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최후 격전 대접주 연고에 박정희 흔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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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동학 최후 격전 대접주 연고에 박정희 흔적까지
장흥 농민군 3만명 日軍 650명과 맞붙어 '산화'
반공주의 기반 '국민재건운동' 거대한 간척사업
  • 입력 : 2017. 08.08(화) 00:00
박정희 재건운동으로 만든 간척지 논.
장흥 회진 옛 회령진은 고려에서 현대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역사의 더께가 쌓여 있다.

회령진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장흥지역 향토 사가들은 고려말~조선 초 왜구의 침탈에 대비해 수군 진영을 구축했으리라 보고 있다. 잔존한 회령진의 성은 조선 성종 21년 1490년에 축성했다고 한다. 일단 15세기로 그 연원이 올라간다.

회령진이 다시 역사의 주목을 받을 때는 1894년. 그해 남녘에는 동학이 분기탱천했다. 허나 동학군들은 일본군과 관군에 밀려 장흥 땅으로 흘러든다.

당시 장흥의 인구가 3만 여명인데, 동학 교도가 3만이라 했으니, 실은 장흥은 동학의 땅이었다. 이대흠 관장은 "동학군이 장흥에서 마지막 대전투를 치르는데, 그들이 장흥에 온 것은 동학의 거대한 지원지역이었기 때문이다"면서 "회령진 성의 맞은편에 있는 천관산 아래 동네에 동학 이인환 대접주가 있었고, 이 곳 성터에서 식량과 무기를 접수하고 전투를 준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흥 동학군들은 1895년 석대들에서 대 혈전을 치른다. 농민군 3만 명 대 일본군 단 650명이 맞붙었다.

일군은 사거리 1800m 소총으로 무장했다. 동학군은 겨우 사거리 150m 조총이었다. 장흥 동학군들은 총탄이 어디서 날라 온 지도 모른 채 픽 픽 쓰려져 갔다. 이 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 놈들은 장흥에서 일대 타격을 가한 후 토끼몰이 하듯 동학군들을 진도로 몰고 갔다"며 "그곳에서 동학교도들을 학살했다. 왜 진도였을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선조들이 이순신에게 명량해전에서 참패했던 앙갚음이었다. 그 때처럼 동학 교도들을, 조선 백성들을 똑같이 수장시키겠다는 발상 이었다"고 말했다.

역사는 다시 흘러 회령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등장한다. 5.16 쿠데타 이후 전국적인 벌인 '재건운동'이었다. 동학의 지도부가 대거 거주했던 대덕읍 연지리 일대에 간척사업을 벌였다. 바다가 메워지고 그 대신 수 만평 논이 들어섰다. 식량 증산을 위한 대대적인 국민동원 운동이었다.

박정희 등 군부는 악습 타파를 명목으로 '재건국민운동'을 착수했다. 1961년 6월 10일, 통치조직인 최고회의는 중앙정보부법을 공포하는 동시에 유진오를 본부장으로 하는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1961년 6월에 공포된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은 실상 반공주의에 기반 한 국민동원 시스템이었다.

국민운동의 세부 실천 사항은 △용공중립사상의 배격 △내핍 생활의 여행(勵行:힘써 행함) △근면정신의 고취 △생산 및 건설의식의 증진 △국민도의의 앙양 △정서관념의 순화 △국민체위의 향상 등 7가지다. 장흥 회진에서 동학과 박정희를 만났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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