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장> 63년 한길…"홀로 가기 보다 함께하는 삶에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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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명인·명장> 63년 한길…"홀로 가기 보다 함께하는 삶에 보람"
‘충장로의 보물’ 동구의 명인·명장을 찾아서||⑧ 정찬이 대한민국 9호 미용 명장||최고 상권 서울 명동서 실력 연마||충장로에 개업…손님 발길 이어져||“가르친 직원 대회 입상이 큰 보람”||2016년 7전8기 끝에 ‘명장’ 칭호||“끝까지 미용 기술 전하고 싶어”
  • 입력 : 2022. 05.19(목) 09:38
  • 곽지혜 기자

정찬이 대한민국 9호 미용 명장은 "혼자서 최고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직원들이나 후배들에게 기술을 알려주고 그들이 실력을 인정받았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마지막까지 제가 가진 미용 기술을 나누고 전수하고 싶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 기술을 배워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혹은 생계를 위해 배우기 시작한 기술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며 낡고 녹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고 단단해졌다.

반세기가 넘도록 손님들의 머리를 만져온 정찬이 원장의 기술도 그랬다. 서울 명동에서부터 번화했던 1970~80년대 광주 충장로를 거쳐 현재 동구 계림동에서 운영하고 있는 라인뷰티숍까지 미용업에 종사한 햇수만 63년째다.

최고의 미용사를 꿈꾸던 때도 있었고, 하루에 30명이 넘는 신부 화장을 맡으며 정신없이 미용실 규모를 불려 나갔던 때도 있었지만, 당시에도, 여든이 된 지금도 가장 행복한 일은 제자들에게 미용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미용 기술을 나누고 싶다는 정찬이 대한민국 9호 미용 명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찬이 대한민국 9호 미용 명장이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운영하고 있는 라인뷰티숍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 "최고 미용사" 꿈…명동서 기술 익혀

종갓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정찬이 라인뷰티숍 원장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 살림을 책임지던 어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959년, 17살의 나이로 들어간 미용학교를 결석 한 번 없이 졸업한 뒤 광주에 있는 미용실에 곧바로 취업했지만, 공부와 실전은 달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5분도 앉아 쉬지 못했던 미용실 업무에 지쳐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정 원장은 "어머니가 계신 나주집으로 다시 돌아가 면 소재지에 미용실을 차렸다. 제대로 일도 배우지 못한 채로 미용학교 때 지식만 갖고 손님들 머리를 만지는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며 "그때 내가 정말 부족하구나, 제대로 미용을 배워서 정말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미용사가 돼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고 서울 명동으로 갔다"고 회상했다.

서울 최고의 상권이었던 명동에서 일자리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인을 통해 수소문해 며칠을 기다린 끝에 한 미용실에 취직할 수 있었다. 누구 하나 친절하게 미용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히며 점차 실력을 쌓아갔다.

정 원장은 "미용실에서 틈틈이 기술을 익혀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면 같이 살았던 사촌언니의 머리를 만져주며 연습을 하고 미용실에서도 원장님 친구분들이 놀러 오면 꼭 머리를 만져드리겠다고 나섰다"며 "그때 그렇게 적극적으로 실력을 쌓으려 노력하고 그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그때부터는 저를 찾아주는 분들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정찬이 대한민국 9호 미용 명장이 꾸준히 연구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고전머리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 충장로 개업 뒤 큰 호황 누려

명동에서 점차 실력을 쌓아가던 정 원장에게 광주에서 날아온 뜻밖의 제안은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당시 금호미용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 수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요청이었다. 홀로 계신 어머니 곁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밤새 고민한 끝에 정 원장은 명동에서의 생활을 접고 광주로 돌아갔다.

2년여간 기술학교에서 미용 기술을 가르치며 보람도 느꼈지만,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수업 과정에 직접 미용업에 뛰어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정 원장은 "1968년에 다른 분이 하던 미용실을 인수받아 시작했고 그 후 5년 정도 열심히 일하다 보니 지금의 라인뷰티숍을 차릴 수 있었다"며 "2002년까지 30여년간 충장로에서 미용실을 운영했는데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충장로 4가, 5가가 명동 못지않게 번화할 때였기 때문에 미용실 영업도 참 잘됐다"고 말했다.

지금의 라인뷰티숍의 이름으로 특허를 내고 대표 기술로 잘 알려진 '업스타일' 헤어부터 주말이면 빼곡히 채워진 신부 화장 예약까지 정 원장의 미용실은 그야말로 호황이었다.

정 원장은 "아마 당시에 광주에서 신부 화장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라며 "하루에 많은 날은 38명까지 신부 화장을 했다. 당시에 직원들도 15명 정도 같이 일했었다"고 밝혔다.

● 직원들에 미용 기술 전수 주력

바쁜 생활 속에서도 정 원장이 놓지 않았던 것은 바로 직원들을 대상으로 미용 기술을 전수하고 각종 대회에 내보내 수상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대회가 다가오면 미용실 업무까지 제외시켜가며 기술을 가르쳤다. 주변에선 그렇게 기술을 다 전수해주면 손해를 본다고 말렸지만, 정 원장은 직원들의 실력이 점차 늘어 대회에 나가 입상이라도 하는 날이면 날아갈 듯 기뻤다.

정 원장은 "한 명을 가르쳐서 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나면 또 그 다음 사람을 가르치고, 그렇게 계속 이어가며 직원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며 "물론 실력이 쌓이니까 그만두고 본인 미용실을 차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게 미용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은 느낌을 받았고 진심으로 보람을 느꼈다"고 전했다.

정 원장은 남부대학교 명예교수로도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그동안 쌓아온 미용 기술과 노하우를 강의하는 등 지속적으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정찬이 대한민국 9호 미용 명장.

● 2016년 7전8기 도전 끝 '명장'

정 원장은 7전8기 도전 끝에 지난 2016년에야 대한민국 9번째 미용 명장으로 선정됐다.

정 원장은 "지금이야 훤히 알지만, 처음 명장에 도전했을 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며 "자격증도 다시 갖추고, 특허나 디자인 등록 등 오랜 시간이 걸려 명장으로 선정됐을 때는 그 옛날 명동에서 이루지 못한 최고의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룬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가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이든 일단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도전을 해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미리 겁부터 내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1973년 정 원장이 창업한 라인뷰티숍은 2003년 충장로에서 계림동으로 장소를 옮겨 올해까지 19년째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4건의 특허와 10회의 디자인 등록 보유 등 깊은 유서와 미용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아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진흥공단으로부터 '백년가게'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용 시술 외에도 다양한 미용 상품 개발을 위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손님들 역시 정 원장의 노력을 알고 여전히 발길을 잇고 있다. 처음 방문하는 고객들에게는 모발상태를 점검하고 관리에 대한 카운셀링도 진행한다.

정 원장은 "몇십년째 저만 찾아주시는 단골분들도 많지만, 지나가다 들려준 손님들도 한 번 머리를 하면 다음번부터 다시 찾아주신다"며 "이 나이를 먹어서까지 제가 직접 손님들 머리를 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정 원장이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것은 제자들, 또 사람들과 함께하는 보람이다.

정 원장은 "저희 같은 사람들을 알릴 수 있는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도 여러 회원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후배들에게 제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다. 소박한 꿈이 있다면 그 후배들이 '이런 선배, 선생님이 있었지'라고 기억해준다면 참 좋겠다"고 말했다.

곽지혜 기자 jihye.kwa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