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4>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⑤ 운주사 천불천탑, 누가 언제 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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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4>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⑤ 운주사 천불천탑, 누가 언제 왜 만들었나?
서민의 희노애락 녹여온 못난이 돌부처 동냥치 석탑
  • 입력 : 2020. 07.16(목) 12:44
  • 편집에디터

1.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불우조 운주사 기사

다중이용시설 야외 예배 전용 공간

운주사 천불천탑은 그냥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여기저기에 세운 것만은 아니다. 주변 지형을 최대한 고려하고 불상과 탑을 함께 예배하려는 듯한 설계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전통적인 가람 배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운주사 천불천탑들은 어쩌면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한국식으로 변형해서 수용한 결과로도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골짜기 안에 펼쳐지는 탑과 불상의 배치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수도하는 기능보다는 부처님의 무덤인 탑과 부처님의 몸인 불상에 예배하는 기능을 매우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점이 눈에 띈다. 골짜기 초입 옛 건물터에 자리한 목조기와 건축물은 수도와 거주 기능이 위주이고 골짜기 안에 배치된 돌탑과 돌부처들은 예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방성에 초점을 맞춘 '다중이용시설 야외 예배 전용 공간'인 셈이다.

운주사 절 이름 변천

운주사는 대체로 출토 기와나 지리지?읍지류에서 고려 시대 이래 19세기 후반까지 '운주사雲住寺'로 표현되다가 '전라남도화순군도암면지全羅南道和順郡道巖面誌'(1923년)와 '능주읍지綾州邑誌'(1925년)에서만 '운주사지雲柱寺址'와 '운주탑運舟塔'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도선국사의 '행주론行舟論'이 이 시기에 비로소 읍지류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로 이해된다. 이러한 지리지·읍지류는 기본적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도 신증편에 실리지 않은 내용은 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수록된 '운주사雲住寺'나 발굴출토유물인 '운주사환은천조雲住寺丸恩天造' 암기와 명문으로 보더라도 고려 시대 이래 운주사의 옛 절 이름은 '운주사雲住寺'였음이 1983년 이후부터 학계에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절 이름에 담긴 도선국사의 행주론

운주사 절 이름의 한자표현이 달라진 것은 대체로 기문記文에서만 나타난 현상으로 두 갈래의 표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천불천탑을 단순히 회고하거나 천불천탑의 수리와 약사전 중건 같은 내용을 전하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도선국사 행주론의 유포를 위해 '운주지곡運舟之谷'('일봉암기日封庵記', 1737년)이나 '운주雲柱'('도선국사실록道詵國師實錄', 1743년)라는 지명을 사용한 사례로 나누어진다. 물론 이러한 기문들은 지리지나 읍지류와는 달리 옛 운주사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조차도 없었음은 그 기록이 갖는 중대한 한계이다.

이처럼 운주사 이름의 한자가 달라지는 것은 조선 후기라는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사상(도참설)에 입각한 '행주론行舟論'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행주론은 한반도를 배 형국으로 보고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풍수론이다. 사실 도선의 비보설은 지형을 인체에 비유하여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것처럼 산천의 혈맥에 침이나 뜸을 뜬다는 '자자론刺炙論'에서 출발했다가 '도선수미비'나 ''도선국사실록'에서부터 '행주론'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행주론은 임진·정유왜란 때 이 땅을 짓밟은 왜적의 침입에 대한 진정한 반성으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어디론가로 그 능욕을 당한 책임을 전가하려다 찾아낸 꼼수에 불과한 풍수론이다.

사찰 창건과 천불천탑의 제작 시기

그동안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조성은 크게 두 종류의 '사찰 창건설' 및 '천불천탑 조성설'이 대두되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어떠한 자료에서도 결정적인 근거로 삼을만한 구체적인 내용이 발견되지 않아 여전히 그 배경에 대한 억측이 난무한 실정이다.

