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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임인년 '범 내려 온다'… 악귀는 모두 물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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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임인년 '범 내려 온다'… 악귀는 모두 물렀거라

범 내려오는 설
역사 이래 우리 민중들은
가렴주구도 호환마마도
해학으로 승화시켜왔다
민중들은 민화를 통해서
권위로 지배하는 호랑이 아닌
백성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지도자를 원했다
임인년 설날 특별하게
내려오는 범, 그 우두머리
어찌 다룰지 지켜볼 일이다

게재 2022-01-27 15:05:30
김봉준 작, 2022 범내려온다
김봉준 작, 2022 범내려온다

범 내려 온다. 범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발이 넘고 동개같은 뒷다리, 전통같은 앞다리, 쇠날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 좌르르르르 헤치며 주홍입 떡 벌리고 자라 앞에 가 우뚝 서서 흥앵흥앵 하는 소리 산천이 뒤엎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 움츠리고 가만히 엎졌을 때.

이날치 밴드가 불러서 일약 국민가요가 된 '범 내려온다' 대목이다. 판소리 수궁가 중 한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임방울이 불러 국민가요가 되었던 '쑥대머리'나 '추억'에 비견된다. 아니 어쩌면 판소리 발생 이후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기특하다. 이날치 밴드가 그렇고 판소리가 그러하며 전통의 음악들이 그러하다. 송가인의 남도 트로트가 역설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남도트로트라는 명칭은 판소리 하는 이들이 가진 발성법의 특징을 들어 2년 여전 내가 붙인 용어다. 우후죽순 여러 방송사의 노래시합이 열릴 때마다 판소리를 포함한 국악을 인용하거나 대상 삼는 경우가 잦아졌다. 가히 국악의 전성시대라고나 할까. 그런데 가사가 수상하다. 날카로운 쇠날 같은 발톱으로 왕모래를 헤치며 붉은 입을 떡 벌리니 멈칫 놀래다가도, 고개가 갸웃해진다. 산천이 뒤엎어지고 땅이 툭 꺼진다고 노래하지만, 우는 소리가 흥앵흥앵하니 어쩐지 포효하는 소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독공독(以毒攻毒)의 도깨비, 농악의 대포수(大砲手)

2018년 본 지면을 통해 정월 매구굿(일반적으로 마당밟이라 한다) 대포수를 소개한 바 있다. 호랑이 잡는 착호인(捉虎人)과 농악의 잡색 포수, 사찰 산신각의 산신도 등을 연결하여 해석한 글이었다. 심승구 교수의 정리에 의하면, 호환에 대비한 전문 군대인 착호갑사는 1421년(세종 3)에 당번(當番)·하번(下番) 각 20명씩으로 처음 제도화된다. 한편 매구굿을 치는데 각양의 잡색들이 등장한다. 이 중 관심을 끄는 것이 포수다. 지역에 따라 대포수라 한다. 마을마다 꾸미는 형태는 다르지만 호랑이 가죽(혹은 노루가죽)을 입고 호랑이 벙거지(혹은 꿩깃털을 단 모자)를 쓰며 장총(혹은 채찍)을 든다는 점이 공통분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반 사냥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면은 착호인(捉虎人)이다. 경남 진주농악의 대포수는 아예 호랑이탈을 쓴다. 매구굿의 포수는 호환(虎患)을 물리치고 굿장을 정화하는 축귀(逐鬼)기능을 담당한다. 나는 이를 들어 정월 매구굿의 잡색 포수가 착호인(捉虎人)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농악에서 왜 사냥꾼을 형상하거나, 호랑이를 형상하는 옷과 모자를 두르고 장총을 맸을 것인가 말이다. 이를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비견할 수 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혹은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이독공독(以毒攻毒), 열로써 열을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호환마마의 대상 호랑이를 오히려 호환마마를 제압하고 다스리는 도깨비로 만들어버렸다고나 할까.

