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명 문화재 중 22명 전라도 명인ㆍ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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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뿌리내린 전라도의 발자취
25명 문화재 중 22명 전라도 명인ㆍ명창
<16> 한민족에 興 불어넣은 '전라도 소리'
명창들 1960년대 서울로
성우향ㆍ조상현ㆍ성창순
수많은 제자들 길러내
1964년 '무형문화재' 법 제정
쇠퇴하던 판소리 중흥 계기
명인ㆍ명창ㆍ이수자ㆍ전수자
80% 이상 호남 출신
  • 입력 : 2015. 11.27(금) 00:00
200여명의 제자를 키운 성우향.
판소리는 전라도가 그 본향(本鄕)이다. 유독 판소리만을 '남도소리'라고 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동편제ㆍ서편제로 대별되는 판소리의 전승과 대중화는 전라도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될 수 있었다.

이는 지난 1964년 문화재법이 제정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의 보유자로 지정된 명인ㆍ명창들의 면면을 따져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현재까지 중요무형문화제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25명 가운데 22명이 전라도 출신이고, 나머지 3명도 전라도 출신 스승들에게 전수를 받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현재 생존해 있는 판소리 다섯마당의 예능보유자 5명과 고수 2명은 모두 전라도 출신들이다.

판소리는 크게 2대 유파로 나뉜다. 흔히 동편제는 송흥록 법제를 표준으로 운봉ㆍ구례ㆍ순창 등지에서 전승된 판소리를 말하고 서편제는 박유전 법제를 표준으로 광주ㆍ나주ㆍ보성 등지에서 전승된 판소리를 일컫는다. (사)한국판소리보존회는 '동ㆍ서 유파의 성립 과정은 전라도 지방의 지리산 산맥 또는 섬진강 물줄기에 의해 지역적으로 구분되는 특정 지역에서 널리 유포되던 창제(唱制)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역적인 개념이 희박해지고 순연한 유파의 명칭으로 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판소리 발상지는 전라도이고 전라도를 기반으로 전승된 소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판소리가 전국적으로 전파되고 일반대중의 소리로 자리잡은 과정은 역시 전라도 사람들의 이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판소리 명창들이 서울로 상경하면서 급속히 보급됐다.

판소리가 활동무대를 서울이라는 중앙으로 옮겨가는 계기는 1902년도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서울에 협률사(協律社ㆍ원래는 판소리 명창들이 만든 단체를 일컫는데 이때는 이를 관장하는 단체 이름이 된다)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협률사에는 전국의 판소리 명창(名唱)ㆍ가기(歌妓)ㆍ무동(舞童) 등 17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협률사의 대표가 바로 나주 삼도면 출신의 명창 김창환이었다. 김창환이 협률사의 총책임자(도감)를 맡으면서 전라도의 판소리 명인명창들이 서울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 이전까지는 소리꾼들이 전라도라는 지역사회에서 활동하거나 뛰어난 명창들은 어전광대로 어전을 넘나들며 활동을 했다. 그러나 김창환이 대표가 되면서 전라도 명창들이 한양(서울)이라는 중앙무대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우리 음악의 보급에도 전라도 사람이 중심이었다.

순천 출신인 송만갑이 1933년 국악인들의 활동단체인 '조선성악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송만갑은 순천의 갑부 김종익으로부터 1만원을 후원받아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성악연구소는 전국 팔도를 순회하며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공연행사를 가졌다. 당시 공연때면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대거 모이는 광경을 목격한 일본제국주의는 결국 조선성악연구소를 강제 해산시킨다.

이같은 일제에 의한 문화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에서는 판소리를 애호하는 지역부호들의 초당을 중심으로 판소리가 전수됐다. 화순ㆍ담양ㆍ광주ㆍ나주 등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협률사(판소리 명창들이 모이는 곳)에 김창환의 제자인 조상선, 박동실 등을 판소리 선생으로 초빙, 많은 명인명창들을 양성했다.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우리 소리를 지켜왔던 것이다.

김세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는 "동ㆍ서편제 모두 1902년 이후 1945년 해방때까지 판소리의 모자리가 광주ㆍ전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판소리는 큰 시련기를 맞는다. 6ㆍ25을 맞아 판소리를 전수했던 조상선, 박동실 등이 월북하면서 철퇴를 맞게 된다. 여기에 외국으로부터 '가요'가 급속히 유입돼 전국 마을마다 '콩쿠르대회'가 열리게 된다. 이는 곧 국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1964년, 우리문화에 대한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인간문화재(이후 중요문형문화재로 개칭) 제도가 도입되면서 판소리는 재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그해 12월23일 판소리 분야에서 동초 김연수 등 6명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본격적인 전승활동이 전개된다. 이후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25명이 지정된다.

인간문화재 제도가 도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판소리 예능 보유자들이 본격적으로 서울로 진출, 왕성한 보급 및 전승활동을 전개한다. 상경한 명인명창들은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간다. 이 과정에 판소리 각 유파를 아울러 1973년 서울에 (사)한국판소리보존회가 설립되기도 한다.

인간문화재 도입 이후 가장 큰 결실은 우수한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대표적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인물은 성우향 명창이다. 성 명창은 이수자를 200여 명을 배출할 정도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다. 그래서 성우향ㆍ조상현ㆍ성창순 명창의 제자들이 서울에 활동하고 있는 판소리 명창의 7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세가 확장됐다. 성우향 명창의 제자 조성훈ㆍ조정임 명창, 조상현 명창의 제자 염경애ㆍ육미리(이상 순천), 신영희 명창의 제자 이주훈(목포), 박송희 명창의 제자 최수정(진도)이 있고, 수궁가에는 정흥민 선생의 손자인 정해성(국립국악원), 동초제에 양명희(순천ㆍ국립국악원) 명창 등 있다. 호남출신 40~50대의 기라성같은 명창들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며 전라도의 판소리 맥을 잇고 있다.

판소리 이수자ㆍ전수자의 80%가 호남출신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조동준 한국판소리보존회 상임이사는 "현재 수도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판소리 명창이나 이ㆍ전수자 가운데 80% 이상이 호남 출신이다"면서 "원로뿐만 아니라 중견명창들도 호남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판소리와 더불어 무용과 기악도 중앙무대로 진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매방(목포ㆍ작고)이다. 이매방은 스승인 박영구의 호남살풀이와 승무 등을 중앙무대에 전수하며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또 기악분야에 활동하고 있는 명인도 50% 이상이 호남출신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라도의 소리는 서울 등 수도권만이 아니라 전국의 주요도시에도 전파됐다.

부산에는 전라도 기악인들은 진출했다. 무안 출신인 강태홍이 부산에 정착, 제자를 양성하며 신명숙(경북 출신)에 의해 강태홍류 가야금산조가 전수되고 있다. 또 담양 출신인 김동표의 김동표류 대금산조도 부산에서 이어지고 있다.

대구에는 박록주 명창의 스승인 박기홍이 진출해 판소리가 일부 전승됐다. 대전은 상대적으로 전라도 명인ㆍ명창들의 진출이 없는 불모지였다. 그러나 근래들어 대전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고향임씨가 전수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성창순 명창의 제자인 정효영(나주 출신)씨가 판소리 연구소를 개설, 판소리 전수에 나서면서 점차 남도소리의 전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강덕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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