이미 알려진 '도선국사 창건설'은 조상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이 아니라 '도선국사실록道詵國師實錄'이라는 기록에 의한 '역구전逆口傳'이 그 실상이다. 이를테면 허망한 '도선국사실록'을 본 지식인들이 지역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경우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1928년 봄부터 영암 도갑사에서 와서 석조불감 옆에 초가집을 짓고 거주한 이덕진 화상의 행보를 통해 '도선국사 창건설(천불천탑 조성)'이 주변 마을에 유포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가 온 영암 도갑사는 '도선국사실록'이 전해 내려온 곳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이처럼 '도선국사 창건설'은 그 실체도 불분명하고 현재 남아 전하는 석불과 석탑의 양식뿐만 아니라 절터의 발굴 결과로 미루어 보더라도 도선이 활동하던 9세기 중?후반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도선국사실록'은 그 기록이 갖는 많은 한계 때문에도 아주 미덥지 못한 기록으로 그동안 인식되어왔다.

여기에 비교하면 '혜명의 천불천탑 조성설'은 '도선국사 창건설'에 비해 그나마 어느 정도 합리성을 바탕에 두었다. 언전諺傳(속전俗傳)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학자 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년) 편찬 태도로 볼 때 뒤이어 등장한 '도선국사실록'의 기록보다는 실증적이며 사실적이다. 이렇듯 고려전기인 11세기 전반기에 활동하는 승려 '惠明'은 모두 세 곳에서 등장한다. 그 하나는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慧明'이다. 관촉사 '慧明'과 운주사 '惠明'은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慧'자와 '惠'자는 서로 통하게 쓰이는 용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일봉암기'의 기록 중 '은진恩津'에 '대인석상大人石像'과 '운주지곡雲柱之谷'에 '천탑'을 세운 것을 가리켜 비보처에 물物을 세운 사례로 든다. 두 지역을 병립시켜 서술한 이 기록은 운주사 창건에 대한 획기적인 자료로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 편년에 가장 근접한 시기이고 또 고려 초기에 괴력을 갖춘 신이적神異的인 불상 조성이나 불사가 많았음과도 상통하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강원도 양양의 명주사明珠寺를 1009년에 창건하고 이후 비로자나불을 조성한 '惠明'이나 강원도 원주의'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1025년)'의 각자刻者에 등장한 '惠明'과도 시기적으로나 활동연대로 보아 동일인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천불천탑 제작 시기의 고증을 통해 나타난 결과(13~14세기 조성설)와 2~3백여 년간의 시간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거대 석불 혜명 조성설'들이 후대의 '혜명 조성의 가탁假託'인 사례가 많은 것처럼 그 시기적 격차는 혜명의 직접적인 조성보다는 '혜명에 의해 촉발된 거대 석불 제작 집단'의 조성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조선 후기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거대 석불 혜명 조성설'들은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의 '도선 창건의 가탁'처럼 후대에 꾸며낸 '혜명 조성의 가탁'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운주사 석불과 석탑의 제작 시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지의 불상과 탑의 양식적 특징을 유심히 관찰하여야 한다. 불상과 탑의 모양새는 크게 보면 비교적 전통성을 유지한 경우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난 두 종류의 유형으로 나뉜다. 불상에서는 산정상 미완성 석불좌상과 일상(일명 와불), 석조 불감의 불상, 마애불,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 등 각기 독립된 공간을 점유하여 그런대로 격조를 갖춘 단독 예배상 유형과 크고 작은 돌부처를 암벽에 기대거나 대좌에 앉은 이채로운 모습의 암벽 석불군에서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탑에서는 백제계나 신라계 그리고 전형적인 고려 탑의 면모를 갖춘 방형 옥개석의 전통형식과 원반형이나 원구형의 옥개석을 쌓아 놓은 특이형식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불상이나 탑의 생김새 차이가 제작 시기의 일정한 경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배치 구도에서 보면 하나의 설계도에 의해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일구어낸 조화로움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성을 지닌다.

