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필문로 주인공 이선제 묘지 日서 돌아온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정치
광주 필문로 주인공 이선제 묘지 日서 돌아온다
15C 보물급 밀수범 빼돌려
상감기법 지문 새긴 위패
광주시, 업적 기리는 작업
도로명 '필문로'로 명명
  • 입력 : 2017. 09.13(수) 00:00
이선제 묘지 앞면과 뒷면. 배현태 기자ㆍ국외소재문화재단 제공
조선시대 광주의 위상을 재정립한 필문 이선제(李先齊ㆍ1390∼1453) 선생의 묘지(墓誌ㆍ죽은 사람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묻은 돌이나 도판)가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지 19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필문 이선제 선생은 조선 전기 호남을 대표하는 거유(巨儒)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된 당시 광주를 광주목으로 승격시켰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ㆍ이하 재단)은 조선 전기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인 필문 이선제 선생의 광주 무덤에서 도굴됐다가 1998년 6월 일본에 건너간 묘지를 일본인 소장자 도도로키 구니에(等等力邦枝ㆍ 76) 씨로부터 넘겨받아 지난달 24일 국내로 들여왔다고 12일 밝혔다.

필문은 당시 강원도관찰사와 호조참판 등 고위관직을 두루 거쳐 문종연간 예문관 제학에까지 올랐었다. 국외재단이 가져온 이선제 묘지는 도도로키 씨의 의사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도도로키 구이에 씨는 "생전에 남편은 조상을 섬기는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은 같기 때문에 묘지가 예술적 가치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면서 "남편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기증의 이유를 밝혔다.

도도로키 구이에 씨가 기증한 이선제 묘지는 단종 2년(1454)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으로 지문을 새겨 백토를 채운 뒤 유약을 발라 구운 위패(位牌)형이다. 높이 28.7㎝, 장폭 25.4㎝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명문(銘文)은 묘지의 앞면과 뒷면, 측면에 248자가 있다.

필문의 묘지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4점과 기타 비지정 묘지들과 비교해도 유사한 사례가 없을 만큼 매우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패의 지붕이나 받침 없이 하나의 판으로 된 동체가 밑 부분에서 두 개의 판으로 나뉘며, 묘지의 굽다리는 연판문(蓮瓣文ㆍ연꽃잎모양 도안)으로 장식돼 '단순하면서 기발한 수법이 압도적'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광주 입장에서 필문의 묘지는 작품성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

필문이 중앙에서 근무하던 당시 광주는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돼 있었다. 세종12년(1430) 광주 사람 노흥준이 그의 애첩을 가로챈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변란을 일으키거나 강상윤리를 해친 고을은 강등시켰다.

문종 원년(1451) 당시 예문관 제학이던 필문은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하여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복귀시켰다. 지금의 광주우체국 자리에 희경루(喜慶樓)를 짓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광주의 젊은 선비 30인을 뽑아 강학의 학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광주향약을 계승,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필문은 30년이 넘게 주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종실록',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

광주시는 지난 1988년 필문 이선제 선생의 업적을 기리 위해 남광주에서 서방사거리 구간의 도로를 '필문로'라고 명명했다.

한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부터 필문의 묘지를 기증받은 국립중앙박물관은 19일 오전 10시 교육관에서 기증자를 초청해 유물 설명회를 연다. 이어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선실에서 이선제 묘지를 전시한다.

오민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