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상징 도시샤 대학 교정에 윤동주ㆍ정지용 시비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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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자유의 상징 도시샤 대학 교정에 윤동주ㆍ정지용 시비 '눈길'
<12> 귀무덤ㆍ윤동주의 교토(京都)
도요도미 신사 주변에 임진왜란 전리품 코ㆍ귀 무덤 조성
  • 입력 : 2017. 09.26(화) 00:00
대학의 도시 교토를 상징하는 명문 사립대 도시샤 대학 교정에는 윤동주ㆍ정지용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윤동주는 도쿄 릿쿄대학을 다니다 자유로운 학풍과 정지용시인의 숨결을 찾아 영문학과에 편입학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비행시간은 불과 30여분 남짓이다. 무안공항에서 큐슈의 북쪽 끝자락 기타큐슈까지도 50여분이다. 국내 여느 도시와 같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국과 일본은 양국에 다양한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특히 16세말 임진ㆍ정유재란 7년 전쟁과 20세기 초 36년의 식민 과거사는 싫든 좋든 서로에게 상처와 '과거'를 새겨 놓았다. 양국의 과거사가 중첩된 곳이 여수와 교토이다. 교토에는 임란의 적장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신사와 전리품의 현장, 귀 무덤이 있다. 교토로 떠난다.



사찰과 대학의 도시답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도시를 감싼다. 교토부와 교토시청사를 지나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오면 낮은 산자락을 베개 삼은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를 만난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받드는 신사다. 신사 정면 횡단보도를 건너 100 여m 정도 내려가면 왼편에 작은 언덕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돌계단 위로 둥그런 무덤이 서 있다. 미미즈카, 귀 무덤(耳塚)이다.

그 때, 일본군은 조선에서 전리품으로 코와 귀를 베어갔다. 일군 장수들이 코와 귀를 베어 전공을 자랑하면, 히데요시는 전공을 치하한 듯한 증서를 써주었다. 조선인 12만6000명이 잠들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조선군 뿐 아니라 조선백성과 참전했던 명나라 전사자들도 포함돼 있다.

귀 무덤 앞에 섰다. 작은 안내 간판만이 이곳이 조선 유적임을 짐작케 한다. 교토시의 관리가 미치지 않고, 그냥 개인이 관리한다. 안내 간판에는 '이 무덤은 16세기 말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한걸음 더 나아가 대륙에도 지배의 손길을 뻗기 위해 조선반도를 침공한 소위 문록, 경장의 역에 관한 유적이다'고 밝히고 있다. 안내문은 이어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은 조선 반도의 많은 사람들로 부터 끈질긴 저항에 부딪혀 패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전역이 남긴 이 귀무덤은 전란 때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의 역사를 유훈으로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번역문은 노성환 저서'일본에 남긴 임진왜란' 참고)

동행한 교토 출신 히로노 도시아키씨는 "교토는 역사도시이지만, 그 역사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도 많다"면서 "과거의 역사를 화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데 과거사 유적이 연결 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토의 자랑은 아무래도 대학 같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절과 신사가 2000여 개에 이르지만, 교토의 멋은 역시 대학에 있다. 명문 교토대학이 그리하고, 짙은 서양풍 도시샤 대학(同志社)의 학풍이 그렇다. 도시샤 이마데가와 캠퍼스로 길을 잡는다. 비가 개인 탓인 지 싱그럽다. "혹 한국인 윤동주…" 눈치 빠른 대학 수위는 얼른 주머니에서 캠퍼스 안내도를 꺼내더니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을 알려준다. 윤동주란 이름만으로도 시비 위치를 알 수 있다니, 참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다녔나 보다. 또 하나 윤동주를 도시샤 대학의 '홍보대사'쯤으로 잘 활용하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붉은 벽돌 건물 사이에 작은 시비가 보인다. 윤동주(1917-1945) 시비다. 검은 돌에 윤동주가 원고지에 썼던 친필로 시를 새겼다. 1942년 작 '서시'다. 영면 50주년인 1995년 2월16일,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의 발의로 이 시비를 세웠단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는 1917년 중국 땅 용정시 명동촌에서 출생, 은진중학교를 졸업, 서울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을 거쳐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쿄 릿쿄대학을 거쳐 도시샤 대학 영문학부에 편입했다. 편입한 뒤 여섯 달 만인 1943년 7월14일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복역 중 1945년 2월16일 의문의 옥사를 당한다. (도시샤 시비에는 한글로 시를 쓰다가 붙잡혔다고 했지만, 그는 절친 송몽규와 함께 유학생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혐의로 체포당했다)

