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서체 '동국진체' 꽃피운 서예 본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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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민족의 서체 '동국진체' 꽃피운 서예 본고장
동국진체의 고장 남도 현대서예의 근원
  • 입력 : 2017. 10.20(금) 00:00
서희환 불밝혀백천만세.

남도는 조선후기에 우리 민족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꽃 피운 서예의 고장이다. 이러한 동국진체의 전통은 현대까지 전승되어 독창적인 서예 작품이 지속적으로 제작된다.

서예는 약 300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동양의 대표적인 예술로 정신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서예의 점은 멈춘 것이 아닌 동적이며 선은 생명력과 의미가 있는 획으로 동양인의 사상이 담겨있다.

서(書)의 획은 우주만물이 변화한다는 역(易)에서 근원 한 것이며 서(書)의 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태로 양(陽)과 음(陰)의 법칙을 나타낸다.

이러한 서예 작품 중 동국진체는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우리 민족의 서법을 말하며 중국의 법첩에서 벗어나고자 한 자각적 글씨이다.

이러한 동국진체는 실학사상을 담고 있어 개성을 강조하였으며 참됨(眞)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자유로움을 표현하여 가짜 나(假我)에서 벗어나 참된 나(眞我)를 찾고자 하는 글씨이다.



남도 동국진체의 서맥

남도는 동국진체가 발생하였으며 이후 많은 서예가들이 독창적인 서체를 개발하여 전개하여 동국진체를 화려하게 꽃피운 고장이다.

옥동 이서(1662~1723)와 공재 윤두서(1668~1715)로부터 시작된 동국진체는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를 내재시키는 형상성을 추구하였다.

백하 윤순(1680~1741)은 온아하고 단정한 글씨를 썼으며 윤순에게 사사 받은 원교 이광사(1705~1777)는 1762년부터 신지도에서 23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국진체를 완성하였다.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즉원(1787~1794), 혜장(1772~1811), 혜집(1791~1857) 등 남도의 선승에게 이어져 필명 높은 선승들을 탄생시켰다.

이광사 이후 동국진체 서맥에 중요한 서예가는 조선후기 김정희, 조광진과 함께 삼필(三筆)로 불리는 창암 이삼만(1770~1847)이다.

이삼만은 어린 시절 이광사에게 서예를 배웠으며 스승의 영향을 받아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삼만은 이광사 글씨에 대해 "근원을 헤아려 미묘함을 드러내고 거짓을 끊고 참됨을 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삼만의 서체인 창암체는 붓이 곧 자연이란 생각으로 물이 흐른 듯이 자연스럽게 쓴 독창적인 글씨체이다.

이삼만은 제자들에게 한 점, 한 획을 각각 한 달씩 가르쳤으며 제자로는 호산 서홍순(1798~1876), 기초 모수명, 해사 김성근, 노사 기정진(1798~1879) 등이 있다.

이들 제자들이 설주 송운회(1874~1965), 의재 허백련(1891~1977), 근원 구철우(1904~1989) 등을 가르쳤으며 이를 통해 이삼만의 서맥이 형성된다.

모수명은 만년에 호남지방을 돌아다니며 서법(書法)을 가르쳤으며 필법은 설주 송운회에게 이어졌으며 송운회는 송곡 안규동에게 전수한다. 또한 노사 기정진에게 이어진 서맥은 의재 허백련, 기우만, 노백헌, 정재규 등을 통해 전승된다.

동국진체의 전통은 조선후기를 거쳐 근대에 호남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근대 이후 남도를 중심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남도의 동국진체는 허백련, 손재형, 황현, 구철우, 안규동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들은 현대 남도 서예계의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는다.

1960년대 들어서서 남도 서예가들은 서예원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남룡 김용구가 1963년 전국 최초의 서예원인 남룡서도원을 개설하였으며 안규동은 광주서예연구원을 개설해(1965)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60년대는 김용구, 안규동에 의해 서실이 운영되었으며 1970년대 들어 학정 이돈흥, 용곡 조기동, 소원 김병남, 오재 박남준, 송파 이규형 등의 10여개 서실에서 동국진체의 전통을 이어갔다. 또한 1970년대에 김용구가 이끄는 서룡회와 안규동이 이끄는 광주필진회가 회원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광주필진회는 한중일전(1975)을 개최하였다.

