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ㆍ김정호ㆍ송창식ㆍ양희은…70년대 포크송 '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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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김민기ㆍ김정호ㆍ송창식ㆍ양희은…70년대 포크송 '가왕'
국소남의 통기타이야기-노스텔지어 7080 Ⅰ
80년대엔 운동권 가요 유행
92년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음악 주도권 랩ㆍ댄스로 변화
  • 입력 : 2017. 09.13(수) 00:00
2인조 남성포크 '트윈폴리오(송창식ㆍ윤형주)의 음반. 두 사람의 어쿠스틱 기타(통기타)연주와 감미로운 보컬 화음으로 초기 한국 포크의 '고운 노래'를 확립했다.
● 7080은 노스텔지어다

사람이 사는 세상,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 흔히 ‘사람은 나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라고들 말한다. 사람이 사는 그 세상속엔 온갖 희노애락이 있고 또한 일상속에서 우리는 늘상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며 살아간다. 지나간 것은 과거요, 그리고 다가올 것들은 미래다. 그중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착이나 그리움, 지나버린 일이나 가버린 사람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또는 그 생각을 추억이나 추상이라 하고, 같은 맥락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회향병)이나 홈 시크(Home Sick) 등, 옛것을 그리워하며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남아있는 잔뿌리가 노스텔지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기성세대들의 노스텔지어 중 하나인 신조어 7080은 우리 뇌리에 깊숙이 파고든지 오래된 단어다. 7080이란 단어는 단순하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칭하는 말로, 그 속엔 그 시대의 문화적인 요소들이 꽉 들어차 있다. 크게는 사회적, 정치적인 배경에서부터 평범한 일반인들의 생활속에 묻어나올 수 있는 하찮다고 생각되었던 문화적 가치들이 세월이 흘러 아직껏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는 것들. 그것이 7080의 노스텔지어다. 1970~1980년대 크게 사랑을 받았던 유행음악 중 필자가 선정한 '7080 유명 음반 베스트 20'을 선정해 소개하고자 한다.



● 통기타 가수가 부르면 모두가 포크이던 시절

국내에서 포크는 1970년대에 젊은시절을 보낸 세대(2017년 기준 60세~75세 쯤)에게는 당대의 김민기, 양희은 , 송창식, 윤형주, 김정호, 어니언스 등이 부른 노래는 모두가 포크송이었다. 1980년대에는 학생 시위대와 노동현장에서 불리우던 운동권 가요의 바탕을 이루는 동시에 듀엣 해바라기가 말했듯이 주류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음악의 주도권이 랩과 댄스음악으로 넘어가면서 급속도로 퇴조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하여 젊은 세대와도 멀어지게 됐다.



● 1970년대 베스트 10 음반



● 1970년 트윈폴리오-웨딩케익ㆍ하얀손수건

송창식, 윤형주, 이익균이 1967년 말, 어쿠스틱 기타(통기타) 그룹인 세시봉 트리오로 대학생들의 아마츄어 포크가수들의 산실이라 일컫던 무교동 세시봉에서 닻을 올리고 1968년 초 2인조 (송창식ㆍ윤형주) 듀엣으로 재편성, 트윈폴리오로 개명한다. 1968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가진 리사이틀 후 1년 뒤 같은 곳에서 고별 리사이틀을 갖게 된다.

이 고별 리사이틀에서 불렀던 노래들이 그룹이 해체된 뒤 1970년 1월 독집앨범 '트윈폴리오 리사이틀'이란 타이틀로 탄생하게 된다.

창작보다는 미국의 포크송을 비롯, 유럽의 팝송을 번안해서 노래했다.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등은 통기타의 교과서처럼 통기타를 치는 젊은이들의 스탠다드 넘버가 되기에 충분했다. 1984년에는 김세환이 가세, 3명이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외국곡의 번안이 잘 이루어진 사례이자 2인 기타 연주와 화음이 일품이어서 듀엣의 잣대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포크송의 효시로 간주되었고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은 60년대를 마감하는 음반이자 새로운 포크시대를 예고한 명반이 되기도 했다. 이 음반에는 '축제의 노래' '고별' '사랑의 기쁨' 등이 수록되어 있다.



● 1970년 키보이스 특선 2집-해변으로 가요ㆍ바닷가의 추억

1960~1970년대에 활동한 한국의 5인조 록 밴드 (그룹사운드) 애드 훠, 코끼리 부라더스와 더불어 한국 록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외국의 팝을 번안해서 노래, 연주했지만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 등을 빅 히트한 바 있다.

1963년~1964년 미8군에서 활동하기 위해 팀을 결성, 한국의 비틀즈라는 별명에서 보듯, 당시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던 비틀즈의 이미지와 컨셉을 따라하기를 즐겼다.

