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땅에도 봄은 온다… '하의3도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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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땅에도 봄은 온다… '하의3도 농민운동'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5)하의도, 350년의 농민운동 역사||농민들, 지주와 국가 양쪽에 세금 내||일제강점기, 땅을 찾은 기쁨도 잠시 ||주인 9번 바뀌어…무력 투쟁하기도 ||해방후 미군정의 총기 살상에 저항||김대중 "하의도 정신으로 독재 투항"
  • 입력 : 2022. 08.17(수) 13:38
  • 김혜인 기자

하의도 전경 사진. 농민운동 당시 하의도·상태도·하태도를 합쳐 하의3도라 칭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매년 그의 서거일인 8월18일만 되면 많은 이들이 찾아와 그를 기리는 곳. 이곳 하의도는 김 전 대통령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탄생 이전부터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오랜 농민운동의 역사를 품에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농민운동의 역사는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에서 볼수 있는데, 이곳은 지난 2009년 4월24일 개관했다. 개관식 당일 김 전 대통령도 참석했으며 이날이 그의 마지막 고향 방문이었다. 입구 오른편에는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을 한자로 쓴 그의 서체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하의3도 농민운동의 전개

김경민 전남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들어간 기념관은 하의3도 농민운동의 역사가 한가운데 펼쳐져 있었다. 하의3도에서 벌어진 농민운동은 조선시대 선조임금과 인목대비 사이에서 태어난 정명공주가 당시 세도가인 풍산 홍씨 일가에게 시집을 가면서 시작된다.

1623년 정명공주가 혼례를 올릴 당시 인조임금으로부터 하의3도 땅 20결(약 8만평)에서 4대손까지 세미를 받아먹을 수 있는 권한을 혼수로 받았다.

김 해설사는 "그러나 약속한 4대손이 지나 5대손인 홍상한은 땅을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농민들이 개간한 140결의 땅까지 포함해 섬 전체를 하사 받았다고 둘러대며 강제로 결세를 징수하면서, 하의도 농민들의 고달픈 삶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김 해설사는 "영조임금 때에는 호조에 결당 쌀 23말, 홍씨가에 40말씩 내는 등 국가와 지주 모두에게 세금을 내야하는 일지양세(一地兩稅)가 이뤄졌다. 이때 일지양세로 근심이 깊어진 농민의 얼굴과 닮았다하여 오림리에 위치한 바위 이름이 바로 양세바위다"고 덧붙였다.

이후 정조임금 때 어모장군을 역임했던 윤세민과 김호율이 대표로 한양에 올라가 신문고를 힘껏 울리며 진정서를 올리자 정조가 홍씨가를 엄중히 책망하고 무명잡세를 일체 근절한다는 어제를 하사했지만, 두 사람은 이 반가운 소식을 끝내 하의3도 농민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김 해설사는 "어명에 너무도 기뻐한 이들은 한강을 건너 영등포를 지나는 도중 홍씨가의 노복들에게 붙들려 어제와 제반서류를 모두 뺏기고 평안북도 곽산으로 유배돼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며 "하의도 농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1870년(고종7년) 전라관찰사에 이호준이 부임하자 농민들은 땅을 찾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올렸다. 이호준은 홍씨 일가를 질책하며 24결 외 140결에서는 징수를 금하고 24결에 대해서도 부당 4되에서 2되로 세를 줄였다.

김 해설사는 "그렇게 농민들이 제 땅을 되찾은 기쁨도 잠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친일파 이완용이 홍씨 일가 8대손 홍우록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지 소유권이 홍우록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하급증을 발급해 농민들은 또 다시 땅을 뺏기고야 말았다"며 "이후에도 이렇게 부당한 방식으로 땅 주인이 무려 아홉번이나 바뀌며 농민들의 속은 더욱 타들어갔다"고 전했다.