운주사의 창건은 발굴조사를 통해 11세기 이전으로 그 시기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으나 '천불천탑'의 제작 시기는 여전히 석탑과 석불의 양식적 특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유추해 볼 도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더구나 석불은 고려 전기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중?후기적 성격이 강하고 석탑은 고려 후기적인 특징들이 엿보여 자못 혼란스럽다. 출토된 범자 진언에 담긴 정보에 따라 고려 후기의 중창과 천불천탑의 조성이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은 몽골에 의해 원 간섭기(1270년~1356년)에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운주사의 창건'이나 '천불천탑의 조성'에 대한 속 시원한 해답을 줄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그 궁금증은 가시질 않는다.

천불천탑의 제작공정 복원

화순 도암면 다탑봉多塔峰 일대 운주사 골짜기에는 '대초리유문암大草里流紋巖'과 '다도응회암茶道凝灰岩'이 넓게 형성되었다. 암반 형성도 떡 시루처럼 약간 비스듬하게 켜켜이 층을 이루고 암반 균열 '틈(속칭 짬)'이 잘 발달하여 털어내기도 쉽다.

운주사 서쪽 산비탈 칠성석 부근부터 속칭 와불에 이르기까지 넓게 형성된 암반에는 석재(석탑, 석불, 칠성바위)를 채석하고 운반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동쪽 산비탈의 암반에서는 암벽 벼랑을 다듬어 석불들을 기대거나 세워두는 데에 그칠 뿐 채석 흔적들이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와불'에서 칠성석으로 가는 서쪽 산허리 주변의 암반에는 불상을 떨어낸 채석장이, 그 채석장과 칠성바위 사이에서는 암반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깊이 팬 마찰 흔적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채석장'과 '암반 마찰 흔적'은 운주사 천불천탑의 제작과 20톤 정도의 칠성석 같은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운반하였는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암반 마찰 흔적은 '거중기擧重機' 같은 운반기구로 칠성석이나 석불 혹은 탑 부재들을 들어 옮기다가 밧줄이 암반에 마찰하여 생긴 흔적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250여 톤 정도 무게의 거대한 석불좌상·입상(속칭 와불)을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우려고 암반에 조각하였을까? 정말로 당시의 토목 기술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지금의 기술로도 250여 톤 정도를 들어 올리려면 천 톤 정도의 크레인을 동원해야 하는데 비탈진 야산 정상에 자리한 이 거대한 돌부처에게는 접근할 수도 없다. 더구나 이들을 안치할 대좌시설도 주변에 마련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으켜 세울 수 없는 돌부처를 암반에 조각했을 까닭은 더더욱 없지 않은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시지 않는다.

관촉사 은진미륵도 다 만들고 나서 너무 거대하여 세울 방법을 찾지 못해 36년간 허송세월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삼등분으로 나눠진 석불을 세울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가 아이들이 강가에서 흙으로 불상을 삼등분으로 나누어 세우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우선 몸체를 세우고 그 옆에 같은 높이로 흙길을 쌓아 부재를 올리는 방식으로 불상을 조립했다는 것이다.[관촉사사적비(1743년)]

2. '운주사환은천조雲住寺丸恩天造'명 암기와(사진 유남해)

3.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 사진 황호균)

4. 한국지질도 능주도폭 운주사 부분(5만분의 1, 1966, 국립지질조사소)

5. 운주사 채석장(사진 황호균)

6. 암반 마멸흔(사진 황호균)

7. 석탑 암반 기단 요철 모습(사진 황호균)

8. 석탑 암반 기단 요철 모습(사진 황호균)

9. 석탑 암반 기단 요철 모습(사진 황호균)

10. 석탑 암반 기단 요철 모습(사진 황호균)

11. 석불 암반 연화대좌(사진 황호균)

12. 암반 연화대좌에서 도괴된 불두(사진 황호균)

13. '화성성역의궤'(1801년) 중 거중기전도(다산 정약용 창안)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