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로빈슨 크루소… 한국엔 문순득, 일본엔 존 만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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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英 로빈슨 크루소… 한국엔 문순득, 일본엔 존 만지로
韓ㆍ日 '로빈슨 크루소'
풍랑 사고 만나 떠돌다 귀국
日, 경험담 활용 근대화 성공
조선, 쇄국정책탓 철저 외면
만지로, 각종 기술ㆍ문물 접목
日-美조약 사절단 참여 '공헌'
日 아시아 강대국 성장 디딤돌

문순득 얘기 '표해록'으로 펴내
개화사상 필요성 못느껴 방치
개항 뒤 30여년만에 합병 치욕
  • 입력 : 2015. 09.04(금) 00:00
신안군 우이도에 있는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영국의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유명하다. 이 책은 실제로 스코틀랜드 한 선원이 무인도에서 4년 반 동안 살았던 이야기에 저자가 상상력을 더해 썼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지혜와 용기를 주는 책이다.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200년 전 신안 우이도 출신 어부 문순득이다. 문순득은 1801년 12월 일행 6명과 흑산도 부근 홍어를 사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문 일행은 오끼나와, 필리핀, 마카오, 북경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극적으로 돌아온다.

그는 오끼나와에서 8개월, 필리핀 8개월 등 가장 긴 시간, 가장 먼 거리, 가장 많은 나라를 돌아보며 선진 문물을 경험한 사람이 됐다. 마침 우이도에 유배 온 정약전에 의해서 문순득의 경험이 '표해록'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져졌다. 각 나라의 풍습, 의복, 집, 토산, 말 등 오끼나와와 중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영국에 로빈슨크루소, 조선에 문순득이 있다면 일본에는 존 만지로라는 어부가 있다. 둘 다 풍랑을 만난 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귀국했지만 이들을 대하는 일본과 조선의 대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본은 존 만지로의 의견을 수용해 개방정책을 쓴 반면 조선은 단순한 어부의 표류 정도로 취급하는 데 그쳤다.


●풍랑만나 美전전… 10년만에 귀국

존 만지로는 1827년(에도시대)에 일본 고치현 나카하마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1841년 14살 때 동료 어부 4명과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 당하고 만다.

닷새 후 운좋게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토리시마 라는 무인도에 도착한다. 물고기와 열매를 따먹으면서 143일간 버틴 끝에 지나가는 큰 배를 만난다.

구조해 준 배는 미국 고래잡이 배인 존하울랜도호였다. 선장(Whitfleld)은 그들에게 일본으로 데려줄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너희 나라 일본국이 쇄국 정책을 쓰기 때문에 지금 가면 우리가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너희들을 데려다줄 수가 없단다."

이들은 결국 배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조사를 받은 뒤 거주허가를 받았다. 존 만지로는 일행과 달리 포경선에 남았다. 다시 태평양에 나가 5년 동안 고래를 잡았다. 총명한 소년 만지로는 선장과 선원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선원들에게 일본의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을 들으며 그때부터 개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림1중앙>

●선장 배려에 공부 '日유학 1호' 탄생

이 배는 1844년 5년 만에 하와이 어부들과 헤어진 뒤 모항인 미국 뉴 베드포드로 돌아왔다. 선장은 그를 자신의 집인 캐나다 벤쿠버와 가까운 미국 국경근처 페어헤븐으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존 만지로는 미국의 발달된 모습에 경악했다. 선장의 소개로 학교에 입학해 영어, 수학, 측량술, 항해술, 조선기술 등을 공부했다. 일본인 유학 1호가 탄생한 순간이다.

그는 공부 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배우며 민주주의를 터득했다. 엄격한 신분사회이던 일본에서는 감히 배울수 없던 것들이다. 일본을 떠난 지 10년 만에 귀국을 위해 자금을 모았다.

골드러시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금광채굴에 뛰어 들었다. 이 때 번 자금으로 배를 한척 샀다. 배 이름을 어드밴처호로 명명했다.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러 옛 동료들과 재회한 뒤 1851년 10년 만에 귀국했다.