지난 9일 하의3동 농민운동 기념관에서 김경민 전남문화관광해설사가 농지탈환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농지탈환운동 본격화

농민들은 홍우록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 재판을 했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일본인 인권변호사 고노부쓰노스케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해 승소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 해설사는 "소작료에 대한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으로 제기했으나 사실상 농지소유권과 맞물려 진행됐다"며 "당시 홍우록은 패소를 예감하며 땅을 팔았고 수 차례 주인이 바뀐 후 일본 오사카 재벌 우콘 곤자에몬이 지주인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우콘은 농민 대표였던 상태도 박공진을 매수했다. 이에 박공진은 토지소유권확인소송을 해야 한다면서 농민들에게서 농지소유권확인소송 위임장 날인을 받는 등의 음모를 꾸몄고 결국 승소판결문이 우콘에게 넘어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무력 투쟁에 나섰다. 농민들 수 십명이 체포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자 재판소에서는 구속자를 볼모로 화해를 강요했고 결국 구속된 농민들 대부분이 풀려나며 하의3도 땅 431여 평은 1914년 9월28일자로 우콘 곤자에몬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당시 화해 조건으로 제시한 저수지, 간이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주겠다던 우콘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농민들은 하의소작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소작료불납동맹을 결의했다.

이때 또 다시 지주들이 수 차례 바뀌었다. 1920년 하의3도 농지소유권은 일본인 도쿠다 야시치에게 넘어갔다. 도쿠다는 소작료 체납자 자센에 대한 차압을 단행하고, 소작료를 두 배로 올린다. 황무지와 논두렁까지 면적에 넣어 실제로 6~7할 정도로 거두자 농민들은 김응재 지도하에 다시 한 번 하의소작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항쟁했다.

김 해설사는 "도쿠다는 정치깡패인 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을 하의도로 데려와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나 1945년 8월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하자 도쿠다는 빈 손으로 떠났고 드디어 하의3도 농민들은 땅을 다시 되찾게됐다"면서 "이날은 하의3도 농민들에게 감격과 환희의 날이었다"고 덧붙였다.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전경.

●해방 후에도 이어진 투쟁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청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농민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 군정청은 신한공사를 발족시켜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미 군정청의 소유로 전환시켰고 이 과정에서 분노한 농민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강경진압에 나섰다. 이 때 일제강점기 때에도 없었던 총기 살상사건이 벌어지는 등 참상을 목격한 군중들이 신한공사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며 항쟁을 벌였다. 이날이 음력 7월7일로 알려지며 7·7항쟁으로 불리고 있다.

이후 1950년 2월13일 제헌국회에서 하의도 농지는 농민들의 소유이니 무상반환하기로 의결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며 중단됐고 1956년 불하 형식으로 정보당 200원씩 농민들이 부담하면 상환금납통지서를 발부하고 행정기관에서 등기 이전을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승만 정권에서 이행되지 않았고, 50여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90필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의 등기 이전이 완료됐다.

김 해설사는 "하의3도 농민운동은 신안의 다른 농민운동과는 달리 소작료를 두고 벌인 사투가 아닌 토지탈환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며 "350년 동안 땅 주인이 아홉 번이나 바뀌는 등 단순히 섬마을에서 일어난 일개 농민운동이 아닌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이다"고 말했다.

하의3동 농민운동 기념관 입구에 걸린 개관식 기념사진. 이날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석하며 그의 마지막 고향 방문이 이뤄졌다.

●하의도 정신과 김대중의 민주주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곳 하의도에서 1926년 1월6일 태어났다. 지조 높은 대유학자 초암 김연 선생이 차린 학당 '덕봉강당'에서 학문을 익혔다. 김연 선생은 당시 마지막 유학자로서 많은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연 선생은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하의3도 주민들의 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당시 체포되거나 구속된 농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변론에 나서는 등 유학자뿐만 아니라 운동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평생 불의에 저항하며 살아온 김연 선생의 제자로서 김 전 대통령도 그 불굴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고향에서 김연 선생의 덕봉서원을 찾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덕봉서원에 대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곳을 다녀간 어릴 적의 체력이 인생에 있어 많은 부분을 굳게 받쳐주었다"고 기술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24일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옛 선조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6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20여 년간 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고, 3년 반의 망명생활도 했지만 하의도 농민의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도 악의 편이다.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 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 설립 기념비.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혜인 기자 kh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