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백룡산 자락, 동계와 향약 꽃피운 넉넉한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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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백룡산 자락, 동계와 향약 꽃피운 넉넉한 고장
●영암 영보마을
마을공동체 중심, 보물 지정된 ‘영보정’
예문관직제학 최덕지의 흔적 남아있어
영산강 물줄기와 월출산 전망으로 풍요
삼성당고택, 남도 부농가옥의 본보기로
매년 5월5일 ‘풍향제’ 열리는 전통 남아
  • 입력 : 2025. 05.01(목) 15:54
  •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에서 본 영보마을 전경. 마을이 백룡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땅이 넓고, 집은 크다. 정자를 품은 땅이 1300㎡ 남짓, 그 안의 건축물이 엔간한 집터만 하다. 단층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품 있다. 널빤지를 끼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에 방을 한 칸 뒀다. 기둥과 도리, 처마가 돋보인다. 나무 형태를 그대로 살린 들보도 자연스럽다. 지붕 네 귀에 세운 활주도 유려하다. 현판 글씨에선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진다.

정자 앞에는 노거수 몇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다. 노거수와 어우러진 연못이 있고, 연못가엔 연분홍 철쭉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쪽에 비석도 여러 기 보인다. 주변은 마을이다. 마을에서 이어지는 너른 들녘 너머로 기암괴석의 월출산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노거수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영보정. 영보마을 공동체의 상징이다.
영보정(永保亭)이다. 풍경만으로도 권위가 묻어나는 정자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영보정은 예부터 동계(洞契)를 하고, 마을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집행한 장소였다. 마을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일제강점 땐 청소년에 항일 구국정신을 가르친 영보학원으로 활용됐다. 1931년 형제봉 만세운동도 영보학원 졸업생이 주축이었다고 한다.

형제봉 만세사건은 이 마을 사람 100여명이 뒷산 형제봉에서 소작권 이전 반대를 결의하고, 일본인이 강제로 빼앗은 논밭의 반환을 주장하며 항일시위를 벌인 일을 가리킨다. 국가보훈부는 최동림(1909~1948) 등 만세운동 참가자 40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영보정은 신교육과 애국정신을 드높인 배움터인 셈이다.

영보정은 여말선초의 문신 전주 최씨 최덕지(1384~1455)가 지었다. 연촌(烟村), 존양(存養)을 호로 지닌 최덕지는 돈과 곡식의 출납, 회계 등을 맡은 삼사(三司)의 관직을 지내고 남원부사를 끝으로 영암으로 내려왔다. 영암은 그의 처가 동네였다. 최덕지가 사위 신후경과 함께 영보정을 지었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께 그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최덕지의 영정. 눈매와 손, 옷주름까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최덕지와 관련된 일화가 흥미롭다. 1450년 문종이 낙향한 최덕지를 예문관직제학에 임명했다. 예문관직제학은 예문관의 예악형정(禮樂刑政)을 기록하는 사관이다. 정3품 벼슬이지만, 최덕지는 이듬해 스스로 물러난다.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이 송별시를 전하며 예를 표했다.

최덕지의 나이 68살 때였다.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 4년 전의 일이다. 이후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등은 사육신이 됐다. 만약 그가 관직에 계속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이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안 선비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최덕지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1455년 생을 마감했다.

최덕지의 서재 존양루. 안평대군이 현판을 썼다고 전한다.
영보정 옆 존양루(存養樓)에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류성원, 이개, 하위지, 서거정, 김종서 등 28명의 송별시가 최덕지의 시문과 함께 걸려 있다. 존양루는 최덕지의 서재다. 안평대군이 현판을 썼다는 존양루는 최덕지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1713년 숙종은 최덕지의 영정(影幀)과 유지 초본(油紙 草本)을 내려준다. 영정은 눈초리와 손, 옷주름 등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모자는 여말선초의 발립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갈색, 눈매는 작지만 생기가 넘친다. 유지 초본은 기름종이에 그린 영정의 밑그림을 일컫는다. 전신을 그린 데다, 당시 초상화 화풍을 연구하는 자료로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됐다.

풍경만으로도 권위가 묻어나는 영보정. 예부터 동계(洞契)를 하고, 마을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집행한 장소였다. 마을공동체의 중심이다.
영보정이 있는 곳이 영보마을이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1구에 속한다. 영보1구는 내동, 서당동, 은행정마을을 아우른다. 내동(內洞)은 영보정을 품은 가운데 동네다. 서당동(書堂洞)은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은행정(銀杏亭)은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이름 붙었다.

백룡산 형제봉 자락에 둥지를 튼 영보마을의 살림살이는 넉넉했다. 영산강이 농업용수를 충분히 대준 덕분에 들이 기름졌다.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월출산 전망도 압권이다. 자연스레 양반이 모여 살았다. ‘나, 영보마을 사람이야!’라는 말엔 자긍심이 담겼다. 영보마을에 사는 것만으로도 목에 힘이 들어가던 시절의 얘기다.

그만큼 영보마을은 남달랐다.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내면서 동계와 향약을 꽃피웠다. 영보정 옆에 동계와 향약 모임 장소로 쓰인 대동계사가 있다. 지금도 전주 최씨, 거창 신씨, 남평 문씨가 많이 살고 있다. 마을에 전통가옥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당고택. 남도 부농가옥의 본보기다. 안채, 헛간채, 문간채, 사랑채가 네모 형태로 배치돼 있다.
최덕지의 외손자 신산정이 살던 삼성당고택은 남도 부농가옥의 본보기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안채, 헛간채, 문간채, 사랑채가 사각으로 둘러싸고 있다. 문간채 상량문에 1848년 기록이 남아있다.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짜임새가 있다. 집 주변 대숲과 동백숲도 아름답다. 마을의 중심이고, 향약의 집행 장소였다. 영보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최성호가옥’으로 불린다.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마을에 전주 최씨 재실인 합경당(合敬堂)과 영당(影堂)도 있다. 합경당엔 각종 문집과 기록물이 보관돼 있다. 영당엔 최덕지의 영정과 유지 초본을 모시고 있다. 합경당 옆 판각(板閣)엔 ‘연촌유사’, ‘산당집’ 등 목판본을 보관하고 있다.

해마다 5월5일 열리는 풍향제(豊鄕祭)도 마을의 오랜 전통이다. 풍향제는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출향인들이 고향을 찾는 날로, 즐거운 잔치마당을 펼친다. 백룡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마을 뒤 대숲 산책은 덤이다.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전통마을의 향기와 풍경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영보마을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