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 확산시킨 불꽃 청년, 장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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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 확산시킨 불꽃 청년, 장석천
1903년 완도군 신지면 송곡마을에서 출생||1920년대 후반 전남 청년운동 핵심 역할||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하자 투쟁본부 결성||광주 학생 시위 지도, 전국으로 확산 시도||청년단체·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 구금||폐결핵 병보석 출감, 33세에 광주서 숨져
  • 입력 : 2021. 10.06(수) 16:45
  • 편집에디터

장석천 출옥기사(동아일보 1933년 11월 16일자)

수감번호 451번 장석천의 모습

신지 항일운동기념탑

1920년대는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민족운동 방략이 다변화되었다. 이에 노동·농민·청년·여성·형평운동 등 대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조직 기반을 갖추고 활발히 전개된 것은 청년운동이었다. 특히 광주·전남의 경우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이 결합하였고, 그 결과물이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독립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1920년대 후반 전남지역 청년운동의 핵심 인물은 장석천이었다. 전남청년동맹 집행위원,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 조선공산청년회 전라도 책임자, 신간회 전남지회 상무감사 등의 직함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석천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본부를 결성했고, 조선 청년 총동맹 및 신간회와 협력하여 광주학생운동을 경성과 전국에 확산시킨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반 대중에게 낯선 인물이다. 그를 살펴보는 이유다.

전남청년연맹을 이끌다

장석천(張錫天, 1903~1935)은 1903년 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 마을에서 지주였던 장인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형 석지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었고, 작은형 석태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1924년 조선총독부의 토목기사가 되었다.

장석천은 완도 고금보통학교(현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에 진학한다. 중앙고보 2학년이던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후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다. 그는 한국인 학생을 이유없이 괴롭히던 '호랑이'라고 불린 일본인 체육교사를 응징하였는데, 이로 인해 보성고등보통학교(보성고보)로 전학하였다.

1924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장석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수원고농)에 진학한다. 1926년 6월, 그는 '교사 신축' 등을 요구하면서 20여 명의 수원고농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전개한 후 무기정학을 당하자,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 뒤인 1926년 10월경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그는 청년운동에 온 힘을 쏟는다.

장석천은 가장 먼저 광주청년회(서울청년회계) 후신인 광주청년연맹에 가입한다. 광주청년회는 1920년 6월 창립된 청년단체로, 장석천이 가입할 무렵인 1926년에는 25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단체였다. 1926년 2월 전남청년회연합회가 전남청년연맹으로 조직 개편되었고, 이후 전남지역의 청년운동은 서울청년회계의 전남청년연맹이 주도하게 되었다. 광주청년회는 6월경 전남청년연맹에 가입한 후 광주청년연맹으로 재탄생된다.

1926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씨앗이 된 성진회가 왕재일, 장재성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성진회'는 초기 전남청년연맹을 주도했던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석천이 성진회를 지도했음은 1927년 2월 광주청년연맹이 주최한 광주고보와 광주농교 졸업생 환송식에서 "졸업 후에도 우리 민족을 위해 분투할 것을 격려"하는 환영사를 하고 있고, 왕재일·박인생 등 성진회 회원들을 광주읍 남문통 요리집에 초대하여 "학교를 졸업하는 자는 앞으로 사회에 나가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사회운동에 종사할 것이며, 재학생은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여 공산주의 연구에 조력하라"고 격려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927년 4월, 장석천은 전남청년연맹 정기총회에서 강해석, 김재명 등과 더불어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28년 여름 강해석·김재명·지용수 등 광주청년동맹원 가운데 조선공산당(4차) 참여자들이 대거 검거되자, 장석천은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된다. 1928년 12월에는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가 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으로 확산시키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한 것이다. 11월 3일 학생 충돌사건을 목격한 후 광주청년동맹 집행부는 오후에 임시모임을 갖고 '투쟁대상은 광주 중학생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등 학생투쟁을 항일운동으로 전환할 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11월 4일 광주학생들의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알리기 위한 비상대책기구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출범시킨다. 광주청년동맹은 효과적인 투쟁을 지도하기 위해 업무를 분담하였는데, 광주 및 전조선학생의 지도는 장석천이, 광주 조선인 학생의 지도는 장재성이 담당하였다.

