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상경… 가난 맞서 굳세었던 산동네 억척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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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뿌리내린 전라도의 발자취
배고픈 상경… 가난 맞서 굳세었던 산동네 억척삶
[전국에 뿌리내린 전라도의 발자취] <5> 판자촌에서 쌓아 올린 '서울의 꿈'
20만~23만 관악구 전체인구 52만명 중 전라도 출신 추정치
서울 속 호남
관악ㆍ구로ㆍ금천ㆍ강서구
  • 입력 : 2015. 08.17(월) 00:00
1960년대 말부터 많은 호남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한 서울시 관악구 삼성동 일대 전경. 이곳으로 이주한 전라도 사람들 대부분은 화려한 생활터전을 일구지는 못했지만 끈끈한 고향의 정을 나누며 숱한 질곡의 세월을 헤쳐왔다. 아래 사진은 관악구 라향동지회가 정월대보름 행사때 기념촬영을 했다.
"1960년말부터 서울시내 중심가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서울시의 이주정책에 따라 산지를 깎거나 하천부지를 이용해 만든 현재의 관악구에 위치한 봉천동, 신림동 이주촌으로 이동하게 시작했지요. 이주자 가운데는 시골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특히 전라도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지요. 이후 고향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서 함께 살기 위해 이곳에 터전을 잡으려는 전라도 사람들이 더해졌지요.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가족 생계를 책임지며 살다보니 지금까지 이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현재 관악구에 전라도 사람들이 대략 50% 가량 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 이지요."

지난 1971년 고교 졸업 직후 고향 고흥에서 상경한 뒤 이곳에 정착해 44년 동안 살고 있는 박동석(67ㆍ전 서울 관악구의회 의장)씨는 관악구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향우들은 서울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 강서구 등을 들고 있다. 이곳은 시골 출신 전라도 사람들이 서울 정착 초기에 값싼 삶터를 찾아 이곳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관악구에 호남 출신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이유를 알아보기 지난 13일과 14일 관악구에서 향우들을 만났다.

관악구가 '서울 속 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남 출신이 많이 사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산업화 초기 수출 주도 공업화를 위해서 충분한 공장노동자들이 필요했다. 특히 경공업이 역점적으로 추진되면서 저임금의 많은 노동인력이 필요했다. 저임금의 산업노동자들을 공장에 공급하기 위해 도입된 정책이 농산물에 대한 저가정책이었다. 이는 곧 농업의 붕괴를 의미했다. 농촌에 살던 농업노동자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되자 도시로 떠나 공장근로자가 됐다. 이 여파로 나타난 것이 '이농(離農)현상'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전라도뿐만이 아니었다. 공장지대가 많았던 영남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농삿일이 대부분의 생산수단이었던 전라도는 그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서울에 상경해 잠잘 수 있었던 곳은 서울 중심가 인근 판자촌이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했던 정부가 선택한 것이 바로 판자촌 사람들의 이주정책이었다. 1967년 청계천 정비공사(청계천 주변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 철거), 용산뚝방촌 정비사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현재의 성남시(당시 경기도 광주군)를 비롯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 지역으로 이주했다.

값싼 산지를 깎아 이주촌을 조성해 1가구당 8평씩에 분할, 천막을 치고 살게 했다. 이것도 부족해 하천부지를 집터로 제공, 이곳에 무허가 집을 짓고 살도록 했다. 국가나 서울시 땅에 무허가 집만 짓고 산 것이다.

반면, 구로공단 등 공장지대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은 공장과 가까운 현재의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에 터전을 잡고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 지역에 전라도 사람들만 이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삿일로는 도저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던 전라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것이 전라도 사람들이 관악구에 살고 있는 이유다.

현재 관악구 전체 인구 52만여 명 가운데 전라도 사람들이 20만~23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35~50% 정도라고 추측되고 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척박한 정착촌으로 이주해야 했던 전라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동향의 이웃이었다. 향우들은 마을단위 소규모 모임체를 구성하고 서로 의지하며 상부상조했다. 관악구지역 소규모 모임체들이 어느 지역보다 강한 응집력을 가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동(洞)에 최대 7개의 모임체가 활동하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관악구 내 21개 동에 대략 100여 개 정도의 소규모 향우모임체가 있는 것으로 향우회 관계자는 추산하고 있다. 경조사를 함께 하며 가족보다 더 강한 끈끈한 정을 주고 받았던 이들은 호칭도 대부분 형님ㆍ동생, 또는 형수님ㆍ제수씨다. 옛 시골 동네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이웃 사촌이었던 것이다.

관악구 전체를 대변하는 호남향우회가 조직되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2008년. 서울시의회 의원인 신언근(57ㆍ고흥출신ㆍ재선의원)씨를 비롯한 젊은 향우들이 중심이 돼 조직 만들기에 나서 결실을 맺은 것. 본격적인 관악구 내 전체 호남향우회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조직을 갖추게 됐다. 회장의 유고 등으로 조직이원화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최근 관악구향우회는 조직을 재건, 오는 9월4일 김병욱(강남고려병원장) 회장 출범식을 앞두고 있다.

관악구 지역에 살면서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성공한 호남 인물들도 눈에 띈다. 한광옥 대통령 소속 대통합위원장이 이곳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봉천동에서 살고 있고, 민선초대 관악구청장을 지낸 진진형 전 구청장, 관악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희철 전 의원, 유종필 현 관악구청장, 재선의 신언근 서울시의회 의원 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병원장으로 성공한 인물은 관악구향우회장에 추대된 김병욱 강남고려병원 원장, 김철수 양지병원 이사장 등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악구도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봉천1~11동과 신림1~12동으로 부르던 동이름을 세련되고 새로운 이미지를 입힌 삼성동, 대학동, 난향동 등으로 바꾸었다. 또 뉴타운 개발 등의 영향으로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고 있다.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개발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전라도 출신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이유는 정치권의 무관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이정희(남원 출신ㆍ관악구향우회 사무총장) 삼화실업 회장은 "정치권이 관악구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선거때면 표만 달라고 한다. 선거때만 되면 '호남이 뭉쳐야 한다' '약무호남…' 하지만 끝나고 나면 나몰라라다. 획기적인 개발대안이 필요한 곳이 관악구다는 점을 정치권이 특히 인식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관악구 전라도 향우들도 이제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나이든 향우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고 향우2세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관악산 자락에 뿌리내렸던 호남향우들의 자취가 사라지는 것도 머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강덕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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