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기를 각오한 농민들의 가열찬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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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협·지발위
굶어 죽기를 각오한 농민들의 가열찬 투쟁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2)암태도, 죽음을 무릅쓴 투쟁의 섬||지주 문재철과 끝없는 싸움||소작농, '아사동맹'으로 단결||소작인회 대표 '서태석' 활약||소작료 8할에서 4할로 인하||서태석, 독립운동하다 옥고
  • 입력 : 2022. 07.07(목) 16:39
  • 김혜인 기자

섬이지만 농경지가 발달한 암태도 풍경. 신안군 제공

천사대교를 지나자마자 만날 수 있는 신안군의 암태도(암태면).

이곳 암태도 소작쟁의는 신안 항일농민운동사의 대표적 사건으로 불린다. 특히 소작인회 핵심 인물인 서태석을 중심으로 지주 문재철 일가에 맞서 소작농들이 굶주림을 각오한 투쟁으로 승리를 이뤄낸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

일제강점기 당시 '산미증식계획'과 '저미가정책'으로 인해 일제가 우리나라를 쌀 공급지로 만들어 생산량을 대폭 늘려감과 동시에 국내의 쌀 가격을 낮게 유지했다. 이때문에 지주들의 수익이 감소하자 지주 측에서는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전보다 더 징수해 손실분을 보충하려 했다. 특히 암태도의 지주들은 8할의 소작료를 걷어가는 등의 극심한 횡포를 부렸고 소작인의 원성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서태석을 중심으로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문재철 일가를 비롯한 일제의 비호를 받고 있던 지주들이 이러한 소작회의 요구를 무시하자 본격 추수거부 및 소작료 불납동맹으로 지주에게 맞서게 된다. 당시 목포경찰의 일본 순경들이 무력으로 소작인들을 제압하면서 지주 측은 다시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려고 했지만 소작회의 집단행동으로 인해 방식을 바꿔 회유·협박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4년 3월27일 면민대회를 열어 한 번 더 소작인의 요구를 주장했지만 지주들은 오히려 면민대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소작인(서태석·박종남·서동오 일행)들을 폭행했다. 당연히 이들의 반발은 더욱 커져갔다. 소작인회는 각 신문사나 노동단체를 통해 요구안을 더욱 강경하게 밀어부쳤고 1924년 4월15일에 열린 전조선노농대회에 대표를 파견해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요구안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한 소작인들은 문재철의 아버지 문태현의 송덕비를 파괴하며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소작인회의 핵심인물인 서태석이 대전역에서 경찰에 체포되고 13명의 간부가 구속됐다. 이때부터 암태부인회도 참여하면서 암태도 소작쟁의는 암태도 전 주민의 일로 확대됐다.

소작인회의 단체행동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24년 6월2일부터 석방 요구 시위, 법원 앞에서 농성을 시작하는 등의 본격적인 집단행동이 시작되고 7월8일부터는 600명이 다시 법원으로 가 아사동맹을 맺고 단식투쟁에 접어들었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도자 전국에서 모금운동이나 지원강연회 등이 열리자 일제는 농민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협상테이블을 마련했다.

소작율 인하를 내용으로 하는 4개의 결의사항의 최종 타결됐다. 먼저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간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일금 2000원을 기부하기로 했으며 이어 미납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상환한다는 내용과 구금 중인 쌍방의 인사에 대해서는 9월 1일 공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한다는 사항이 있었다. 파괴된 비석은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한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서로 협의함으로써 소작인회의 운동이 마무리됐다. 암태도소작쟁의의 운동의 영향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전라남도와 서해안 지방의 소작쟁의를 자극하고 이어지는 도초도, 자은도, 지도 등지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안군 암태면에 일제강점기 소작인들의 투쟁을 기리는 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가 세워져있다.

● 독립운동가 서태석의 생애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한 서태석은 단순한 운동가가 아니다. 그는 항일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갖은 옥고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역사적 인물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기록한 서재담 전 암태농협 조합장의 기록장에 따르면 서태석은 1884년 4월 10일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 마을에서 태어나 8살에 한문 서당에 입학해 한학을 공부했고 한약을 잘 만드는 '명의'라고 불릴 정도로 세간에서는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8년간 암태면장을 지낸 서태석은 일제의 횡포를 지켜보며 독립투사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면장으로 부임한 1912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자 일본 정부가 대파작물 종자를 무상배급한다고 해놓고 면에서 파자대금을 징수하는것도 모자라 물을 대지 못하는 빈 논에까지 세금을 부과했다. 이 사실을 안 서태석이 엄히 직원들을 문책해 면민들로부터 징수한 금액을 반환조치시켰다.

서태석은 일제수탈정책에 편승해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인간으로써 죽기보다 싫다고 하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이에 서태석은 면장을 그만두고 독립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19년 3·1운동 호남총책을 맡고 태극기를 구매해 비밀리에 운반하던 중 목포에서 경찰에게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

1923~1924년까지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하고 이후 독립운동을 몇 차례 더 하다가 갖은 옥고를 더 치러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됐다. 그렇게 정신이상자가 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누이가 살고있는 신안군 압해면 어느 마을(장갑리로 추정) 논두렁에 죽은 채 쓰러져 있던 그의 모습이 생애 마지막이었다. 사망 시기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하나 그의 수정된 제적등본에 의하면 사망시기는 1943년, 향년 60세의 나이로 추정된다.

서재담 전 암태농협 조합장

● 암태를 기억하는 사람들

서재담 전 암태농협 조합장은 암태도 소작쟁의를 비롯해 암태에서 일어난 한국 근현대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80년 평생을 암태에서 나고 자랐으며 암태도 소작쟁의 농민의 후손이자 이 곳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적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다.

서재담씨는 서태석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선대 사람들이 기억한 서태석의 생애와 업적을 계승하기 위해 기록해왔다고 밝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지난 2008년 서태석 선생이 대전 국립 현충원의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또한 서 선생을 비롯한 소작쟁의 참여자 4명이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대신 암태도에는 농민항쟁 기념비, 묘지 터에는 사적비와 가묘가 남겨져 있었다.

서씨는 "해방 이후 반공사상으로 인해 가족이 죽고 고통받았던 그 어린날의 기억까지 잊지 않고 있다"며 "이렇게 구전을 통해서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는 사람이 없다. 당시 희생된 분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암태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를 기억·기록해나갈 것이다"

한자가 혼용된 그의 수기 기록장에는 서태석의 생애와 암태도 소작쟁의에 관한 사항들이 정리돼있다. 그의 기록장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적혀있다.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돈없는 사람의 편으로 다가서지 않는것이 세정(世情)입니다. 그러나 서태석 선생은 힘없고 돈없는 약한자의 편에서 권력에 저항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정신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천추만대(千秋萬代)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서기 1995년 6월 구전을 통한 기록."

암태도 주민들이 기동리에 세운 서태석 추모비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김혜인 기자 kh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