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백성의 말과 기득권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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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기고>백성의 말과 기득권의 말
김요수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감사실장
  • 입력 : 2018. 10.16(화) 21:00
  • edit@jnilbo.com
백성들은 즐거우면 노래하고, 잘하면 서로 북돋는다. 웃기면 웃고, 남이 잘하는 일은 비꼬지 않는다. 짜증나면 투덜거리고, 화나면 욕한다. 총칼 앞에 수그러들 때도 있으나 평소에는 마음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백성들은 노래하거나 짜증낼 때 우리말로 한다. 어려운 한자나 외국말 쓰지 않는다. 우리말의 느낌이 귀에 쏙 들어오고, 온몸에 착 감기니까.

좀 배웠다는 사람과 아는 체하는 사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얕잡아보고 깔본다. 행복하게 살지만 돈이 없고, 부지런히 살지만 총칼이 없어서 그러는 걸까? 아무튼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고 마구 굴린다. 백성들이 쓰는 우리말도 업신여기고 푸대접한다.

요새는 못 듣는 사람을 청각장애인이라 부른다. 귀머거리란 말을 썼다가는 낮잡아 본다며 헐뜯기기 쉽다. 말 못하는 사람은 언어장애인이라 부른다. 벙어리란 말을 쓰면 ‘누굴 두 번 죽이냐’며 무섭게 달려든다. 덕분에 벙어리장갑과 벙어리매미, 벙어리손님이란 말도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벙어리장갑은 엄지손가락만 따로 가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함께 끼는 장갑이고, 벙어리매미는 암컷매미를 말한다. 벙어리손님은 속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말이 없는 사람을 이른다.

옷맵시(패션)를 다루는 어느 잡지에 ‘아티스틱한 센스를 베이스로 하고, 구띄르적인 디테일을 플레버했다’는 말이 있었다. 토씨 빼고는 우리말이 없다. 나는 뭔 말인지 몰라서 미용실 원장께 여쭈었다. ‘뭔 개소리야!’ 원장의 말은 쉽게 알아먹었다. 개가 짖는데 개소리는 알아먹지 못한다는 말이다. 백성들은 욕도 한마디로 알기 쉽게 한다. 그 글을 쓴 사람은 갑자기 개가 되었고, 나는 혼자 낄낄거렸다.

손오공탈(스마트폰)을 열어 찾아보니 그런 글이 숱해서 백성들은 옷맵시 잡지 이름을 따서 ‘보*병신체’라고 이미 부르고 있고, 나는 ‘*그병신체’를 뒤늦게 안 거다. 백성들은 ‘병신체’의 쓰임을 여러 가지로 넓혔다. 잘난 체하려고 안달복달하는 글은 ‘박사병신체’, 아는 체 하느라 조바심치는 글을 ‘교수병신체’, 자랑(질)만 일삼는 글을 ‘블로그병신체’,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외국이야기를 방송에서 떠듬떠듬한 우리말로 해대는 말투는 ‘유학병신체’라고 알맞게(?) 맞춰 놓기도 했다. ‘병신체’를 쓰는 사람은 자기가 쓴 말을 제대로 알고 하는 걸까?

돌아보니 언저리에 그런 말과 글 꽤 돌아다닌다. 밥자리에서 되지 않는 외국어를 섞어 쓰며 배움을 우쭐거리는 사람들, 이야기하다가 자기만 아는 낱말을 뽐내며 맞은편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삶에 스며든 왜말도 아직 많이 머물러있는데 이제는 우리 스스로 외국말을 가져다가 으스댄다. 건축과 의료에서부터 행정과 노랫말까지 ‘그들만의 잔치’를 열어 백성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것일까?

‘병신체’는 백성들을 따돌리는 꼼수이고, ‘니들보다 낫다’는 쩨쩨한 뻐김일 뿐이다. 백성들은 몰라서 왕따를 당하고, 몰라서 물으면 ‘재수 없다’고 꺼린다. <옛 그림 인문학(박홍순 씀)>이란 책에 나오는 ‘백성은 땅을 밭으로 삼고, 벼슬아치는 백성을 밭으로 삼는다’는 글귀가 떠오른다.

곳곳에 ‘병신체’가 자주 나타나고, ‘병신체’가 우뚝할 때마저도 있다. 아마 우리가 ‘병신체’를 잘 봐주고 부러워하는 마음이 깃들어있어서 그러지 않나 싶다. ‘병신체’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돌아다닐수록 백성들은 노래와 웃음을 잃고, 벼슬아치의 밭이 된다. 이름 짜한 사람들의 멋진 토론회를 듣고 돌아서는 어느 백성의 아들이 바닥에 툭 뱉어놓은 말, ‘뭣도 모르면서 탱자탱자하네’. 흠칫 놀라 바닥에 떨어진 녀석의 욕을 집어 내 말과 글을 더듬는다. 백성의 아들이 한 말은 ‘0도 모르는 놈이 탱자 보고 부랄 타령한다’는 익은말(속담)이다.


김요수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감사실장
edit@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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