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협동조합이 일궈낸 ‘통후추 한 알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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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선진지 탐방
개발협동조합이 일궈낸 ‘통후추 한 알의 기적’
도시재생 전문가들의 선진지 탐방과 해법
영국 런던 해크니 자치구 달스턴
100년 무상임대 건물 한채로
80여개 사무실.상점 키워내
  • 입력 : 2018. 07.12(목) 21:00
  • yglee@jnilbo.com
해크니 개발협동조합이 버려진 주차장 부지였던 질레트 광장을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고 광장 주변에 지은 달튼 문화회관.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볼텍스 째즈클럽을 유치하면서 문화예술건물이 됐다.
서울은 강남과 강북의 지역격차가 뚜렷한데 반해 런던은 강동과 강서의 지역격차가 뚜렷하다. 런던의 동쪽지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건물에 저소득층이 들어와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을 점유하였고, 점차 외국 이주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이른바 못사는 동네로 자리매김하였다.

영국 BBC 인기 드라마였던 ‘동쪽 끝에 사는 사람들’ (원제목 : EastEnders)은 1983년 3월 첫 방송이 나간 이래로 2018년 7월 현재까지 35년간 5745회가 방송되고 있는 인기드라마이다. 런던 동쪽지역의 못사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애환을 다루었기 때문에 영국 국민들의 대중 드라마(우리나라로 따지면 전원일기의 도시판 정도로 볼 수 있음)로 자리잡았다.

런던의 33개 자치구 중 하나인 해크니(Hackney)자치구 달스턴(Dalston)지역은 런던의 동쪽지역 중에서도 마약과 강도 등 각종 범죄가 들끓는 대표적인 슬럼가였다. 영국 전체에서 가장 살기 나쁜 곳 1위, 강도사건 발생률 1위를 기록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런던 중심부와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이 있어서 외곽지역에 살던 중산층들이 1970~80년대에 이 지역으로 몰려와 부동산을 매입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원조 지역

이미 우리나라도 홍대, 가로수길, 경리단길 등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주택이나 상점의 임대료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영국 런던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현상이다.

귀족계급을 뜻하는 ‘젠트리(gentry)’라는 말에서 비롯된 이 현상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낙후된 지역이 고급화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에서는 급격한 임대료 및 부동산 가격의 상승으로 본래 거주하던 원주민이나 상점주인들이 쫓겨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외곽지역의 중산층들이 해크니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당연히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났다. 지역의 중소상점들이 몰려날 위기에 처하고 주거지도 고급화하면서 서민들도 비싼 임대료를 낼 수 없어 이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주거협동조합이다. 여러 협동조합들이 연합하여 ‘해크니 개발협동조합’(HCD: Hackney Cooperative Developments)를 만들었다.

그들은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구청은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방치된 3층짜리 건물을 ‘통후추 한 알’(중세시대 영주가 땅을 놀리지 않기 위해서 영세농민들에게 통후추 한 알을 받고 농지를 임대해준 것에서 유래한 용어)에 100년간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임대해 주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HCD는 낙후된 달스턴 지역을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개발협동조합 결성과 도시재생

HCD는 융자를 받기 위해서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 계획을 주 내용으로 한 사업 기획서를 작성하여 은행을 찾아가 융자를 받았다. 이 융자금으로 1층에 상가, 2층과 3층에는 사무실을 꾸며서 지역의 소상공인들과 예술가들에게 저렴한 임대료에 공간을 빌려주었다. 임대료 수익으로 주변의 저렴한 건물을 계속 사들여 개조 후 임대하는 방식으로 소유 부동산을 늘려나갔다.

지역이 깨끗해지자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HCD의 자산가치도 덩달아 올라갔다. 구청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건물 1채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달스턴 지역 내에 80여개의 사무실과 상점, 클럽, 작업실, 문화공간을 임대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HCD의 임원들은 무보수를 원칙으로 일하고 수익은 지역사회로 전액 환원하는 원칙을 지킨다.



지역문제 해결 위한 운영원칙

자치구로부터 거의 무상으로 제공받은 건물을 초기자본으로 하여 HCD는 특히 3가지 사업에 주력하였는데 첫째는 소상공인의 창업을 위한 자문과 서비스, 둘째는 저렴한 사업공간 제공, 셋째는 문화 및 예술 프로그램 진흥사업이다.