장석천은 광주 학생들의 시위를 지도하면서 이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킬 계획을 세운다. 서울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건과 권유근, 신간회 본부 집행위원장인 허헌 등이 광주에 내려오자, 장석천은 이들에게 학생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킬 것을 제의한다. 그들이 동의하자, 서울에서의 준비를 위해 강영석을 상경시켰다.

장석천은 11월 17일 상경,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장 차재정 등을 만나 서울의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12월 2일 서울의 각 중등학교에 격문이 살포되었고, 시위는 12월 5일 경성제2고보를 시작으로 16일까지 지속되었으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살핀 것처럼 광주신간회 집행위원 겸 광주청년동맹 위원장인 장석천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시위가 시작된 12월 5일 경찰은 주동 학생들의 배후였던 청년단체와 신간회 간부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날 장석천도 체포된다. 장석천은 광주지역 시위의 배후 주동자라 하여 광주경찰서로 호송되어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0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6년을 선고받자,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지만 형량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덤조차 찾을 수 없어

그가 광주형무소를 출감한 날은 1931년 12월이었다. 그는 출옥 후 적색노동조합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는 경성에 올라가 적색노조를 조직하기 위해 조선제사주식회사의 노동자 박영환 등과 접촉하였는데, 박영환이 체포되면서 장석천도 체포되고 만다.

장석천은 1932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3년 11월 7일 병보석으로 출옥한다. 당시 신문에는 병보석이 만성위장병 때문이었다고 보도되었지만, 조카 장원에 의하면 폐결핵이었다고 한다. 형무소 당국이 그의 병명을 숨긴 것이다. 출옥 후 2년간 광주 누문동(광주면 누문리 218-1번지)의 집에서 요양했지만, 1935년 10월 18일 세상을 뜬다. 향년 33세였다.

그의 마지막 모습처럼, 그 가족사도 가슴이 저린다. 장석천은 15살 때 고금도 여인과 결혼, '옥선'이라는 아들 하나를 둔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형사들이 따라다니면서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장석천 사후 아내와 아들 옥선이 고금도에 내려와 살았는데, 1944년 징용으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장석천이 죽자 가족들은 그의 시신을 광주 양동의 묵정밭에 묻었는데, 경찰이 무덤 앞에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다. 그의 무덤은 후일 개발과정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의 죽음만큼이나 그의 사후의 모습도 안타깝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2009년 1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흔적을 찾다

장석천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난 완도군 신지면 송곡마을을 찾아야 한다. 그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송곡 마을, 그러나 오늘 송곡마을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송곡마을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지석영의 유배터는 남아 있었지만, 어디에도 장석천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도문화원장은 "그의 생가터가 신지면 송곡리 287-1번지이고, 그가 고금보통학교(현 고금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송곡마을과 가까이 있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신지면 신지로 582번길 7번지에 위치한 '신지 항일운동 기념탑'을 찾아가야 한다. 1993년 완공된 기념탑 뒤편에는 신지도 출신의 항일투사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 주인공은 장석천과 수의위친계 조직원으로 간도 용정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임재갑이었다. 이 둘의 업적은 탑의 오른쪽 뒷벽에 별도로 공적을 새기고 있었다.

그가 남긴 흔적은 또 있다. 수인번호 451번이 새겨진 죄수복을 입고 감옥에서 찍은 인물카드 속 사진 한 장이 그것이다. 옥살이로 인해 다듬지 못한 수염은 너저분하게 자랐지만 짧게 자른 머리와 길게 찢어진 눈 속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함이 뿜어나온다. 일본 순사들마저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나의 몸은 너희들에 의해 구속되어 있지만, 내 정신과 조선의 독립은 구속할 수 없다"는 무언의 항변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장석천, 그는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시대정신을 앞장서 실천한 남도인이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