그는 그렇게 죽었지만, 그의 시는 아직도 일본에 살아 있다. 치쿠마 출판사가 제작한 일본 고교 문학교과서에 시 3편이 실려있다. 일본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쓴 수필에 그의 생애와 시가 소개돼 있다. 1990년 이후 이 교과서를 본 학생이 30만 명에 달한다.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84년 첫 번역돼 계속 출판되고 있다. 또 윤동주가 옥사한 교도소가 있는 후쿠오카(福岡)에선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결성돼 23년째 시 낭송회를 열고 있다. 일본의 저명시인 우에노 미야코씨는 윤동주시 전편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시비는 도시샤 대학 말고도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교정에도 있다. 그가 한때 하숙을 하던 곳인데, 당시 건물이 헐리고 조형예대가 들어서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 시집을 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무명의 학생시인이었다. 교지 정도에 발표한 게 전부다. 부모에게 조차 죽어서 처음으로 '시인'이란 말을 들었다. 중국 만주벌판에 있던 동주의 부모는 그의 시신을 거둬 명동촌에 묘지석을 세우며 '윤동주 시인 지묘'라 했다.

그의 시가 빛을 발한 건 1948년 펴낸 동생과 친구들이 펴낸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덕택이었다. 근데, 이 유고시집에 서문을 쓴 시인이 있었다. 바로 도시샤 대학 윤동주 시비 오른편에 시비가 있는 정지용(1902-1950)이다. 시비는 고향인 충북 옥천 산 돌을 가져다가 2005년 12월18일 제막했다. 1924년 쓴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압천은 교정 근처에 있는 가모가와 강의 한자 표기이다. 정지용은 1924~29년까지 6년 동안 영문과를 다녔다. 윤동주보다 15년 연배로 같은 과 한참 선배인 셈이다. 압천은 1930년 시문학 동인지 창간호에 '경도압천'으로 발표됐다.



윤동주가 도시샤 대학을 택한 건, 독특한 학풍 때문이었다. 이 대학 설립자인 니지마 조(1843-1890)는 21세의 나이에 해외여행 금지조치를 어기고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에서 평등, 자유, 인권을 눈으로 보았고, 유학 중 기독교도가 되었다. 10년 후 일본으로 돌아온 니지마는 교토에 도시샤 영학교를 설립했다. '도시샤'는 '뜻을 같이 하는 자(同志)가 만드는 결사(社)'를 의미한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식민지 청년으로 적국의 심장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를 꿈꿨나 보다.(일설에는 윤동주가 정지용 시인을 너무 좋아해 도시샤 대학을 택했다고도 한다)

윤동주는 아이러니하게 동북아 3국에 그의 자취가 서려 있다. 중국 용정 명동촌에 생가와 무덤이, 한국에는 학창시절(연세대)의 꿈과 친구(고 문익환 목사)들이, 일본에는 순국지와 시비가 있다. 올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다. 윤동주 재팬루트를 넘어 한-중-일 윤동주 루트를 만들면 어떨까. 윤동주의 대표 시는 순천 한 벽장에서 발견됐으니, 광주 전남도 결코 비켜설 일이 아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ㆍ사진=교토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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