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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용바위 전설 서려있는 '때 하나 안묻은 마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다. 흡사 성곽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 네 그루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크고 굵은 고목에서부터 비교적 젊은 나무까지 모였다. 오래된 나무이지만 가지가 많이 뻗고, 이파리도 우거졌다. 도란도란 화기애애한 가족 같다. 나무숲에는 마루 넓은 정자가 들어앉아 있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마을사람들의 쉼터임을 알 수 있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았다. 나무 그늘이 시원하다. 바람도 솔솔 얼굴에 와 닿는다. 마음 같아선, 두 다리 쭈-욱 뻗고 드러눕고 싶다. 금세 낮잠이 몰려올 것 같다. "시원하요? 어디서 왔소? 여기가 우리마을 쉼터요. 가장 굵은, 이 나무는 수령이 500년은 넘었을 것이오. 해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나무요." 느티나무 앞을 지나던 지재용(83) 어르신이 말을 건넨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마을주민들이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나무 아래에 모여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빌었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는 향우들까지도 자리를 함께했다. 당산제를 지낸 다음엔 주민들이 한데 모여 줄다리기를 했다. 줄다리기는, 다른 지역과 달리 남녀 대결이었다. 남자가 힘이 세거나, 여자의 수가 많거나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줄다리기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늘 여자팀이 이겼다. 집안과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남자들이 부러, 진 건 아닐까? "정당한 게임이 안 됐지. 할머니들이 회초리를 들고 다니면서 때리고, 방해를 했어. 남자들이 힘을 못 쓰게. 그때 많이 맞아서, 내 키가 안 컸어. 그래서 작아. (하-하-) 그때 매 들고 다닌 분들, 지금은 다 돌아가셨네. 그때가 재밌었는데…." 배기인(85) 어르신의 말이다. 마을의 당산제는 코로나19가 퍼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당산제를 거르지 않았다. 예전처럼 성대하게 지내지 않고, 마을사람들만 모여서 간소하게 올렸다. 마음과 당산제와 줄다리기가 마을의 담장 벽화로 그려져 있다. 몇 해 전 학생들이 와서 그렸다. 용암마을의 느티나무 이야기다. 용암마을은 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에 속한다. 월암산과 배봉산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의 경관이 아름답다. 들판도 산자락치고 넉넉하다. 마을은 조용하다. 평범한 농촌이다. 어르신들의 인심이 좋아 보이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주민은 60여 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벼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마을 위쪽, 연흥사로 가는 길에 큰 저수지가 있어 물 걱정을 하지 않는다. 가뭄이 극심한 올해도 매한가지다.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사는 마을이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여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때 안 묻은 마을이라고 자부해요. 소나 돼지 한 마리도 안 키우고. 오염시킬 것이 하나도 없어." 박인옥(90) 어르신의 자랑이다. 박 어르신의 연세를 묻는 길손한테 "내가 이 마을 1번"이라고 했다. 가장 연장자라는 얘기다. 마을사람들은 지재용 어르신의 집 마당에 펼쳐진 파라솔 아래에서 망중한을 보냈다. "나는 아직 애기"라는 한부열(67) 어르신도 함께 앉았다. 한 어르신은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온 지 2년 됐다고 했다. 용암마을의 역사가 꽤 오래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 입구의 논 한가운데에 놓인 고인돌이 그 증거다. 고려 공민왕과 태조 왕건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군유산(君遊山)도 이를 뒷받침한다. 군유산은 영광과 함평의 군계를 이루고 있다.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와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에 걸쳐 있다. 마을의 이름은 용바위 전설과 엮인다. 배봉산 입구에 용이 승천했다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는 것이다. 용이 하늘로 오른 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그 산에는 지금도 바위가 많다. 용암골 연흥사도 마을의 자랑이다. 산속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작은 절집이지만, 마을사람들은 '불갑사의 큰집'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연흥사가 훨씬 더 크고 번성했다는 것이다. 연흥사 대웅전 마당에 있는 동백나무와 배롱나무 고목이 눈길을 끈다. 수령이 오래됐다는 걸,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요사채의 단청이나 문양도 아름답다. 대웅전 계단 아래에서 활짝 핀 수련 한 송이도 절집과 조화를 이룬다. 연흥사는 고려 때 각진국사가 창건했다. 