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심견도(尋犬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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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심견도(尋犬圖)
  • 입력 : 2021. 03.11(목) 11:03
  • 편집에디터

귀신잡는 개-가회박물관 소장

사람은 사람을 배반해도 개는 사람(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물론 목숨을 내놓고 주인을 지키는 동물은 개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성(人性) 없는 사람을 일컬어 개만도 못하다 했다. 개성(犬性)조차 없다는 뜻이다. 나는 개의 본질을 사랑과 지킴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의 개가 문을 지킨다. 터키의 캉갈은 양을 지키는 개다. 심지어 곰이나 늑대, 자칼에게서 양을 지켜내기에 신장이 1미터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고대 이집트의 개(석상)는 성문을 지킨다. 변형된 개들도 지킴이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개는 각종 동물과 섞이거나 창조적으로 변형된다. 사자개와 계견(鷄犬, 닭개)과 고마이누(狛犬)도 각기 그들이 지켜야 할 것들, 예컨대 성문과 신격과 온갖 내밀한 사연들을 지킨다. 참고로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고마이누는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해진 횡적(橫笛, 혹은 高麗笛)과 이름이 같다. 이누이트족의 개는 달을 지키며 북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족의 개는 무려 영혼의 끝을 지킨다. 우리 민화의 개는 심지어 귀신도 잡고 도깨비도 물리친다. 문을 지키니 문배도(門排圖)다. 문배도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 소개했으니 오늘은 개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민화에 그려지는 개들은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인 듯한데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있다. 벽사용 신구, 즉 귀신 잡는 개다. 하지홍씨는 민화 문배도 중 사자개의 모델이 청삽살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많이 보고 널리 들어야하기에 눈이 네 개, 귀가 네 개가 되기도 한다. 19세기의 용호문배도에는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리는 호작도(虎鵲圖) 외에 해태 모양의 사자나 개를 그리기도 하고 삼재가 든 해에는 매그림을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문배도의 개그림은 사실 개가 오줌을 눔으로써 영역을 표시하듯 '우리'라는 영역의 표시, 그래서 안과 밖을 경계 짓는 영토화와 관련되어 있다. 문배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가 반려인의 영토이고 위해하는 적들은 물론 갖은 귀신들마저 침범하지 못하는 안전한 영토인 셈이다.

한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잠들어 있다.

아나톨 프랑스가 한 말이다. 아마 인류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시공을 초월하였던 모든 영성들이 그리고 촉수가 문을 닫아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세워져 있는 발토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25년 겨울, 거친 얼음과 북극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네만(Neman)강에서 알래스카 서부의 놈(Nome)까지 1천 킬로미터를 달려 치료제를 전달한 불굴의 개들을 기리며, 그 인내와 충성, 그리고 지혜를 찬양하노라." 전염병 디프테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동토의 땅 알래스카의 한 도시에 치료제를 전달한 개들을 위한 비문이다. 리처드 토레그로사가 쓴 '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푸른숲)에서 인용했다. 인류를 구한 개들이라고나 할까. 개는 개별 사례에서 민속신앙까지 혹은 병들고 상처받은 마음까지 지켜내는 신장(神將)이요 사천왕이며 게이트키퍼다. 특히 흐트러진 마음, 잃어버린 마음, 상처받은 마음들을 치유하는 등 마음 지키기에 있어서는 반려견 만큼 탁월한 게 없는 듯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원영은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개와 고양이와 함께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쓰다듬다 보면, 고달픈 세상살이로 뒤틀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하게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 데서부터 정서적 불안이 해소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장 질환이 호전되기도 한다. 나아가 그들과 삿됨 없이 온 정성을 다해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개들이 사기성이 없고 분열적이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고, 그 순간 우리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한없는 행복을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점 조절의 기회가 된다. 맞다. 도대체 인류가 개발해둔 그 어떤 무엇이 차마 지상에서 숨 쉬고 있을 여력이 없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아무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소확행의 화평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인가.

남도인문학팁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하며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한다.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즉 심우도(尋牛圖)에서 빌려온다, 선불교에서는 십우도를 소와 목동에 비유한 선의 수행단계로 설계해두었다. 열 개의 그림이니 십우도이고 깊이 성찰하여 찾으니 심우도(尋牛圖)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보명 십우도와 곽암의 십우도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주요한 사찰 법당의 벽화로 주로 묘사된다. 십우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는 소 대신에 말을 그린 십마도(十馬圖)가 있고 티베트에는 코끼리가 소재로 등장하는 십상도(十象圖)가 있다. 이에 비유하면 심견도(尋犬圖)는 개를 주인공 삼아 그린 일정한 서사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선불교의 심우도가 깨달음의 내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내가 제안하는 심견도는 늘 깨어있을 수 있는 내력을, 나아가 오로지 사랑과 화평의 내력을 도설한 그림일 수 있다.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하는 이유다. 하지만 개의 특성에 따라 그 설계를 달리한다. 깨달음이라기보다 무엇인가에 대한 지극한 염원이라고 해두는 게 낫겠다. 지극한 소망을 다루고 있으니 일명 '천견도(千犬圖)'다. 천 마리의 개를 그린다는 뜻이 아니다. 천개의 개는 천 마리의 개와 다르다. 천년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은유다. 천수천안관음을 손바닥의 단 한 개 눈으로 표현하듯, 천년이라는 메타포는 그 아우라가 깊고도 넓다. 내가 제안하는 심견도는 천견도와 같은 말이다.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음동의어로 사용한다. 심우도처럼 열 개의 그림을 특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특별한 어떤 계단을 마련한다든가 무려 수십 개의 계단을 마련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십우도의 예를 따를 뿐이니 그것이 다섯 계단이면 어떻고 두 계단이면 어쩌랴. 다만 상실에서 치유로 아니면 혼란이나 슬픔에서 안정과 평화로 가는 과정을 에둘러 설계할 따름이다. 심견도를 그리는 과정은 선불교의 십우도를 따라 깨달음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고 예수의 행로를 따라 기독교 구원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다. 완성된 그림이어도 좋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 혹은 과정을 뜻해도 좋다. 아니면 자신이 믿는 종교나 신념이나 학설에 따라 과정을 설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겐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삼아도 좋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재구성하는 단계로 설정해도 좋다. 평정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마음을 지켜내는 과정으로 삼아도 좋다. 아니면 서사 구성의 일반적인 예를 참조해도 좋다. 사건과 행위와 사건들의 연속인 스토리와 재현의 서사담화들이 그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반려견과의 교신처럼 무언의 영감이 상호서사(게임서사)로 구성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예컨대 국악의 선율과 장단의 서사라면 기, 경, 결, 해의 단계들을 거쳐 오로지 창작되는 선율과 드러나지 않은 리듬으로 교섭할 수 있을 것이다. 혜능선사가 '육조단경'에서 말했던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과 '평화'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 서사의 과정들을 더하면 천견도(千犬圖)가 된다. 반려동물 천만의 시대, 지금 누군가는 심견도를 그리고 있지 않을까.

귀신잡는 세눈박이 개-가회박물관 소장

김두량(조선시대) 바둑이

민화 계견사호-월간민화 2015년 5월호

민화 당삼목구(개가 짖어 삼재를 쫓는다)-국립민속박물관(가회박물관소장)

이암(조선시대) 어미개와 강아지-국립중앙박물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