결성 당시의 멤버는 (고) 차중락 (보컬), 차도균 (베이스 기타), 윤항기 (드럼), 김홍탁 (기타), 옥성빈 (키보드)이 통칭 1기 키보이스라고 불리워졌다. 1969년, 원년멤버가 모두 탈퇴하고 장영 (베이스 기타), 박명수 (기타), 조영조 (기타)를 주축으로 여러 멤버가 들고 났다.

통칭 2기 키보이스라 불리웠고 6인조, 7인조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원년 멤버인 차중락, 차도균은 솔로로, 윤항기와 김홍탁은 각각 키부라더스와 히식스 리더로 성공적 경력을 지속했다. 1970년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 등 빅히트 곡을 남겼다.

1971년을 마지막으로 김홍탁, 윤항기, 차도균은 가수, 연주인, 제작자로 음악관련 활동을 계속했다. 필자가 미국 이민 시절이던 1999년 뉴욕 맨하탄의 어느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던 김홍탁과 만남이 새롭게 생각난다. 키보이스의 노래 '뱃노래' '님 떠나갈 시간'도 히트곡 중 하나다.

● 1971년 라나에 로스포-사랑해

라나에 로스포의 개구리와 두꺼비. 1970년대 국내 최고의 히트곡은 누가 뭐래도 '사랑해'다. 이 노래의 히트는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범국민적인 사랑과 애창곡이 되었다. 이곡은 변혁 작곡, 작사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중앙대학생 오윤경이 백혈병으로 죽은 애인을 생각하며 쓴 가사에서 비롯됐다.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등재 등 한국 포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념비적 앨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1972년 8월 31일 평양에서 열린 최초의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남북수석대표가 손을 맞잡고 부른 노래가 '우리의 소원' '아리랑'이 아닌 '사랑해'였다. 1972년 그 유명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두달이 채 안된 시기였다. 매스컴이 들추어 대자 일파만파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혼성 듀오 라나에 로스포는 은희, 최안순 등 무려 12명의 멤버 교체를 해 질타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사랑해'는 국내 대중음악사에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노래로, 이 노래를 뛰어넘는 대중가요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뜨와에 므와의 앨범에 끼워넣기 식으로 제작된 '사랑해'. 당시 국민적 가요의 제1선봉에 나선 이 곡에 다른 이유를 붙이는 건 상상하기가 싫다.

● 1971년 김민기-아침이슬

김민기는 전북 이리 태생(1951)으로 경기고,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싱어송라이터다. 1970년 8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세상에 몸을 드러냈다. '아침이슬'은 '세노야'와 함께 무명의 대학생이던 양희은을 일약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한 대표곡이다. 양희은의 고운노래 1집에서 '아침이슬'이 1970년에, 김민기는 1년 뒤 71년 독집에 이 곡을 수록한다. 후일 양희은은 "'아침이슬'이 없었다면 난 가수가 되지는 못했을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일찍이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연주해 왔던 김민기가 음악다방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양희은의 공연 반주를 맡으면서 시작됐다.

양희은은 '아침이슬' 이래 김민기의 곡 '금관의 예수', '상록수', '작은 연못',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으로 가수의 입지를 다졌다. 사랑과 이별 타령으로 일관되던 기존 대중가요와 전혀 색깔이 다른 가삿말의 이들 노래는 김민기가 아닌 양희은 표로 대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최소 김민기의 노래를 대중이 따라 부르게 만든 유행가로 발전시킨 것은 가수 양희은이었다.

'아침이슬'은 아이러니하게도 1973년 정부의 건전가요에 선정됐다가 나중에 돌연 금지곡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70년 건전가요에서 금지곡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던 시대적 상황, 군부독재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그 시대가 그랬다. 1975년 당시 무려 2000여 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사회통념위반, 근로풍토저하, 가사저속 따위의 금지사유조차 없었다.

'아침이슬'이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이 70년대 당시의 유신정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고 72년 10월에 선포된 유신정권에서 붙인 황당성이 지금에 와서 보면 가관이다.

운동권 집회와 시위 등에서 단골 메뉴였던 '아침이슬'은 대중에 더 가까워졌고 1987년 6ㆍ29 선언 이후 마침내 해금된다.

어둡고 긴 70년대의 터널 속에서 빠져나올 즈음 세상의 간이역, 버스 정류장 등에서는 통기타로 '아침이슬'을 부르는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아침이슬'은 가요가 아닌 젊은이들의 애국가였다. 김민기 1집에 수록된 주옥같은 레퍼토리로는 '아침이슬'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저 부는 바람' '꽃피우는 아이' '길' '그날' '종이연(혼혈아)' '눈길'이 수록돼 있다. 필자와 (고) 이장순이 듀엣으로 방송에서 '아침이슬'을 100번은 넘게 불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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