정유재란 때 화를 입은 뒤 여러 차례 다시 지었다. 복장 유물로 나온 15∼17세기 때의 묘법연화경 6종 14책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석탑과 승탑, 탱화, 다라니경 목판 등도 귀하다. 17세기 중반에 조성한 대웅전의 목조삼신불좌상의 조각 수법도 빼어나다. 후불 탱화는 자수를 이용해 조성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절집 뒤편 산자락에 있는 마애불도 애틋하다. 마을에서 연흥사를 잇는 숲길도 한적하다. 연둣빛에서 진녹색으로 변해가는 숲에 갖가지 여름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길섶에서 만나는 산딸기 몇 알도 오지다. 길손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착한 마을'이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모내기철 논둑으로 향하는 그 어떤 사무치는 그리움
'7인의 사무라이'가 궁극적으로 지켜낸 것은 무엇일까 영화 '7인의 사무라이'만큼 많이 회자된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그만큼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토대로 리메이크된 많은 오마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54년 개봉하였으니 우리로 말하면 동족상잔의 화마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1910~1998) 감독의 흑백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는 일목요연하게 사무라이들의 의기투합과 전쟁을 다루고 있다. '황야의 7인' 등 리메이크된 수많은 영화도 이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모내기다. 사무라이들의 주제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 장면이 내게는 대미나 대단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거론하는 수많은 비평이나 담론 중 모내기 장면을 거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독 이 장면이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15~6세기 일본 전국시대가 배경이다. 산적이 출몰하여 여자와 농작물을 수탈해가는 어느 농촌 마을에서 사무라이들을 고용한다.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실직한 이들이어서 지금으로 말하면 부랑아 정도의 캐릭터들이랄까. 이런저런 에피소드 속에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모이게 되고 급기야 산적들과 전쟁을 치른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연기하는 캐릭터들이어서 스토리의 전개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거장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산적들과의 전쟁이 전체 장면을 이끌고 가지만, 세밀하게 묘사되는 당시 일본 농촌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리 수확하는 들녘의 풍경이며 모내기하는 산전답의 풍경이 그렇다. 산적과의 전쟁에서 이기지만 마을 사람들과 감베이, 시치로지, 가츠시로 세 명의 사무라이만 살아남는다. 사무라이의 대장 캄베이가 엄숙하게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또다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졌다. 이긴 것은 저기 농민들이야." 무슨 뜻일까? 여러 평론을 보면 사무라이와 농민들의 계급적 변별, 별 대가 없이 고용된 사무라이들의 신분적 한계, 결국 농민들 혹은 고용주(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운명, 이런 종류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사무라이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구로자와도 예기치 못했던 대미의 장면이랄까. 결국 사무라이를 고용해서 이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목표 혹은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마지막 장면이 또 달리 보일 수 있다. 산적들이 약탈해가던 것이 여자나 농산물뿐만 아니라 마을 풍경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구로자와가 드러내고 싶었던 일본적인 어떤 것, 마치 우리네가 근자에 열광하는 한류(韓流)와 같은, 한 때 글로벌한 바람을 일으켰던(지금도 그러하나?) 일본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이후 리메이크되거나 오마주(구로자와에 대한 존경의 모사로서)된 일본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확장된 것이 그 사례이지 않을까. 비록 흑백으로 표현되었지만 수려한 일본의 산천과 보리와 쌀과 북장고 두드리는 리듬과 사람들의 노래와 어쩌면 문명 담론 같은 그런 풍경 말이다.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모내기는 우리네 남도지역의 모내기와 많이 닮았다.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모내기 풍경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대 악기 비슷한 요고(腰鼓)와 흔히 벅구나 법고로 호명되는 작은 북, 꽹과리와 비슷한 작은 징쇠, 차양 넓은 볏짚모자며 모심는 동작에 맞춰 부르는 노래 따위가 그렇다. 일본의 남쪽 섬들인 아마미오오시마나 오키나와 등지의 모내기는 지금도 이런 풍경이 연출된다. 머리에 덩굴풀을 두르고 이런저런 의례와 함께 모내기를 하는 것은 내 고향 진도의 들노래 풍경과 흡사하다. 