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정율성 어린시절 보낸 곳… 옛 능주목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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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정율성 어린시절 보낸 곳… 옛 능주목 중심
●화순 관영마을
연주산 감돌아 흐르는 지석강
물속 비치는 누정·철길 환상경
영벽정 봄 풍경 능주팔경 하나
능주 들소리 화순 대표 민속놀이
  • 입력 : 2023. 12.14(목) 12:24
관영마을 골목. 정율성 옛집을 중심으로 담장 벽화가 그려져 있다.
능주들소리 연습. 전남민속예술축제 참가를 앞둔 지난해 10월이다.
영벽정 앞 강변에 줄지어 선 왕버들. 세월의 무게감이 묻어난다.
지석강변에 자리한 영벽정. 한적해서 더 좋다.
“썩을 놈들이 무담씨 시비를 걸어갖고 그라요. 거기 눈치 보느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문을 잠가났다요.”

‘혁명음악가’로 알려진 정율성의 화순 능주 옛집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의 얘기다. 어르신의 말투에서 정율성 기념사업에 딴지를 걸고 있는 정부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 묻어난다. 정율성 옛집의 안방 문고리에 ‘수리중’이라는 빨간 안내 문구가 걸린 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보훈부장관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정율성 기념사업에 대한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한창 진행되던 광주와 화순의 정율성 기념사업이 더디거나 답보상태에 빠졌다.

정율성(1914∼1976)은 광주에서 나고 화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능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숭일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그의 형들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다. 큰형(효룡)은 임시정부 요원, 둘째형(충룡)은 의열단원, 셋째형(의은)은 조선혁명간부학교의 모집책으로 활동했다.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정율성은 음악으로 일제에 맞선다. 중국의 100대 국민가요로 꼽히는 ‘연안(延安)송’과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했다.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의 ‘연안송’은 중국의 젊은이들을 옌안으로 불러들였다. 장엄하면서도 호방한 선율의 팔로군행진곡은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일제에 맞선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의 역사와도 함께했다. 1949년 10월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 불렸다. 1988년 덩샤오핑 주석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반포되고, 공식 의전곡으로 지정됐다.

정율성은 북한의 군가로 지정돼 있는 ‘조선인민군행진곡’도 1942년에 작곡했다. 해방 이후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중앙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중국의 혁명열사릉인 빠바오산(八寶山)에 묻혀 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국가 기념시설인 정율성기념관도 들어서 있다.

정율성은 중국에서 활동한 혁명음악가이자 항일 독립투사였다. 광주와 화순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뤄지는 이유다. 중국의 음악가로만 묶어두기엔 그의 삶이 너무 크고 넓기 때문이다.

정율성의 옛집이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 있다. 관영리(貫永里)는 관동, 영상, 영말, 정변촌, 남문밖 등으로 이뤄져 있다. 관동은 활을 쏘는 과녁이 있어 ‘과녁등’으로 불렸다. 영상과 영말은 웃거리, 아랫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관영은 관동과 영상·영말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붙여졌다.

관영리에는 농협, 보건지소, 파출소, 복지회관, 시장, 파크골프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큰 마을이지만, 옛날엔 더 컸다. 석고리와 함께 능주목의 중심이었다. 능성현에서 능주목으로의 승격은 1632년(인조 10년)에 이뤄졌다. 인조의 생모인 인현왕후 구씨의 시조가 태어난 관향이라는 이유였다. 능주목은 264년 동안 유지됐다.

옛 능주목 관아의 흔적도 남아있다. 첫 목사의 부임을 기념해 지은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이 복원돼 있다. ‘죽수’는 능주의 다른 이름이다. 죽수절제아문은 동헌의 정문이다. 당시 능주목의 백성들과 애환을 함께했을 고목도 즐비하다. 능주목의 객사였던 능성관은 일제강점 때 능주공립보통학교로 쓰였다. 객사 동쪽엔 봉서루가 있었다.

고인돌, 석장승, 고분도 마을에 있다. 관영리 고분은 지름 26∼27m, 높이 5m 안팎으로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매장의 주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조산(祖山)’이라고 부른다. 조산은 풍수지리로 용(龍)의 봉우리를 일컫는다.

지석강변의 영벽정(映碧亭)도 명물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연주산의 풍광이 맑은 지석강에 반영돼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운 누정이다. 영벽정은 1500년을 전후해 처음 지어졌다. 1632년에 능주목사 정윤이 고쳐 지었다. 영벽정을 주제로 한 점필재 김종직, 학포 양팽손의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새로운 능주목사를 맞고, 기존의 목사를 보내는 영송연회(迎送宴會)도 여기서 베풀어졌다고 전한다.

연주산을 감돌아 흐르는 지석강에는 연주산과 누정, 철길이 물속에 반영돼 환상경을 연출한다. 강변에서 줄지어 자라는 왕버들 고목의 몸집도 크고 굵다. 강물과 어우러지는 연주산의 풍치도 빼어나다. 영벽정의 봄 풍경은 예부터 능주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오호헤~위휘라 무등산 상상봉에 감도는 저 구름아/ 오호헤~위휘라 이 산정 저 들판이 어찌 좋아 떠날 줄 모르느냐/ 오호헤~위휘라 우리 군주 심은 낭구(나무) 삼정승이 물을 주어/ 오호헤~위휘라 육조판서 뻗은 가지 팔도 감사 꽃이로다….’

들녘에서 부르는 노동요인 능주들소리도 마을의 자랑이다. 능주들소리는 모판을 만들 때, 모를 찔 때, 모를 심을 때와 논을 맬 때 그리고 마지막 김매기가 끝난 후 마을에 들어올 때 한 소리 등으로 이뤄져 있다.

모심을 때 부르는 늦은 상사소리와 자진 상사소리, 논을 맬 때 부르는 세우자타령과 매화타령, 굼벌매기 개타령, 만드리 장원질 풍장소리 순이다. 논매기가 끝나면 농사의 장원을 뽑아 소에 태우고 장원질소리를 하며 마을로 돌아와 잔치를 벌인다. 장원의 집에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며 밤을 새운다.

능주들소리는 마을사람들에 의해 보존·전승되고 있다. 지금은 화순을 대표하는 민속놀이가 됐다. 지난해 10월 열린 전남민속예술축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내년엔 전남을 대표해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한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