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백련. 다도해풍경 |
의재 허백련(1891~1977)은 한시와 글씨를 쓴 문인이자 한국화단에서 단아하고 깊이 있는 운필을 통한 근현대 남종화의 큰 맥을 이은 대가이다. 그리고 교육과 차문화 보급에 앞장을 선 문화운동가이자 한국 문화계의 거목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허백련은 춘설헌에서 호남제일의 예인들과 사상가들과 교류를 하였고 남종화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많은 한국화의 대가를 양성하였다.
남도남종화의 창시자
허백련은 서예에서 조선후기 민족적 자각운동인 동국진체를 계승한 서예가이자 남도의 다도문화를 이어온 호남 문화의 큰 스승이다.
특히 허백련은 우리나라 근현대 한국화단의 대가로 남종화 전통을 바탕으로 호남의 실경을 작품에 도입한 새로운 남도남종화를 제자들에게 전승해 남도한국화단을 만들었다. 허백련의 초기 작품은 남종화의 전통을 근간으로 한 새롭게 창신 한 작품이다.
이후 의도인 시절부터 무등산에서 거주하면서 남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낮고 둥근 산과 물을 기반으로 남종화의 깨끗하고 청빈한 정신을 담은 작품을 그렸다. 즉 허백련은 사의(寫意)와 인품을 담은 남종화를 근간으로 남도의 자연을 넣은 새로운 남종화를 그렸으며 허백련의 화맥이 현재까지 계승 창발되고 있다.
허백련의 남종화의 시작
허백련은 진도에 유배를 왔던 무정 정만조(1858~1936)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 묵화와 서법을 배웠다.1908년 공립진도보통학교 수학 후 1911년 기호학교에 다니면서 당대 서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서화미술원 교수들과 만나 추사와 소치의 화론에 대해 논하였다.
허백련은 1913년 일본에 유학을 떠나 입명관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명치대학에 전입하여 청강하였다. 6년간의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여 옛 서화를 보고 감상하고 대가들의 화법인 남종화를 연구하였다. 귀국 후 1922년 선전에 수석 입상을 하였으며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과 가와이 쿄쿠도우 등과 교류하였다.
즉 허백련의 남종화는 정만조에게 배운 한학, 허형에게 배운 남종화, 일본에서 본 고화의 감상과 임모, 일본 남화의 대가를 연구하면서 전통 남종화를 깨달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허백련은 1932년 김은호와 서울 삼월백화점에서 2인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1936년 서울 중학동에 조선미술원이 창설될 때 김은호, 박광진, 김복진 등과 함께 지도교수로 참여하였다.
해방 후 작품 활동
허백련은 해방 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49년 국전(國展)이 시작되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으며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71년 「동양화 6대가전」에 <춘강활원>(春江闊遠), <하산심원>(夏山深遠) 등 4점을 출품하였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허백련의 작품에 대해‘동아시아의 심상, 즉 정신을 담은 작품이면서 가장 차원 높은 미술’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허백련은 전통 철학을 넣은 높은 차원의 남종화를 호남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호남인의 삶 속에 전파했다고 하였다.
다도의 전파, 춘설차
허백련은 김정희, 허련의 남종화 전통과 함께 초의 선산의 다맥을 계승해 해방 직후 음다흥음(飮茶興飮)을 주장하며 춘설헌에서 다원(茶園)을 가꾸었다.
허백련은 광주 무등산 무등다원(無等茶園)을 1946년 정부로부터 사들여 삼애정신, 조상을 받드는 천애(天愛), 땅의 풍요 지애(地愛), 동포사랑 인애(隣愛)를 바탕으로 삼애다원(三愛茶園)으로 개명해 차를 재배하였다.
허백련이 차를 보급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다산 정약용이 차 먹는 국민은 흥하고 고춧가루 먹는 국민은 망한다는 말을 해 그 말에 그냥 웃었지만 그 후 일본이 나라를 삼켜버려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했다. 차는 마음이 열리고 부지런해지고, 고춧가루는 기가 열려 나른해져 버려 사람이 게으르게 되고...”이와 같이 허백련은 차를 마시는 나라의 국민은 정신이 차분해져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삼애다원에서 생산한 차를 춘설다(春雪茶)라 이름 짓고 차문화를 보급하였다.
민족주의자 허백련
허백련은 삶과 예술이 일치한 문인화가로 정신을 예술혼과 필력으로 승화시켜 작품을 창작하였다. 지식인으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으며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해방 후 허백련이 거처를 마련한 무등산 증심사 계곡 춘설헌은 청빈한 사상가, 진보적인 계몽가들이 자주 찾는 호남 문인 정신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 민족주의 계열과 지운 김철수 등 사회주의 계열의 사상가들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폭넓게 교류를 하였다.
계몽운동가로 한국전쟁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다원을 인수하고 민족교육에 나서기도 하였다. 허백련은 오방 최흥종(五方 崔興琮)과 함께 민족의 빈곤한 의식과 가난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조성하여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1947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세우면서 허백련은‘농촌의 근대화만이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농촌이 부흥해야 여기에서 진정한 예술이 나올 수 있다."고 보고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과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열정을 쏟았다.
남도 남종화가 산실 연진회
허백련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화를 토대로 남도를 예향으로 조성한 것이다. 허백련은 1938년 광주 금동에 정착하였고 동강 정운면, 구당 이범재, 근원 구철우 등 서화가들, 유지들과 함께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켰다.
허백련은 "그림을 그리는데 서울과 시골이 따로 있는가. 중국에서도 남종화는 강남지방에서 꽃피우지 않았는가?" 라고 강조하며 남도 화가들에게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수하여 남도 남종화단을 조성하였다.
