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통제사 취임식… 명량대첩 발진기지 '눈길'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특별기획
이순신 통제사 취임식… 명량대첩 발진기지 '눈길'
재팬로드 -<7> 장흥 회령진 성
  • 입력 : 2017. 08.08(화) 00:00
장흥 회진면 회진리 옛 회령진에는 기다린 성벽이 남아 있다. 회령진을 수비하는 성으로 왜구 방비와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취임, 동학 격전 등 숱한 역사를 안고 있다.
아직도 먼 남행(南行)이다. 이순신도 그날 그랬을 터다. 광주를 출발해 보성, 장흥 읍을 거쳐 정남진을 비켜 길을 재촉했다. 36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길이다. 그날도 이리 더웠을까.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옛 회령진이다. 실은 강진 마량과 회진, 보성 군학이 모두 옛 장흥 땅이었다. 조선시대 남해안 수군 기지들이다.

회진에 다다르니 높다란 성벽이 안내한다. 회령진의 성(城)인데, 높이가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옛 기록을 보면 둘레가 1990자, 높이가 10자에 이르렀단다. 거기에 동문, 북문, 남문, 객사, 동헌, 사령창, 장청, 군기고가 있었다. 언덕으로 이어진 마을 뒷산을 이용한 성이다. 지금은 남아 있는 성벽이 616m 뿐이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둘러쳐진 성벽은 한눈에 보아도 요새처럼 여겨진다. 이 성벽에 올라 바다를 응시했을 이순신을 떠올린다.

회령진 성은 성종 21년, 1490년에 축성됐다. 동쪽으로는 사도진, 발포진, 녹도진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마도진, 이지진, 어란진으로 연결된다. 회령진이 언제 군항으로 개발됐는지는 명확치 않다. 조선조에 이곳에는 수군 472명, 크고 작은 군선 8척이 있었다. 진의 지휘관은 종4품 '만호'였다.

회령진 성은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 방어 기지였다. 남해안 여러 성 중에서 왜구를 타깃으로 한 성은 그리 흔치 않다. 왜구의 방어는 꽤나 성가신 국정과제였다. 1555년 을묘왜변, 또는 달량포 왜변이라 일컫는 왜구와의 전쟁은 왜 조정이 성까지 쌓아 침탈 방지에 노력했는지 보여준다. 그해 5월 왜구들은 지금의 해남 북평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조정은 전라도 병마사를 파견해 대적했으나, 참패하고 만다. 왜구는 되레 어란포, 장흥, 강진, 진도를 거쳐 영암까지 치받아 오른다. 전라도 남ㆍ서부가 왜구에 분탕질을 당한 셈이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조정은 5월말 중앙의 금군 등 정예부대를 출정시켜 격멸한다. 장흥 회령진에서도 의병이 창의, 왜구를 물리친다. 이른바 달량포 전투라는 역사다. 근데 회령진 성을 알리는 일부 자료와 블로그에 이순신이 의병을 모아 승리했다면서 이를 달량포 전투라고 소개하고 있다. 1555년 명종 때 이순신과 회령진은 무관하다. 역사의 오류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순신과 회령진은 1597년 8월 만난다. 정유재란의 첫 해전인 칠천량 전투에서 참패한 후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그 무렵 공은 남도를 백의종군 중이었다. 선조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장계를 보성에서 올린 후 그는 회령진으로 향한다.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장계다. 장군은 8월18일 회령진에 다다랗다. 다음날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는다. 즉 회령진은 임진ㆍ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내는 수군 최고사령관 이순신이 삼도 통제사로 취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취임식은 초라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가져온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 뿐이었다. 이순신의 눈빛은 빛났고, 구국의 결의는 드높았다.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어야 한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이 충무공 공행록 통제사 취임사) 이순신의 유명한 '회령포 결의'다. 죽음을 각오한 불퇴전의 결의가 충만했다. 아쉽게도 일부 자료와 블로그에는 회령포 결의를 엉뚱하게 풀이하고 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며,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는 충무공의 명구가 이곳 회령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는 명량대첩 하루 전인 9월15일 벽파진 우수영에서 충무공이 쓴 휘호다. 바로 잡아야 할 역사의 허위다. 회령진 결의는 통제사 취임사로 봐야 한다.



충무공은 통제사 취임 후 곧바로 전선 정비에 착수했다. 회령진의 백성들이 모두 동원돼 거의 난파 직전인 12척의 배를 수리했다. 이 때 주민 300여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충무공은 회령진에서 군선과 장병들을 추스른 뒤 대격돌을 대비했다. 강진 마량, 완도 고금을 돌아 진도 벽파진으로 군선을 돌렸다. 9월16일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의 발진이다. 옛 회령진에 동행한 이대흠 시인이자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장은 "회령진은 이순신 통제사의 취임과 명량대첩의 발진기지라는 역사적 상징이 존재한다"면서 "장흥 회진 일대는 역사의 자취가 가득한 땅이다"고 말했다.

회령진 성 주변에는 복원된 성벽과 이순신을 기리는 기념조형물들이 서 있다. 충무공과 함께 전란을 극복한 것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비롯해, 12선의 전선, 명량대첩 알림비, 정자 등이 서 있다. 성의 동헌이 있을 법한 곳에 큰 나무가 있다. 높이가 16m에 둘레가 3.7m로 우람하다. 수령 250년의 팽나무다. 이 나무는 예사롭지 않다. 회진 마을사람들이 250년 전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의미로 심었다고 한다.



성벽에 올랐다. 오른편으로 강진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펼쳐진다. 성을 마주보는 산자락이 장흥의 진산, 천관산이다. 작은 방조제가 이곳이 예전 바다였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모두 논으로 변했지만, 한 때는 짠물이 들던 곳이다. 천관산 아래가 노두다. 밀물이면 바다이나, 물이 빠지면 뭍이다.

회령진, 이곳에는 흔치 않는 왜구 방어기지인 성이 존재한다. 그 뒤 이 곳에서 충무공의 복권을 상징하는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이 열리며, 죽음을 각오한 '회령포 결의'가 창의한다. 불끈 솟은 창의의 힘은, 명량대첩으로 이어진다. 남해안 장흥 작은 어촌에 '불멸의 역사'가 살아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ㆍ사진=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특별기획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