안규동의 동국진체는 조기동, 이돈흥, 이규형, 고기임, 박경래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는 소전 손재형에 의해 한글 서예가 전개되었으며 손재형의 한글 전예체는 한글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손재형의 전예체를 근간으로 안규동과 김용구는 한문 서예로 새롭게 전개 발전시킨다.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 1905~1989)

전북의 강암 송성룡, 제주의 소암 현중화와 함께 남도 삼절이라 불리며 광주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며 지조 높은 삶을 살다간 서예가다.

손재형, 정운면, 최한영 등 서화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으며 1938년 허백련이 설립한 연진회에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우아하고 격조 있는 문자향에 바탕을 둔 문인화 작품을 그렸다.

구철우는 해, 행, 초, 전, 예서 등 서예 5체를 두루 구사하였으며 조맹부의 송설체에 근간을 둔 단아한 행서가 뛰어났다.

왕희지, 조맹부, 동기창 글씨에서 필(筆)과 의(意)를 익혔으며 중년이후 부드러우면서 고졸한 서예인 근원체를 완성하였다. 구철우가 구사한 동국진체는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필치로 대담하며 일(逸)을 통해 자연 본성을 나타낸 글씨이다.

구철우는 창암 이삼만, 노사 기정진,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의 맥을 계승한 서예가로 제자들에게 “정(正)이 익혀진 연후에야 파격이 나올 수 있다.”며 근본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엄격하게 서법을 전수하였다. 구철우의 제자로는 지헌 오명렬, 우현 장은정, 현계 김정희, 무전 곽영주, 담헌 전명옥, 공전 손호근, 강동원 등이 있다. 이들 제자들은 근묵회(槿墨會)를 만들어 구철우의 서맥을 계승하고 있다. 구철우의 작품으로는 순천 선암사 경내의 삼성각(三聖閣) 편액과 허백련 묘비 등이 있으며 다수의 글씨와 사군자가 전해지고 있다.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1907~1987)

동국진체의 조형구조와 원리를 터득하여 송곡체 또는 천마산인체라고 불리는 독창적인 서예를 창안하였다.

안규동의 동국진체는 한국적 심성의 미의식인 진(眞)을 나타내며 나를 드러내는 본질과 감성인 기(氣)를 담아낸 글씨이다. 개성 있으면서 불규칙한 느낌이 나고 멋스럽게 쓴 글씨에는 참된 마음이 담겨있다.

즉 송곡체는 자연 본성에 들어가 무위(無爲), 즉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을 새롭게 창조한 동국진체이다.

안규동의 송곡체는 독자적인 글씨체로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인간의 순수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다. 또한 바른 마음에 의해 발현된 인간의 감정, 끼를 담아내 주체적인 나를 찾는 동국진체의 정신을 따르는 서체이다.

안규동은 1963년 광주서예연구회를 창립하였으며 구철우, 고정흠, 김태집, 홍신표, 김철수 등의 서예가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1965년 광주서예연구원을 설립,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광주서예원에 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해서 3년, 초서 3년, 행서 3년, 전서 2년을 거치게 할 정도로 엄격하게 가르쳤다.

안규동이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옛것을 스승으로 삼아서 새로운 데로 나아가고(師古就新) 자기를 극복해 먼데까지 이르라(克己致遠)"는 가르침이었다.

