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기획시리즈> “죽음 각오하고 시민군에 총기 위치 알려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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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기획시리즈> “죽음 각오하고 시민군에 총기 위치 알려줬죠"
5·18 그날의 또 다른 기억-80년 5월 영암 軍복무 김성모씨
광주항쟁 희생자 소식에 큰 분노
비무장 시민군 광주행 피해 우려
경찰 숨긴 소총 300정 위치 전달
“군인 신분 걱정됐지만 후회없어”
  • 입력 : 2023. 05.14(일) 18:30
  •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
지난 11일 영암 시종면에서 만난 김성모씨가 광주항쟁 당시 경찰이 숨겼던 총기 위치를 시민군들에게 알려줬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성현 기자
“자유롭지 못한 군인 신분에 ‘어떻게 시민군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했지요.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슬 퍼런 1980년 5월, 당시 24세였던 31사단 영암시종중대 방위병 김성모(65)씨는 영암 시종면에서 군 장비고 경계·보안 업무를 맡고 있었다. 서울에서 건설 관련 일을 하다 군 복무를 위해 1979년 고향 영암으로 내려온 그는 당시 정치·사회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인생의 변곡기를 맞았다.

김씨는 당시 군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예비군·경찰 등의 입을 통해 5월 초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었고, 이후 5월 18·19일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다수의 시민이 숨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희생자 중에는 고향에서 자신과 동고동락하던 이들도 있었다.

김씨는 “광주로 올라간 마을 후배들 중에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아끼는 후배들이었다”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시 군인 신분이라는 점이 얼마나 개탄스러웠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시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줄곧 마음이 아팠다. 군인 신분이라 광주 소식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5월 21일 오전 광주에서 온 시민군을 통해 ‘광주’의 참혹한 상황이 급속도로 전파됐다. 이에 분개한 수백 명의 영암 주민들은 ‘광주로 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군은 픽업 트럭·버스 등을 동원해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도 시민군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이중에는 김씨와 같은 마을 후배들도 있었다.

시민군은 광주로 가기 위해 무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총기 탈취를 겪었던 군·경은 일찍이 각 지서에 있는 총기를 고장 내거나 감췄다.

앞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광주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알고 있던 김씨는 ‘시민군들이 비무장 상태로 광주에 간다면 꼼짝없이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얼마 전 경찰서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김씨는 “영암경찰 시종지서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는데, 당시 경찰들이 ‘가지고 있던 총을 시종지서 뒤편에 다 묻어놨다’고 했다. 경찰들과 자주 순찰 근무를 서서 그런지 나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총을 옮긴 경찰·타격대에 물어보니, 무기를 묻은 곳을 봉분(묘지) 형태로 덮었다고 했다. 묘처럼 보이면 아무래도 함부로 파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영암 시종면에서 만난 박재택씨가 광주항쟁 당시 총기가 묻혀있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정성현 기자
김씨는 곧장 이 사실을 시민군이자 마을 후배인 박재택·손철식 씨 등에게 전달했다. 자칫 총기 위치를 알린 것이 들킨다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었지만, 그는 '목숨을 걸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알렸다.

박씨를 비롯한 10여 명의 시민군들은 22일 오후 7시30분께 시종지서 뒤편에서 총기 300여 정을 획득했다. 총기가 묻힌 땅을 파던 당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박재택씨는 “형님(김성모씨)이 말한 곳을 1m 정도 파니 나무상자가 나왔다. 그 안에는 상당수의 카빈 소총과 M1소총이 있었다”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총기 사용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일부 총기를 광주로 향하는 시민군들에게 나눠줬다. 한 차량에 5~10정씩 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로 진격하기 위해 출발한 인근 지역 시민군들은 모두 나주군청에 모였다. 그 수만 수천 명에 달했던 것 같다”며 “이들에게 총기 300정은 정말 큰 힘이 됐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애초에 영암 시민군은 (나주로) 집결조차 못 했을 수 있다. 비록 광주로 향하던 중 헬기가 뜨고 계엄군 사격으로 인해 행진은 무산됐지만, (김성모씨가) 군인으로서 시민군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었다는 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항쟁 이후 서울로 피신했다.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하나둘 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전역을 10여 일 앞두고 있었다.

김씨는 “경찰에서 조사받고 온 사람들이 ‘빨리 피신하라’고 전했다. 영암에 총이 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이후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다행히 먼저 상무대로 끌려간 박재택 등 동네 후배들이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아 별일은 없었다. 제대도 문제없이 처리됐다. 하지만 내가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을 도왔다는 사실은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둬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서울에서 약 20년간 건축일을 이어간 뒤, 4년 전부터 고향 영암에 내려와 소를 키우고 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다시 광주항쟁 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과거에는 광주항쟁 당시 총기 위치를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감옥살이 할까 두려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한번도 후회했던 적은 없다”며 “시종지서에 묻혀 있던 총을 들고 항쟁한 이들이 지금은 국가유공자가 되지 않았나. 이것만으로도 뿌듯하고 참 감사하다. 수십 년 만에 당시의 사실을 밝히게 돼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5·18과 관련해,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드러나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