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꿈은 하나였다 "오로지 조국 해방"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대륙을 울린 항일전사들
이들 꿈은 하나였다 "오로지 조국 해방"
광복70년 대기획 - 3부 대륙을 울린 항일전사들 <9ㆍ끝> 그들을 기억하며…
항일투쟁 광복군ㆍ조선의용군
해방조국 분단돼 역사 평가 갈려
올해는 광복 70년 분단 70년
더 늦기전 바른 재평가 이뤄져야
기억해야할 또 한명은 정율성
中 전승절 그의 노래 울려퍼져
  • 입력 : 2015. 08.31(월) 00:00
광복군 1940년 9월 가릉에서 열린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때 찍은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1930년대 중국과 서울을 시ㆍ공간으로 한 독립운동 영화 '암살'이 관객수 1250만명을 기록중이다. 배우들의 열연과 빠른 전개, 몰랐던 역사적 사실은 항일과 친일 청산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쉽게 관객에게 다가서게 했다. 약산 김원봉, 한국독립군, 신흥무관학교, 반민특위 등 낯선 항일역사는 오히려 관객들의 지식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암살' 덕분에 약산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 바람이 일었으며, 중도 좌파진영 독립운동에 대한 진지하고 우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퍼져나갔다. 반민특위와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미제는 오늘의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70년 전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과거가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먹먹함을 던져주고 있다.

>>>

암살의 시ㆍ공간 무대였던 1930년대 중국 대륙은 항일 운동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편년이다. 만주의 유격부대 대신에 각이 선 항일군대가 등장했고, 무장세력을 지도할 항일 정치조직이 건설됐다. 신흥무관학교(1911)-의열단(1919) 출신들은 1932년 난징에서 '조선민족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어 항일군대의 엘리트 육성에 나선다. 이 간부학교 교장은 신흥학교와 의열단을 거쳐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약산 김원봉이었다. 그는 1935년 좌파 중도 계열의 5당을 하나로 묶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한다. 현 난징대학 예당이 민족혁명당 창당지이다.

임시정부는 상해 시기(1919~32년)에는 지역적 한계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피난기(1932~39년)에는 일본군의 점령지를 피해 명맥을 유지하느라 뚜렷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다만, 김구 중심의 한인애국단은 강고한 의열투쟁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투쟁은 좌ㆍ우파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한몫을 했다.

약산 김원봉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7월7일)하자 다시 중도좌파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을 발족(1937년 12월)한데 이어 1938년 10월10일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창립한 최초의 한인 무장군대였다. 의용대는 구이린과 충칭 등지에서 활발한 대적 활동을 벌여 46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차량 120대를 파괴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그러나 장강을 따라 국민당 관할지역에서 선전, 정보활동 중심의 운영에 불만을 갖는 세력이 생겼다.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하고 있는 화북지역으로 올라가야 한다(동북노선)는 급진파들은 1938년 말 1차 이탈에 이어 1941년 1월 2차 북상에 나섰다. 사실상 의용대의 주력이 화북으로 이동했다. 북상한 조선의용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1941년 1월10일)에 이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1941년 7월7일)를 결성했다. 타이항산맥의 의용대원들은 호가장 전투(1941년 12월12일), 십자령전투(1942년5월) 등 빛나는 성과를 거두면서 불멸의 군대로 빛을 발한다. 특히 일본의 소탕전(참빗작전) 당시 포위당한 팔로군 총부 펑더화이, 주더, 덩샤오핑을 구출해낸 십자령 전투는 중국 허베이성 한단시 교과서에 실릴 정도다.

김구 주석 체제를 구축한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17일 한국광복군을 창립한다. 이어 1942년 잔류한 조선의용대 본부병력(김원봉 주도)과 통합을 시도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했다. 광복군은 시안 외곽 두취진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특히 종남산 일대에서는 미군 특수부대와 합동 군사훈련(1945년 5월)을 통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충칭과 시안을 중심으로 정치체와 군사조직이 움직였다.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세력은 1942년 7월 들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또 11월에는 군사학교인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웠다.

>>>

중국 대륙의 한인 무장세력은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조선독립동맹ㆍ팔로군 편제로 들어간 조선의용군 등 2개가 존재한 셈이다. 대륙에서 활동했던 2개의 항일군대는 1945년 해방된 조국, 분단된 조국에서 다시 2개 나라의 군대가 돼야만 했다. 그리고선 3년 동안 처절하게 동족 전쟁을 벌였다. 전쟁 후 남ㆍ북은 각기 항일역사에서 2개의 군대 중 하나만을 기억했다. 최근들어 우리 교과서에 조선의용군 활동이 기술되고 있지만 여전히 임정과 광복군 중심 서술이다. 북한은 아예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연안파)은 사라지고 김일성 항일유격대만 남았다.

광복 70년ㆍ분단 70년, 광복의 달 마지막날에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중국 대륙에 항일무장 군대가 있었음을, 그이름은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그리고 광복군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한다. 오는 9월3일 중국 천안문광장에서 열릴 항일 전승절에 울려퍼질 군가의 작곡자가 바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군 출신인 광주 태생 정율성이라는 사실을….

베이징=이건상 편집국장
대륙을 울린 항일전사들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