●美-日개항 협상때 통역 담당

25세 청년이 돼 귀국해 보니 일본의 상황도 크게 변해 있었다. 서구 열강이 일본을 개항 시키기 위해 압력을 넣고 있었다. 만지로 일행은 카고시마와 나가사키에서 2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서 구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2년 뒤 만지로는 고향인 토사에 도착해 12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한다. 2년간 만지로 조사를 담당했던 카와타 쇼류는 만지로의 표류 당시 상황과 미국에서 유학, 귀국까지 과정을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출간했다. '표손기략전'이다. 1938년 일본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에는 '만지로 표류기'를 출판해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만지로는 1853년 미국 패리 제독이 개항을 강요하고 있을 때 미국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을 찾았다. 그때 만지로가 막부에 초빙돼 하타모토의 관직을 재수받고 통역과 번역을 담당했다. 교이쿠칸 대학 교수로 임명되지만 사직한다. 미천한 신분을 지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풍조가 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막부 말기 수많은 정치인과 지사,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본 근대화와 개방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일등 공신이 된다.



●알파벳 ABC노래 첫 소개

만지로는 미국의 조선 기술을 이용해 현대 해군을 만들려는 정책에 힘을 보탰다. 쇄국정책 이후 일본의 첫번째 외국 스타일 군함인 쇼헤이 마루 구축에 기여했다. 통역과 번역을 하면서 33세에 1860년 일ㆍ미수호통상조약 비준서교환을 위해 사절단으로 막부선 간린마루를 타고 미국으로 간다.

가츠 가이슈 선장은 심한 배멀미 탓에 만지로가 선장대리로 총괄했다. 미국에 가서 은인인 선장과 재회 했으며 갖고 있던 일본도를 선물했다(미국도서관에 기증됐으나 도난당함). 귀국 후에는 도쿄 대학 전신인 가이세학교 교수가 된다. 정치권 러브콜을 받았지만 평생 교육자로서 강연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영어 회화서인 '일미대화첩경' '보디치 항해술서' 등 기술서적을 번역했다.

조선의 지휘, 강연, 통역, 선박의 매매 등 다양한 업무에 정열적으로 참여했다. 알파벳 노래인 'ABC노래'를 일본에 처음 소개한 인물도 만지로다.

그는 근대화로 가던 당시 일본 정치인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출세한 뒤 자만하지 않고 서구에서 배운데로 교육과 봉사와 빈민구제로 일생을 보냈다.

막부 말기 풍운아인 사카모토 료마도 만지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71세를 일기로 사망, 묘는 도쿄 도 도시마 구 미나미이케부쿠로에 있는 조시가야영원에 안치돼 있다.

●조선, 문순득 경험 활용 못해

무대작품으로 '존 만지로의 꿈'공연은 1974년 6월, TV드라마 '료마가 간다(NHK대하 드라마ㆍ1968년), 아츠히메 (NHK대하 드라마ㆍ2008년). 료마전(NHK대하 드라마ㆍ2010년) 등이 있다.

만지로에게 닥친 운명과 경험이 국가와 개인과 사회의 운명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유사한 체험을 했을지라도 그 사회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조선 어부 문순득의 경험과 기록이 당시 조선 사회에 상당한 파급 효과를 낳았지만 반상의 벽이 워낙 높다보니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만지로의 10년동안 겪은 구미 열강의 경험과 학문을 활용해 마침내 1853년 쇄국정책을 해제한다. 조국과 만지로 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똑같이 해난 사고를 당해 장기표류 한 뒤 다가온 두 사람의 운명은 얄궂게도 천양지차다.

조선인들이 당시 얼마나 국제상황에 무뎠는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일본은 1853년 개항 했으며 조선은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뒤 강제개항 됐다. 이후 몇년간 허송 세월만 보내다가 일본에 합병되고 만다.

개항 이후 조선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1895년 명성황후 살해 등 대내외적으로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1853년 개항한 일본은 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다. 그 뒤 판적봉환, 폐번치현, 폐도령과 질록처분 등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기득권층인 무사들이 몰락한다. 1885년 내각제, 1889년 메이지 헌법 공포 등 개항 37년 만에 나라를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일본 역시 개항 이후에 40년 동안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막부파와 존왕양이파의 갈등으로 암살이 빈번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항한 뒤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조선과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우물안 개구리' 같은 조선에는 개화 사상의 필요성을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고 알려줄 지도자가 없었다. 대원군이나 고종이 문순득, 만지로, 일본 개화 일등공신인 후쿠자와 유키치 처럼 유럽과 미국, 중국을 다녀왔더라면 조선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격언처럼 100번 들어도 한 번 본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이들이 목격한 서양 문명은 놀라웠다. 쇄국론에서 개화론으로 사고를 전환케 해준 것은 다름아닌 서양을 방문한 결과물들이다.

지금이라도 서양문물을 배격하지 말고 수용하고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문순득을 도외시한 조선처럼 하지 말고 존 만지로를 100% 활용해 성공한 일본처럼 배우고 활용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이재언 섬 전문 시민기자ㆍ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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