소상공인 창업자문은 주로 여성이나 소수인종 기업가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주로 서점, 뷰티샵, 화장품 상점, 네일샵, 치킨샵, 음반가게, 이발소, 양복점 등 영세업종이 대부분이다. 저렴한 사업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임대료는 시세의 70% 수준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입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HCD의 심사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명확한 비즈니스 아이템과 사업계획서를 제출받아 엄격하게 심사한다. 임대료가 저렴하기 때문에 경쟁률이 12대 1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사회적 기업이나 자선단체, 문화예술단체, 소수민족이 참여하는 기업, 여성 사업가, 장애인 사업가 등 사회적 가치나 커뮤니티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사업자를 우선적으로 선정한다.

대표적인 문화 및 예술 프로그램 진흥사업으로는 버려진 주차장 부지였던 질레트 광장(Gillett Square)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사업을 추진했다. 광장 주변에 달튼 문화회관(Dalton Culture House)을 건립하고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볼텍스(Vortex)째즈클럽을 유치하여 문화예술 기능의 건물로 탈바꿈시켰다. 광장에서는 연중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개최하여 다양한 인종이 어울리는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양한 민관기구와의 협업

질레트 광장 재생사업에는 다양한 민관기구들이 동참했다. 런던개발공사, 런던교통청, 해크니 구의회, 호킨스브라운(Hawkins Brown) 건축설계사무소, 그라운드워크(Groundwork UK) 자선단체 연합, 보르텍스 째즈클럽 등 다양한 민간 및 공공기관이 1999년에 질레트 광장개발 협력기구를 결성하여 사업을 추진하였고 2006년에 공사를 마쳤다.

호킨스브라운 설계사무소에서 광장설계 및 문화회관 설계를 저렴한 비용에 맡아 주었고, 런던개발공사와 런던교통청은 대중교통 이용체계 개선을, 해크니 구의회는 신속한 행정처리를 도와주었다. 째즈클럽은 다양한 문화예술행사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다.

광장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기획과 행사추진에는 다양한 지역시민단체들이 참여한다. 그들의 자발적 참여는 외국인 구성비율이 50%를 넘는 이 지역의 인종간 유대관계를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질레트 광장에 들어선 고정식 소규모 점포는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해서 광장 활성화에도 기여하지만 소규모 창업을 통한 저소득층의 경제적 안정화에도 도움을 준다.



주민주도형 도시재생 성공 조건

이제 우리나라의 도시재생도 단순한 주민참여를 넘어서 주민주도형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역량강화와 탄탄한 수익창출이 전제되지 않은 주민주도형은 무늬만 주민주도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런던 해크니 지역의 도시재생 사례에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도출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주민들이 중심이 된 일종의 공익적 개발회사로 설립된 해크니 개발협동조합이 자치구의 지원을 받아 초기자본을 확보한 후 이를 토대로 은행융자를 받아 지속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도시재생사업이 완료되거나 마무리 단계에 있는 지역에서 CRC라는 민간주도의 도시재생회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대개 커피숍 운영이나 청년주택 등 제한적인 수익모델을 가지고 운영하기 때문에 수익구조가 대단히 취약하다.

해크니 지역처럼 개발협동조합이 주변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임대 및 판매를 할 수 있어야 탄탄한 수익과 확대재생산 구조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재생 지역의 부동산 시장을 과열시키는 악영향을 방지하는 대책도 동시에 필요하다.

둘째로는 개발협동조합의 초기출자를 공공이 담당하여 일종의 종잣돈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이다. 통후추 한 알에 100년 임대라는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해크니의 성공사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사업계획서에 입각한 은행의 장기 융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정면적 이상의 건물 신축시 전체 공간의 일정 비율을 저렴하게 임대하도록 하는 정책, 민간이 도시재생 관련 투자를 할 경우 세금감면 혜택 등 민관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꼭 필요하다.



류중석 중앙대 도시공학과 교수
중앙대학교 교학부 총장
서울시 동작구 상도4동 도시재생 총괄계획가한국도시설계학회 수석 부회장(역임)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이사장(역임)


도시재생 전문가들의 선진지 탐방과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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