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남진에 도움 준 신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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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욱의 남도이순신
이순신 남진에 도움 준 신안 사람들
이순신과 팔금도
신안 백성 앞다퉈 환영 병참물자ㆍ군량 등 충원
채일봉서 작전회의 열어 물목 통제 장소로 제격
  • 입력 : 2017. 01.20(금) 00:00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지금의 신안군 암태면 당사리에 있는 당사도로 항진하였다. 판옥선에 필요한 급수와 땔감 등 병참 물자를 보충하고, 신안군 지도읍 어외도에 이르렀다. 신안의 향촌의병 등과 피란선 300척이 마중 나와 있었다. 신안군 지도읍 어외도의 백성들은 서로 앞 다투어 환영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이순신은 호남순찰사 박흥로를 만나기 위해 서해 바다로 북상하였다. 고군산도서서해바다 부근에 이르러 이순신은 명량해전의 승첩 장계를 썼다. 그리고 이 승첩 장계를 군관 송한, 판관 정제, 군관 김국, 군관 배세춘에게 주어 배편으로 서울로 보냈다. 판관 정제는 충청수사 관아에 머물고 있는 부찰사 한효순에게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갔었다. 판관 정제는 이순신의 장형인 이희신에 큰 사위이었다.

1597년 10월 8일, 이순신은 다시 남진하여 병참물자를 충원하기 위해 신안군 지도읍 어외도에 유진하였다. 조선수군은 명량 해전 다음날 이곳을 거쳐 21일만에 다시 어외도 바다에서 유진하게 된 것이다. 신안군은 어외도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남서해의 길목에 위치하여 이순신의 정탐활동 거점이 되었다. 신안군 일대의 정찰은 중군장 김응함이 맡았다. 미암 유희춘의 사위인 전 군수 김종려도 정찰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종려는 일본군 진영에서 포로 생활을 하였기에 일본어에 능숙하였다. 지리에 밝은 유생 정조, 백광훈의 아들 진사 백진남 등의 협력을 받았다. 중군장 김응함이 밤 10시 경 정찰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 왔다. 중군장 김응함 일본군이 퇴각하고 있음을 알렸다. 새벽에 전라우도 응양별도장 우후 이정충도 일본군 동향을 파악하고 돌아 왔다 그는 일본군이 섬 바깥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하였다.

10월 11일, 새벽 두 시 다시 정탐조를 소집하였다. 신안군 지도읍 어외도 아래쪽 해상을 다시 살피도록 한 것이다. 적진으로 보낼 군관을 뽑자 군관 이순, 군관 박담동, 군관 박수환, 군관 태귀생 등이 나섰다.

1597년 10월 11일 오전 바람이 잔잔하고 날씨가 화창하였다. 오후 팔금도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군관들에게 지리적 요건을 설명하였다. 오늘날 팔금면 원산리 채일봉에서 회의가 계속되었다. 서쪽으로 비금도까지 통하여 눈앞이 시원하고, 동으로는 섬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섬은 오늘날 안좌도에 속한다. 여기서 북쪽향방으로 나주와 영암 월출산이 보인다고 한다.

이순신은 신안군 물목을 통제할 장소로 팔금도를 선택한 것이다. 진리마을을 살피고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함대를 은폐할 곳을 살폈다. 중군장과 우치적, 감관 조효남, 전부장 안위, 안골포만호 우수와 은폐할 지점을 놓고 작전 회의가 열렸다.

전부장 안위는 바닷가 지리에 능숙하게 알고 있었다. 감관 조효남은 훈련도감 소속으로 충청도 서산 남양에서 바다흙으로 염초를 만드는 화약전문 기술자였다. 영등포만호 척후장 조계종이 정탐하고 와서 일본군 상황을 보고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수군을 몹시 싫어한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정보를 취합하며 팔금도 천해의 요새에 함대를 유진시키고 장기 전략을 구상하였다. 이순신은 밤이 되자 팔금도 바다에서 정찰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심정을 달랬다.



'밤 바닷바람 훈풍의 바람결은 봄인 것만 같다.

아지랑이 밤하늘에 수를 놓는다.

곧 가을비 쏟아져 나릴 것만 같다.

초저녁 달빛만이 유난히 빛난다.

차가운 밤바다는 비단결만 같다.

지치고 외로운 몸 봉창에 곁에 앉았다.

시름에 겨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진다.'



이순신은 정찰선이 돌아오지 않자 시름에 잠겼다. 1597년 10월 13일, 아침 일찍 조방장 배흥립과 경상우 우후 이의득 등 옛 군관들이 속속 집결하였다. 이순신이 기다리던 탐후선 임준영이 복귀하였다. 임준영의 전황 보고를 들었다.

1597년 10월 11일 분탕질하며 농성하던 일본군은 "모두 도망쳤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전황 보고를 받고 즉시 10명의 지휘관을 선발하였다. 순천부사 우치적, 금갑도만호 이정표, 제포만호 주의수, 당포만호 안이명, 조라포만호 정공청, 군관 임계형, 군관 정상명, 군관 봉좌, 군관 태귀생, 군관 박수환 등을 민정탐방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팔금도 포구 위쪽 언덕에 앉아서 조방장 배흥립과 장흥부사 전봉 등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였다. 전라우 우후 이정충, 전라우수사의 군관 배영수도 합류하였다.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온 미조항첨사 김응함은 섬 안에 숨어서 소와 말을 잡아가는 낯선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현감 황득중과 군관 오수 등에게 이들을 염탐케 하였다. 이순신은 추운 가을 바다를 보고 회포에 잠기었다.



'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잔잔하여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외로이 뱃머리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리 저리 뒤척이며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였다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황득중이 섬 안에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소를 잡는 자는 내수사의 종 강막지이며, 기르던 소 12마리를 끌고 갔다"고 하였다. 일본군을 정찰하도록 탐망군관 임중형, 탐망군관 박신, 탐망군관 임홍 등을 쾌속선에 태워 적진으로 보냈다. 임중형은 7월부터 계속해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 미조항첨사 김응함, 해남현감 류형은 민정을 살피게 하였다. 선발대로 순천부사 우치적, 전라우도 우후 이정충, 금갑도만호 이정표, 제포만호 주의수 등이 해남지역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일본군 13명의 목을 베어 왔다. 어두워지자 낙안군수 임계형과 탐망군관 임준영도 들어왔다. 이들은 빼어난 전장의 군관들이었다. 조방장 배흥립, 경상우후, 진사 백진남, 거제현령, 안골포만호, 녹도만호, 웅천현감, 제포만호, 조라포만호, 당포만호, 우우후, 윤건 형제 등이 팔금도로 집결하였다. 이순신은 김종려를 감자도감검으로 임명하여 13곳의 염전을 감독하게 하였다. 10월 24일, 군관들이 일본군 전선을 탈취하여 군량 322섬을 획득하여 돌아왔다. 군량걱정은 없게 되었다.

옛 군관 원유남과 영광군수의 아들 군관 전득우가 감 홍시를 가지고 위문을 왔다. 이순신은 팔금도 진영에서 아픈 몸을 치료하며, 조방장 배흥립, 군관 김종려, 군관 백진남, 군관 정수 등으로 통제영을 이진할 보고를 받았다. 저녁나절 소금밭의 책임자 걸산이가 팔금도에서 큰 사슴을 잡아와 송별의 시간을 가졌다. 이순신은 신안에서 1달여 가까운 시간 동안 수군의 군세를 완전히 세운 것이다.

1597년 10월 29일, 밤 두 시쯤에 첫 나발 소리에 일제히 전선을 남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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