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성들 심금 울린 당대 최고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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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욱의 남도이순신
조선 백성들 심금 울린 당대 최고 문장
제503호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
  • 입력 : 2016. 11.11(금) 00:00
전남 해남 문내면 동외리에 있는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
"옛 명장 저리가라 책략 신묘"
울돌목 협수로 조수 이용해
기적의 역전승 거둔 '명량대첩'
그의 행적ㆍ업적 새겨진 대첩비
일제로부터 지켜내 제자리

이순신장군은 명량대첩은 하늘이 내려준 복이라고 생각하며 "천행(天幸)이다"고 하였다. 숙종 임금은 명량대첩의 크고도 큰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이 비석은 오늘날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에 자리하고 있다. 전면 미학으로 가득한 12자의 큰 글씨가 눈에 띈다. 1686년 국문학의 대가로 '구운몽'의 작가인 김만중의 전서이다. 서예가로 조선 최고였던 이정영이 해서로 썼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 이민서의 비문은 조선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만력 25년 정유년 1597년 9월이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순신장군은 진도 벽파정 아래 진주하였다. 명량해역으로 드나드는 첫머리인 이 곳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크게 패한 일본군들은 감히 영남 바다와 호남ㆍ경기도를 엿보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에, 일본군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했다. 세상 사람들이 평하기를 '조선을 다시 일으킨 전공으로 이순신 장군이 제일이다. 또 해전으로 명량대첩이 최고로 뛰어난 승리이다' 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초기 전라좌수사로 재직 중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분노하며 부하들과 맹세하며 영남 쪽으로 진군하였다. 일본군을 바다에서 요격하였다. 처음 옥포해전과 다음 당포해전을 치렀다. 그 후 다시 고성과 당항포에서 싸웠다. 그때마다 적은 군사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사살한 일본군의 숫자가 얼마인지 셀 수 없었다. 마침내 한산대첩으로 이순신 장군의 위엄이 널리 알려졌다. 이 연유로 이순신 장군은 통제사가 돼 삼도수군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 통제영에서 몇 해를 유진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들은 감히 해로를 넘어 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군은 또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지난날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쳐 들어왔다. 일본군은 분한 마음을 머금고 전력을 다하여 바다를 가르고 돌진하여 육상으로 돌진하려는 것이었다. 그 때 이순신 장군은 바야흐로 모함을 입어 체포됐다.

조정의 명령으로 이어서 평복을 입고 권율 도원수를 따르게 됐다. 이윽고 이순신 장군은 다시 직책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이미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많은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출전했다. 원균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몰했다. 수군과 무기 군량을 모조리 잃었다. 이어서 한산 통제영도 무너졌다.

이순신 장군은 패몰하고 무너진 뒤를 돌아보았다. 이어 싸울 군사조차 없었다. 서둘러 바다 길을 달려갔다. 겨우 남은 군사를 거두어 모았다. 또 전선 10여 척을 얻었다. 나아가서 명량의 급소를 눌러 승리했다.

일본군의 배들이 바다를 가득 덮었다. 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수들에게 전함이 진격하도록 독려했다. 이순신 장군은 좁은 입구를 선택했다. 전함의 노를 잇대어 닻을 내렸다. 흐르는 바다 중간을 끊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명량은 좁은 협수로이다. 조수의 방향이 밀려왔다. 물결은 더욱 빠르게 흘렀다.

일본군은 상류 쪽으로 조수를 따라 덮쳐 왔다. 형세가 마치 산이 누르는 것 같아 군사들은 의지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의 사기를 격려했다. 기회에 따라 싸우고 격파하게 했다. 장수들은 전투에서 죽기를 맹세했다. 전선은 나는 듯 드나들고 대포를 사방으로 발사했다. 바닷물도 모두 끓었다. 적선이 불타고 깨졌다. 물에 빠져 죽은 일본군은 이루 셀 수 없었다.

일본군은 크게 패전하여 거두어 달아났다. 처음 전투가 무르익을 때 거제현령 안위가 조금 물러났다. 이순신 장군은 뱃머리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좌우간 안위의 목을 자르라 호령했다. 이 말이 두려워 되돌아 와 돌격하며 싸웠다.

이날 적군의 배를 쳐부순 것이 500척이요. 일본군 장수 마다시도 참수했다.

이 때 남도 어민들 가운데 일본군을 피해 이순신 장군을 따르던 배가 100여 척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과 싸우기 전에 미리 명령하여 남도 어선을 바다에 나누어 벌려 세우고 싸우는 배처럼 꾸몄다.

해전이 전개되자 배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얼굴빛을 잃었다. 이순신 장군이 군사가 적으매 당연히 패하리라 걱정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전투가 잠잠했다. 보이는 것은 조선군 전함들이며 그렇게 우뚝 아무 탈 없이 있었다. 모두 경탄하며 달려와 조선수군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후로부터 조선군이 군세가 복구되어 크게 위세를 떨쳤다. 이일 장군과 신립 장군이 패한 뒤로는 관군과 의병들이 적을 만나는 데로 무너졌다. 일본군들의 칼날에 맞설 길이 없었다. 이어 명나라에서 많은 군사를 보내 주어 크게 쳐부수게 됐다.