허백련은 1938년 광주에서 정운면, 조정규를 주축으로 37명으로 구성된 연진회를 발족시켰으며 구철우, 이범재, 정운면, 허형면 등을 가르쳤다.
연진회 초대 회원인 정운면은 한국 최초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허백련으로 대표되는 남도 남종화단과는 다른 색다른 신감각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허행면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은 작가로서 표현의 자유이며, 전통만을 고수한 형식화한 화풍은 가능성이 무한한 남도인의 정서를 새롭게 일깨워주지 못하고 오히려 눈을 멀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남종화의 형식적 화풍에서 벗어나 남도인의 본질과 정서를 담은 작품을 그렸다.
해방 이후 제자들
해방 후, 허백련의 제자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호남동 시절에는 오우선, 성재휴, 조복순, 허정두, 김옥진, 이창주, 강용자, 김승희, 문장호, 이상재, 정승현 등이다. 또한 춘설헌 시절의 제자로는 박행보, 허의득, 허대득, 이강술, 양계남, 장찬홍, 박소영, 최덕인, 허달재 등이 있다.
특히 그 시기 미술의 고시라 할 수 있는 국전에서 활약을 한 제자로는 구철우, 이범재, 허규, 허정두, 김옥진, 문장호, 이상재, 박행보 등으로 국전 특선작가 10여명을 비롯해 국전출신 작가만 30여명에 이른다.
허정두가 1949년 첫 번째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김옥진이 1955년부터 국전에 입선하여 1961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상재와 문장호는 1959년부터 국전에 진출하여 특선에 이어 추천작가에 올랐다.
이들 가운데 구철우, 김정현, 허규, 김옥진, 성재휴, 문장호, 이상재, 박행보 등이 국전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연진회는 1978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자리에 연진회미술원(鍊眞會美術院)을 세우고 호남 한국화를 전승·교육하였다.
현재 연진미술원 동문들로 이루어진 취묵회가 1984년에 창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연진회는 호남 한국화단의 뿌리이자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미술단체이다.
제자들에 의한 남종화맥의 계승
허백련의 제자인 이창주, 양계남 등은 허백련의 문하에서 배운 남종화법과 정신을 토대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남도 한국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허백련의 제자인 김옥진, 문장호, 박행보 등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1948년부터 춘설헌에서 10여년동안 허백련에게 그림을 배운 김옥진의 문하에는 강지주와 이강술이 있으며 이들 제자들은 1981년 남상회(南象會)를 설립하였다.
문장호는 1965년 삼희화실(三希畵室)을 열어 남도남종화를 지도하였으며 제자로는 김영수, 김대양, 서영숙, 최영임, 고영순, 박호순 등이 있다. 이들은 수묵회(水墨會)를 결성하여 1971년과 1977년 회원전시를 개최하였으며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박행보는 1970년대 계림동 사랑채를 화숙으로 삼아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제자들은 1980년 취림회(聚林會)를 만들었다. 취림회는 1990년 첫 창립전시를 개최한 후 매년 회원전시를 개최하여 남도남종화의 화맥을 계승하였다.
허백련은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을 바탕으로 남도의 풍경을 도입한 새로운 남도남종화를 그렸다. 이후 허백련과 제자들이 그린 남도 한국화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구도, 구성, 필치 등에서 새로운 남도 남종화파를 형성하였다.
현재는 남도를 상징하는 예술가인 허백련과 제자들이 이룬 남도 한국화에 대한 성취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호남의 근현대 남종화와 그 전통을 계승한 작품들은 우리나라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들로 한국미술사, 더 넓게는 한국을 넘어 동양미술사에서 새롭게 인식ㆍ조명되어야 한다.
정신을 담은 남도다도문화
의재 허백련은 다도문화 형성과 다례보급을 위해 무등산 삼애다원에서 춘설차를 재배해 남도특산품으로 생산한다. 그리고 전라남도 보성에는 전국 녹차생산량의 40%를 생산하는 거대한 다원이 있다.
이처럼 남도는 우리나라 차문화의 근거지이자 차의 은은한 맛과 향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얻은 다도의 본고장이다.
또한 조선시대 전라도 28개 군현과 경상도 8개 군현에서 차를 생산하여 진상한 기록으로 보아도 예로부터 남도가 우리나라 중요한 차 생산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세기 해남 대둔사 혜장, 초의, 범해 등과 같은 다승(茶僧)과 함께 정약용이 남도의 다도문화를 이끌었으며, 황상(黃裳)이 백적산에 일율산방이라는 돌샘이 있는 차정원을 만들었다.
조선 다도의 조종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는 대둔사 일지암에 초의선사의 다원을 만들었으며 『동다송』을 지어 우리 차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정약용과 차의 인연은 강진 백련사에서 혜장을 만나면서 차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를 통해 차에 관한 체계적이고 깊은 지식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정약용은 다산(茶山)을 호로 삼았으며 『동다기』를 저술하여 우리 차에 대한 예찬론을 펼쳤다.
또한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정원을 꾸미고 차를 마시면서 10여년 세월을 저술 생활에 몰두하였다. 다도에서 중요한 것은 차와 이를 담은 그릇이다.
차의 맛은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져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차를 우려낼 좋은 찻주전자와 찻잔을 필요로 한다. 남도는 다기(茶器)의 고장으로 남도의 도공들은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찻잔을 만들었다.
옛사람들이 즐기는 차와 차의 향을 담아둘 다기잔과의 만남은 다도(茶道)라는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사상을 만드는 근간이 된다.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사 미술학 박사 오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