광주서예연구원에서 배출한 제자는 현대 남도 서맥의 큰 맥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서예가로는 백천당 고기임, 학정 이돈흥, 창석 김창동, 송파 이규형, 금초 정광주, 용곡 조기동, 운암 조용민, 녹양 박경래 등이 있다. 또한 이들 제자에 의해 많은 서예인들이 양성됨으로써 송곡 서맥이 현대 광주ㆍ전남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제자들은 안규동의 작품과 자취들을 모아 '송곡 안규동 서집'을 발간하고 공덕비를 건립하였으며 송곡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남룡(南龍) 김용구(金容九, 1907~1982)

자연스러움이 담겨있으며 개성이 있는 자유로운 글씨를 쓴 남도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의 핵심 사건인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2차 동맹 휴학을 주동하여 수감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광주고보 5학년을 중퇴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고 시간이 지난 1982년 모교인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

일제강점기 광주고보 중퇴 후 일본에 건너가 성신토목건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 후 건축사무소를 운영하였으며 1956년에 무등산 춘설헌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934년 서예에 입문한 김용구는 허백련, 손재형, 송운회 등 남도 동국진체의 대가들에게 사사를 받았다.

김용구의 서체는 마음에 따라 자유롭게 쓴 글씨로 사랑, 기쁨, 화남, 상쾌함, 뉘우침 등의 감정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획 하나하나가 살아 약동하며 생동하는 김용구의 서체는 맑고 담박한 것을 담아낸 기(氣)를 발현시킨 동국진체이다.

또한 전국 최초의 서예원인 남용서도원을 1963년 광주에 개원하여 많은 서예가를 가르쳤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정기적으로 서예 전시회를 개최하여 남도 서예 발전에 기여하였다.

제자로는 오암 이숙행과 운곡 박중래, 만취 최일환, 춘당 김용운, 시몽 이기순, 월송 정일순, 지남 허상, 송암 양정태, 신암 박용주, 남초 전진현, 박재석, 서동근 등이 있다.



현대에 전개되고 있는 남도 동국진체의 큰 스승은 구철우, 안규동, 김용구 등이다. 이들은 감성적이며 개성이 담긴, 기(氣)가 발현된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해 인간 본성을 표현한 대가들이다.

이들 서예가에 의해 계승된 남도 동국진체는 민족자각의 독자적 사상과 예술이 융합된 개성 있는 남도의 핵심 예술이다.

광주와 남도에서 구철우, 안규동, 김용구의 제자가 주축이 되어 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도는 한국 서단에서 민족의 서체인 동국진체가 꽃 피우고 계승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구철우, 안규동, 김용구가 이룩한 서(書)의 예술적 성취는 현대 예술문화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들 서예가에 대한 연구와 정당한 자리매김이 있어야 현재 활동하고 있는 많은 남도 서예가들의 전통성이 확립될 것이다.


한국 서예계 큰 스승 진도출신 손재형


진도출신 소전 손재형(1903~1981)은 동국진체를 근간으로 소전체를 완성한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또한 문화재 지킴이로서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철학자 후지즈카 지카시를 한 달여간 설득한 끝에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찾아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해방 후 일본의 서도에서 벗어나고자 서예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서예는 중국에서 서법(書法), 일본에서 서도(書道)라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영향으로 서도라고 불렸다.

해방 후 1945년 9월 손재형의 구상에 의해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가 결성되었고 손재형은 서도(書道)라는 말 대신 새롭게 서예(書藝)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하면서 서예가 공식적인 명칭이 된다.

손재형은 동국진체 사상을 바탕으로 예서체에 근간을 둔 새로운 서체인 소전체를 만든 서예가이자 포도나 연, 괴석 등 문인화와 산수화를 함께 그린 남종화가이다.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에 뿌리를 둔 손재형의 글씨는 필흥을 느끼게 하는 자유로운 리듬감을 가진 동국진체이다.

이러한 손재형 서예 작품이 뛰어난 이유는 자형에 다양한 조형미가 있으면서도 유려하고 전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글과 한자 서예를 접목하여 문기 넘치는 글씨를 썼으며 이러한 한글의 전예체화는 한글서예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손재형의 제자로는 경암 김상필, 평보 서희환, 장전 하남호, 금봉 박행보, 원당 김제운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한국서단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손재형의 제자인 평보 서희환은 한문 예서체와 한글 고체를 조화 발전시켜 평보체라는 한글서체를 창의적으로 개발하였다.

장전 하남호는 스승의 전예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금봉 박행보는 허백련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손재형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익혀 남도를 대표하는 남종화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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