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5 부정선거 규탄" 광주 葬送시위 4ㆍ19 첫 유혈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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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야기
"3ㆍ15 부정선거 규탄" 광주 葬送시위 4ㆍ19 첫 유혈사태였다
(16) 광주고에서 시작된 광주 4ㆍ19 혁명
  • 입력 : 2013. 04.19(금) 00:00
4ㆍ19 당시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광주고 학생들. 이들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에 진출해 전남여고와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돌며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1960년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광주의 민주당 전남도당은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부정선거 규탄 거리 시위'를 하자는데 뜻이 모아진다. 그래서 제작된 플래카드가 '곡(哭) 민주주의'였고 훗날 '민주주의 장송(葬送) 시위(데모)'로 불리게 된 이유가 된다.

<그림2중앙>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전국 최초의 3ㆍ15 부정 선거 규탄 대회였다. 당시 민주당 중앙 당사에서는 4시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이보다 앞선 3시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한 후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금남로의 광주 시위는 이보다 앞선 12시50분께였다(동아일보는 당시 시간을 12시45분께로 옛 전남일보는 12시50분께로 쓰고 있다). 이 날 광주 시위는 당시의 동아일보와 전남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됐지만 15일 7시께에 일어난 마산의 2차 시위 당시 경찰의 발포로 시위 학생들의 피해가 속출한 마산항쟁에 곧 묻히고 만다.

1000여 군중이 합세한 광주의 3ㆍ15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3ㆍ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였고,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후두부를 맞아 금남로에 흘린 조계현의 피는 4ㆍ19 혁명의 첫 피였다.

19일의 광주 시위는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된다. 그 중심에 이홍길(광주고 3년)이 있었다. 18일, 이홍길은 시내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벽보판에서 고대생의 데모를 알리는 호외를 접한다. 그리고는 저녁 무렵 그의 계림동 하숙집에 홍갑귀(기), 김신담, 김병옥(욱) 등 10여명이 모여 19일 시위를 모의한다. 여기에 조선대 부속고등학생인 전만길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19일 1교시 난타의 종소리를 신호로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하고, 종을 칠 타종수로 몸집이 큰 신강식과 조병수를 정한다. 그리고 19일 목이 터져라 외칠 구호를 만든다. 그날 밤에 만든 구호는 '3ㆍ15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 등이었다.
<그림3중앙>

19일 시위를 결의했던 학생들이 등교하자 낌새를 눈치 챈 교장은 간부들과 모의 주동 학생을 불러 자중하고 대학 입시에 전념하라고 훈계한다. 이홍길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은 협의 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 후 시간을 얻어 회의를 진행한 끝에 시위를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이 때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4ㆍ19와 관련된 전국적인 현상으로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타종(打鐘)이 있다. 시위를 계획하면서 신강식, 조병수를 타종자로 지목해놓은 것만 보아도 그 상징적 의미가 짐작된다. 타종이 곧 시위의 상징임은 서울대 선언문의 한 구절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임을 자랑한다" 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 약속한대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고 학생 대표들도 잠긴 교장실의 문을 박차고 나온다. 1960년 4월19일, 10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집결했지만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정문이 막히자 일부 학생들은 후문을 통해 거리로 박차고 나간다.

후문을 통해 거리로 진출한 학생은 100여 명, 계림동 앞길로 나오자 경찰이 곤봉으로 후려친다. 경찰의 곤봉 세례에 광주고생들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의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에 진출,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한다. 이에 광주여고생들은 판자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시위대에 합류한다.

오후 2시, 금남로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물결을 이룬다. 일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 학생 의거 선배를 따르자"고 외치며 시내 곳곳 파출소와 소방서를 파괴하며 경찰과 충돌한다.

그리고 광주 4ㆍ19혁명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19일 오후 8시경, 광주 학동 파출소 앞에서 시위하던 강정섭(당시 17세)이 경찰이 쏜 총알을 맞고 좌우상박부 관통상으로 숨진다. 그의 신원은 10일이 지난 4월 29일이 되어서야 확인된다.

강정섭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지만 발포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방치되다 1961년 2월, 특별검찰부에 의해 학동파출소 김남중 주임, 이용수ㆍ김해수 순경 등이 공소됨으로 그 진상이 드러난다. 공소장에 의하면 오후 8시경 파출소로 밀려오는 시위대 1000명을 향해 김남중은 칼빈 실탄 6발을, 이용수와 김해수는 각각 3발과 4발을 발사한다. 그리고 그 중 한발이 파출소에서 70여 m 떨어진 곳에 있던 강정섭에게 명중된다. 시위대들에 의해 전대 병원에 옮겨졌지만, 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 1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 경찰서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이에 맞서고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과의 밀고 당기기를 수차례, 9시25분께 40명의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탕, 탕, 탕,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9시40분이었다. 여기저기서 시위대가 쓰러졌다. 경찰은 금남로로 후퇴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와 사격을 해댔다. 순식간에 이귀봉(당시 18세)을 비롯해 7명이 금남로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한다. 20일 오전, 농고생들이 합세한 전남대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의 공격으로 해산된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시위는 이후 목포 여수순천 등 전남 일대로 퍼져나간다.

광주고등학교 정문에 '광주 4ㆍ19 민주 혁명 발상지' 표지판과 교정 안쪽에 '광주 4월 혁명 발상 기념탑' 및 '4ㆍ19 혁명 그날' 시비 등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고, 계림동(구 시청 옆)에는 '4ㆍ19혁명 기념관'이 건립돼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4ㆍ19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발상지인 광주고등학교 앞길(중앙초교~대인시장~광주고~서방 4거리)을 '4ㆍ19로'로 지정했고 버스 419번이 이 구간을 운행하도록 하고 있다.

노성태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ㆍ국제고 교사

광주공원 추모비, 시위 장면ㆍ조지훈 詩 새겨

<그림1중앙>
1962년 4월19일 광주공원에 '광주 4ㆍ19 의거 희생영령 추모비'가 세워진다. 4ㆍ19 당시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4ㆍ19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앙에 4ㆍ19를 양각하고 우측에는 4ㆍ19 당시의 시위 모습을, 좌측에는 조지훈의 시를 새겼다.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 가슴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왔더이다.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의 피거름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 날 4월 19일을.


전국 최초로 3ㆍ15 부정 선거의 무효를 외쳤던 광주 3ㆍ15 장송 시위는 진주, 마산을 돌아 다시 광주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 4ㆍ19혁명으로 타오르게 된다. 광주 4ㆍ19 혁명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있게 했던 한국 민주 지형의 토대였고 허리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이 흘린 피는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민주, 인권의 광주 정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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