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도 않고 면허도 없는 의사가 낙태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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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마취도 않고 면허도 없는 의사가 낙태수술"
고흥 국립소록도병원 특별재판 현장
70대 할머니 "낙태 당연한 것인 줄…" 울분
정부 측 "자발적 수술…강제성 없어" 반박
  • 입력 : 2016. 06.21(화) 00:00
서울고법 민사30부(강영수 부장판사)와 변호인 관계자들이 20일 고흥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에 대한 강제 낙태와 정관수술에 대한 특별 기일을 가진 후 검시실을 살펴보며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배현태 기자 htbae@jnilbo.com
"당연히 낙태를 해야되는 줄로만 알았어요. 한센인은 자식 낳아 키우면 (병이 자식에게) 감염되고 그래서 그런 뜻으로 하는가 보다 하고……."

20일 오전 고흥의 국립소록도병원 별관 2층 소회의실. 법정으로 꾸며진 이 곳에선 낙태ㆍ정관절제 수술을 받은 한센인들의 국가 상대 소송 특별재판이 열렸다. 지난 2011년부터 피해 한센인 500여 명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정관절제 피해 3000만원, 낙태 피해 4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고, 이에 정부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날 국가소송 2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30부는 소록도병원으로 내려와 한센인들의 수술이 강제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양측 주장을 심리했다. 법원이 직접 사건의 배경인 소록도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원고 측 증인으로 나선 A(77)할머니는 증언을 하며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A할머니가 소록도에 들어온 건 지난 1959년.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까 두려워 숨어지내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고흥 깊숙이 숨겨진 섬에 왔다.

증언이 이어질수록 A할머니가 겪었던 아픔은 방청객들의 가슴을 후벼팠다. 소록도에서 맺은 인연으로 뱃속에 품게 된 아이는 마취도 없이 수술대 위에서 지워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낙태 수술을 집도했던 이는 심지어 의사 면허도 없는 사람이었다.

"소록도에서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방청석을 채운 50여 명 한센인들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똑같이 한센인이었던 남편은 정관 절제 수술을 받는 조건으로 A할머니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 지난 1935년 이후 소록도에서 자행된 한센인에 대한 강제 정관절제수술과 낙태의 증언이다.

이날 재판에서 한센인(원고) 측 변호인은 "한센인에 대해 실시된 단종ㆍ낙태 수술은 의학적ㆍ유전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뤄졌다"며 "국가는 일제시대 당시 한센인에 대한 무지와 차별, 편견으로 비롯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폭력을 가했다"고 소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밝혔다.

원고 측에 따르면 강제 단종과 낙태는 소록도 각종 연보에서 1980년대까지 발견된다. 부부동거 및 소록도 거주에 대한 조건으로 이용됐다. 한센인들은 가정을 갖기 위해 자식을 포기해야 했다. 소록도에서 도망을 간다해도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타 의료기관에서 운영하는 한센인들이 모인 정착촌 뿐. 그곳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정부(피고) 측 변호인은 원고 측의 '한센인에 대한 국가폭력'이라는 주장에 "강제성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당시 한센인들의 진술을 보면 병원 측에서 강제로 끌어갔기보다는 분위기나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여겨진다"며 "정관 수술의 경우 당시 국가정책 상 산아제한이 장려되던 시기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 측 증인에는 한때 소록도 병원에서 근무했던 의료인 B씨가 나섰다. B씨는 "과거 한국과 일본은 한센병에 대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때문에 음성 판정이 나와도 '환자'로 취급했다"며 "병력이 남아 어디에서도 살지 못하니 국가에서는 보호 차원으로 시설에 머물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 공방이 가열되는 가운데 원고 측 변호인의 변론 자격 논란으로 재판이 지지부진하자 일부 한센인 방청객은 "논점을 흐리고 있다"며 혀를 찼다. 한 한센인(62)은 "당시 소록도병원이 보호시설로 잘 됐다면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었겠냐"며 "그렇게 도망가면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증거조사 절차가 마무리된 뒤 피고측 변호인은 "한센인들의 아픔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국가가 손해배상을 질 경우 국가를 대신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이들이 낙태와 단종수술 같은 불법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된다"며 행위 주체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누군가를 가해자로 두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국민 정서에 맞춰 국회 등에서 한센인 특별법 수혜 범위나 규모를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피고측도 '굴절된 과거'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소록도=김정대 기자 jdkim@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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