민화 까치호랑이의 수수께끼

민화 중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까치호랑이일 것이다. 한자 말로 호작도(虎鵲圖) 혹은 작호도라 한다. 한국민화학을 이끌고 있는 정병모 교수는 <민화는 민화다(다할미디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원래 까치호랑이의 상징은 벽사와 길상이다. 한나라 때, 집안에 들어오는 귀신을 마치 공항의 검사대처럼 복숭아나무를 대문 양옆에 세워 그 사이로 지나가게 했다는 풍속이 있다. 사람에게 이로운 귀신은 통과시키지만 해로운 귀신은 갈대 끈으로 묶어서 호랑이에게 먹히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복숭아나무, 갈대, 호랑이는 이후 액막이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호랑이는 삼재를 막는 동물로 여겼다. 까치는 한자로 희조(喜鳥)라는 별칭이 있듯이 기쁨의 상징이다. 그런데 왜 민화에서는 백수의 왕 호랑이를 해학적으로 꼬고 비틀어서 처참하게 망가뜨렸을까?" 그의 대답은 명료하다. 민화 까치 호랑이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호랑이가 아니라 까치라는 것이다. 민중들은 민화를 통해서 호랑이가 권위로 지배하기보다는 백성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지도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호랑이를 우스꽝스런 존재로 그리고, 까치를 이를 능멸하거나 다스리는 존재로 그리는 이유이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점에서 중국발 한자 풀이의 민화해석을 넘어선 정병모의 이론을 지지하고 존중한다. 농악의 대포수도 호랑이 가죽으로 벙거지를 둘러쓰고 모자를 만들어 쓰지만 매우 해학적이다. 판소리 수궁가 상좌다툼에 소환된 호랑이는 민화 까치 호랑이보다 더 망가진다.

범의 해 설날, 호랑이 다스리기

범은 언제 내려오는가? 설날 내려온다. 물론 임인년(壬寅年) 호랑이의 해이니 특별하게 내려오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다른 십이지와는 다르게 호랑이는 매년 설날 내려온다. 잡색 대포수가 설날이나 대보름날 마당밟이에 등장하는 것이나, 민화의 본래 기능이었던 정초 벽사진경의 뜻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날치 밴드가 세계무대를 향해 '범 내려온다'고 그리도 외쳤으니 어찌 안 내려올 수 있겠나. 양력설에도 내려오고 음력설에도 내려온다. 왜 그러한가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했다. 설날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라마다 다르고 문화권마다 다르다. 시대마다 달리 나타나는 것은 시간을 재는 방식과 인식의 척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기 외에도 불기, 단기를 비롯 힌두력 이슬람력 등 다종다양한 역법 체계들이 있다. 중국의 춘절을 비롯한 우리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다. 우리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종 32년인 1896년에 양력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에야 다시 음력설로 인정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동지를 설날로 여기던 시대도 있었다. 2018년 본 지면 설날 칼럼으로 자세히 밝혀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문제는 설날 내려온 호랑이를 어찌 다스리냐이다. 방방곡곡 마당밟이를 하며 호랑이가죽을 둘러쓰고 등장할 잡색 대포수는 어떤 모습일까? 창작민화가 대세인 요즈음 새로 그리는 까치호랑이는 또 어떤 모습일까? 마침 올해는 새해 어름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수궁가의 상좌다툼에 비유하자면 우두머리를 뽑는 일이라. 호랑이에 비유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앵흥앵하는 호랑이는 해남 관머리에 내려왔다가 의주 압록강까지 쫓겨난다. 마른 쇠똥처럼 생긴 별주부(자라)가 허벅지 거시기를 꽉 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찌 다급히 쫓겨났는지 숨 좀 돌리려 헐떡이고 있는데, 바위틈에 남생이 한 마리가 '배쪼쪼름'하니 눈에 비친다. 깜짝 놀라 다시 도망쳐 간 곳이 함경도 쇠소나무 고개다. 까치호랑이 민화에서 사팔뜨기 눈을 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호랑이가 '범 내려온다'의 호랑이다. 농악에서 '조리중'과 짝을 이루어 벽사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대포수가 또한 그 호랑이다. 역사 이래 우리 민중들은 가렴주구도 호환마마도 이같은 해학으로 승화시켜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수궁가 상좌다툼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자라 혹은 남생이가 바로 민중들이다. 임인년 설날 특별하게 내려오는 범, 그 우두머리를 어찌 다룰지 찬찬히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