에 따라 해석은 다를 수 있다. 다만 여운을 남기는 것은 안기옥의 진양장단 언급이다. 이후 안기옥도 휘모리를 따라 했다니 정황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생각하는 것은 이 대화의 행간이다. 진양조와 휘모리의 은유라고나 할까? 향후 남북 자료들이 공개되고 총체적 연구를 시도하게 되면 음악사의 변천 측면에서 세밀하게 추적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월북 후 안기옥이나 박동실의 민족음악 관련 위상은 대단히 높았다. 안기옥과 쌍두마차라고 할 만큼 분단 후 북한 초기음악의 핵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십 수 개의 학위논문을 포함한 연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 예술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들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숙제로 남길 수밖에 없다.



남북화해의 시대, 무엇을 해야 하나?

김정은 위원장이 월남하여 정상회담을 여는 세기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화해의 시대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각계 각 장르에서 분단을 허물어내자는 목소리들이 분출되고 있다. 서로 죽이고 죽임 당하던 사이였다. 사상이나 이념을 위해 예술이 복무하던 시절을 지나왔다. 박동실의 음악을 월북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접근해보면 그 흔적들이 보일 것이다. 상처들도 보일 것이다. 안기옥도 마찬가지다. 정상회담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도 산적한 숙제들을 또한 정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근자에 와서야 박동실의 창작판소리를 용기 있게 거론하며 연구한 사례들이 있다.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판소리를 재창조했다는 담론이 그 중심이다. 화해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박동실을 어떻게 재소환해야 할까?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트라우마들을 양산해왔다. 그 과정에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 박동실의 손자 김정호가 왜 '이름 모를 소녀'를 통해 한국특유의 창법인 포크-팝을 재창조했는지 면밀한 추적이 필요하다. 나는 또 왜 김정호의 노래만 중얼거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느냔 말이다. 박동실이나 안기옥의 월북을 통해 상처받거나 죽임당한 예술의 세계는 또 어찌 할 것인가. 박동실의 창작판소리 작곡은 이런 종합적 토대 위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박동실의 상처와 김정호의 상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다. 남북평화의 시대 정작 해야 할 일은 이 트라우마들을 치유하는 깊고도 넓은 방법들을 고안하는 일 아니겠는가.






남도인문학 TIP 박동실의 생애와 예술세계


1897년 9월 8일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박장원이고 외조부는 배희근으로 판소리 집안이다. 북한쪽 자료에는 당양군 금성면 대판리 출생으로 나온다.

제적등본상으로 보면 1923년 광주군 본촌면 용두리에서 담양으로 전적하였다. 광주 본촌 용두리 본적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9세에 부친 박장원에게 소리를, 10여세 전후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다.

1934년부터(1935년 혹은 1938년이라는 설도 있음)박석기의 후원으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한애순, 김소희, 임유앵, 임춘앵, 박귀희, 오비연, 전명옥, 박명주, 박후성, 김녹주, 안채봉, 공기남, 조상선, 조해숙 등을 가르쳤다.

소리계보는 서편제의 시조라 호명되는 박유전으로부터 담양의 명창 이날치, 김채만으로부터 박동실로 이어진다. 1930년에는 화순협률사를 따라 전국 공연을, 1945년 광주극장에서 있었던 광주성악연구회에 관여하는 등 활발한 국악 활동을 펼친다.

1947년 국극협회라는 창극단을 만들어 지방공연에 나선다. 창작판소리 열사가(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및 해방가를 지어 가르친다. 1950년 한국전쟁기에 조상선, 공기남, 임소향, 정남희 등과 월북한다. 1950년 국립예술극장 협률단에 입단, 사회주의 음악예술인 칭호를 받는다.

1956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춘향전을 현대화하고 이순신장군 등의 전통극도 만든다. 1957년 9월 김일성 환갑상 및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다. 1961년 7월 27일 인민배우 칭호를 받는다. 1968년 12월 4일 사망한다(71세). 북한에서의 활동은 정병헌 교수 등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긴 했지만 향후 보완하거나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다.



남도민속학회장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