그 후 3개의 도읍이 차례로 수복되었다. 이어서 자연히 조선군들도 조금씩 군세를 회복하였다. 연안성 승리와 행주대첩은 비록 한때 훌륭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모두 명나라 군사력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겨우 성을 지키고 일본군을 막았을 뿐이었다.

제 힘으로 혼자서 전쟁의 일부를 직면하여 일본군을 모조리 무찌르고 전부 승리한 것은 오직 이순신 장군만이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들이 호남ㆍ영남에 6~7년간 농성하였으면서도 감히 서쪽 바다는 한 걸음의 땅도 밟지 못했다.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의 공세가 더욱 강력해졌다. 그래도 일본군은 후방을 돌아보면 두려워 제 마음대로 침략질을 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이 사력을 다해 일본군을 막아낸 노력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 싸움에 당면해서 큰 전투를 치루고 또한 대 승리하였다. 그러다가 노량 해전에 임하여 함대의 전열 진중에서 운명하였다. 마침내 이순신 장군은 몸 바쳐 순국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자 일본군도 또한 물러갔다.

그 뒤에 조정에서 일본군을 평정한 공로를 논의하였다. 이때마다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최고의 공적으로 삼았다. 이순신 장군에게 조정에서는 선무공신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노량에 충렬사를 세워 뜻을 기렸다. 이순신 장군의 이름은 이순신이며 다른 이름으로 이여해이다. 본관은 덕수인이다.

이순신은 언제나 차분했다. 그 모습은 단아하여 마치 선비와 같았다. 또 그 전쟁마다 적을 무찌른 책략의 발상은 신묘하였다.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이보다 더 할 수 없다. 또 충의를 발휘함이 마치 저 해와 달을 꿰뚫는 것과 같았다. 또 귀신까지도 감동하게 함이 있었다. 그가 있는바 반드시 승리했다.

이순신 장군의 위엄은 일본군들은 무서워 떨었다. 이순신의 의기는 중국군을 움직였다. 이순신 장군 같은 이는 그야말로 예부터 일컫는 진정한 장군이다. 가히 대업을 이룰 장군이다. 다만 이 한 때의 승리를 취한 것으로 전하거나, 그래 귀한 것이라고 만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모든 방면의 전쟁 행적과 용병 전략은 역사에 남아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기록에도 적어 있다.

내가 젊은 시절 명량을 지나다가 이순신의 싸움터를 보고나서 연이어 긴 탄식을 내쉬었다. 이순신의 싸움터를 오래 거닐면서 그의 인격을 상상하여 보았다.

이제 남도 사람들이 그곳에 돌을 세웠다. 거기 돌에 새길 글을 받으려 왔다. 의리상 차마 거절할 길 없었다. 드디어 옛날에 들은 여러 사실을 소략하게 적었다.

그리고 노랫말을 이어 붙였다.

울돌목 노래로 말하다. 울돌목이여, 좁고 좁다. 바닷물의 밀려옴이여, 협수로에 빠진다. 군사들이 지세에 따라 일어남이여, 꾀로써 이기도다. 아득히 멀리 무리 지은 추한 자들이여, 군세를 이루지 못하도다. 군사들의 분투함이여, 저기 북소리 진동한다. 적을 무찌름이여, 남김없이 휩쓸도다. 오직 장군이여, 의와 용맹 갖추었도다. 바다 길을 차단함이여, 걱정도 끊어졌도다. 노도같이 부서지는 물결이여, 상어와 고래도 빨려 간다. 전장터를 바라봄이여, 제갈량과 같은 이순신의 지혜를 상상해 본다. 고귀한 얼이여, 낭떠러지 바다에서 빛난다. 별들을 꾸짖음이여, 천둥과 비바람이 달린다. 바다가 마르지 않음이여, 비석이 갈라지고 깨지지 않으리라. 장한 공적 밝게 비춰냄이여, 한없이 빛나도다.



이 비는 전라도민의 적극적인 협력 속에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에 의하여 세워진다. 오랫동안 회자된 비석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수난이 시작됐다. 비문에 쓰인 내용을 트집 잡아 일제는 비를 철거하는 음모를 꾸민다.

1942년 일제는 대첩비를 제거하기 위해 우수영 선창으로 비를 옮겨 배로 실어 서울로 반출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대첩비의 첫 번째 수난이었다.

일제는 아예 흔적도 없이 없애버릴 계획으로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비를 묻어 버리면서 대첩비의 두 번째 수난이 시작됐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지역 덕망 있는 인사들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여 대첩비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다.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미군정청 협조를 받아 대첩비를 서울역에서 목포까지 기차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이를 목포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항구로 가져왔다.

조선 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던 대첩비는 땅속에 묻히고 훼철되고 기차로 배로 운반되는 수모를 겪지만 제자리에 다시 서게 됐다. 그 후 2011년 본래의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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