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최미경>당신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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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최미경>당신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요
최미경 수필가·광주문인협회회원
  • 입력 : 2024. 03.14(목) 10:42
최미경 수필가
우리 집 앞에는 독서실이 있다. 거실 창 앞에 서면 가방을 멘 사람들이 좁은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3월이건만 오늘도 하나, 둘 독서실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부디 저 발걸음에 축복이 있기를…. 가끔은 독서실로 향하던 몇 몇이 입구를 지나쳐 구석진 곳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필자의 아들도 이 독서실을 드나들며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집에서 밥을 먹고 독서실로 향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던 세월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은 입구를 지나쳐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사라졌다. 막힌 공간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곳으로 갔을까. 내가 모르는 통로가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몇 번 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햇볕도 들지 않는 외진 곳. 그곳에는 전화 통화를 하며 서성이는 사람, 종이컵을 들고 생각에 잠긴 사람, 벽에 붙어 서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에 들이닥친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마치 길을 잘못 든 양 서둘러 돌아 나왔다. 그곳은 독서실이라는 곳에서 벌어질 자신과의 전투를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는 그들만의 장소였다.

노력한 만큼, 뜻한 대로 평온한 삶이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당장 한 발짝 내디딜 의욕도 생기지 않을 만큼 힘든 순간이 오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의 막막함은 다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의 무력감에 휩싸이게 한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홀로 걷는 것과 같은 시간을 지나지 않을까. 타지에서 오로지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던 시절이 나에겐 그랬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예쁜 것과는 별개로 몹시 우울했는데 해소할 방법을 몰랐다. 눈앞의 상대라곤 오직 남편. 사소한 일에도 달려들어 싸움을 거는 것으로 표출할 뿐 자존심 때문에 힘든 내색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하루 일을 마치고 난 후 한 시간 정도,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컴퓨터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으로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윈엠프(미디어 플레이어)에 담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무의식적으로 컴퓨터 게임을 했다. 짝 맞추기 게임은 생각을 비우기에 좋았고 음악은 큰 힐링이 되어주었다.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날도, 괜히 눈물이 흐르는 날도 있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는 찾지 않아 매일 밤 누렸던 그 시간은 나의 퀘렌시아였다.

류시화 님의 산문집 ‘새는 날아가며 뒤돌아보지 않는다’첫 장에는 ‘퀘렌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페인의 투우 경기장 안, 피투성이가 된 채 투우사와 싸우던 소가 잠시 싸움을 멈추고 어디론가 찾아간다. 그곳에서 소는 잠시 숨을 고르고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싸울 힘을 얻는다. 투우장 안에서 소가 느끼는 가장 안전한 장소, 이곳을 퀘렌시아라 부르는데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숨을 고르고, 화를 가라앉히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장소는 꼭 필요하다. 독서실 옆 후미진 구석진 곳이 됐든 작은 컴퓨터 방이 됐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도 자신만의 퀘렌시아가 되겠다. 깊은 계곡에서 빠져나와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걷고 있는 지금 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일까.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 잔에 당근과 계란 프라이로 여는 아침 시간, 딸아이 흔적이 가득한 오래된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리고 바삐 사느라 놓쳤던 옛 영화를 찾아보는 시간도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한참 전 예매해 놓은 라흐마니노프 연주회가 번뜩 떠오른다.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 역시 그렇다.

삶의 긴 여정에서 언젠가는 다시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홀로 걸을 날이 올 것임을 안다. 그때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그 시간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지금 나의 퀘렌시아를 더 단단히 다져야겠다. 문득 궁금해진다. 당신의 퀘렌시아는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