중국의 동북지역이 양걸(秧歌) 장르로 확장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십수년 답사했던 동아시아의 모내기 장면이 대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다르지 않다. 대미(大尾)의 장면이 내게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다. 은연중 드러난 혹은 숨겨진 메타포, 쌀을 지키기 위한 서사 말이다. 구로자와가 말하고자 했고 마을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내면의 풍경, 예컨대 중국의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이 등 수많은 영화와 연출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붉은색의 중국에 비견된다고나 할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고자 했던 생태환경 중심의 애니메이션 풍경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 영화의 이면에 숨어있는 쌀을 봤다. 쌀이 가진 동아시아적 배경, 쌀이 가지는 문명적 함의 때문일 것이다. 감베이의 마지막 대사처럼 전쟁에서 그들이 지켜낸 것은, 다름 아닌 모내기의 풍경, 쌀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라이의 시선에서는 이기고 지는 싸움일 것이지만 마을 사람들 시선에서는 대대로 살아온 마을과 사람과 풍경과 그 기반이 되는 쌀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묻는다. 일본에게 쌀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쌀을 지키려고 했던 것인가? 내게 질문한다.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인가? 여기서의 쌀을 문화나 문명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바야흐로 모내기철에 들어선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우리네 고향에서는 북치고 장구치고 작은북 벅꾸 두드리며 모내기를 했다. 마치 영화 '7인의 사무라이' 마지막 장면처럼 모내기 노래를 불렀다. 머리에는 덩굴풀 뜯어 감고 차양 깊은 삿갓이 무논에 잠기도록 느린 굿거리장단에 호흡을 맡겼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목적도 없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그런 리듬이 있어 쌀을 지켰다. 영화 속의 사무라이 같은 누군가 있어 어떤 불한당 산적들을 '이길 수' 있었다. 모내기철을 맞는 지금의 내 마음이 그렇다. 사무치는 어떤 그리움이 논둑에 나를 불러세우는 것인가. 누가 산전답 어딘가에서 목청 높여 쌀을 노래하는 것인가. 남도인문학팁 은유의 쌀, 정체성으로서의 쌀 쌀은 전 세계 대륙 전체에서 재배하고 먹는 곡물이다. 열대몬순, 온대몬순, 실크로드, 유럽, 미국 등을 포괄한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섭취하는 전분의 22퍼센트가 쌀에서 나온다. 통계에 따라 순위는 달라지지만 밀, 옥수수와 더불어 3대 곡물이다. 아마 쌀을 기피하고 빵을 선호하는 우리네 식습관의 변화대로 밀의 수요가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고기를 즐겨 먹는 식습관 변화로 사료용 곡물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디카, 자포니카로 대변되듯 쌀은 아시아의 문화 혹은 문명을 대변한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기회가 되면 쌀의 문명사를 따로 다루겠지만 우리에게 쌀은 '생명'의 또 다른 은유이기도 하다. '쌀의 인류학'을 쓴 오누키 에미코는 이 책에 '일본인의 자기인식'이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다. 쌀이 타자와 비교되는 '자기 자신'이며 일본의 상징이고 은유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쌀이 내 자신인가. 우리의 은유인가. 쌀을 통해 나의 정체를 혹은 내가 한국인임을 인식할 수 있는가. 사방의 무논에 모내기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다. 우크라 전쟁으로 식량자급에 대한 대책들이 논의되는 모양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아직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쌀을 지키는 것이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7> 이민자들 강한 생명력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이민자의 역사 1903년 1월 13일, 한국인 최초 미국 이민자가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향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들이 적극 알선한 결과였다. 그들 중 상당수(남녀 50명과 노동자 20명)가 감리교 교사나 통역사였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이민 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조국이 식민지가 되자 신앙심만큼이나 애국심도 강조되었다. 그 뒤 미국은 한동안 아시아계 이민자를 받지 않다가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유럽계뿐만 아니라 비유럽계, 그러니까 아시아나 중남미, 아프리카 이민자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원인에 대해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는 "소련과 이념 경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비서구권 국가에서 일렁이는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아내려면 인종차별적인 짐 크로법의 이미지를 지우고 재부팅해 미국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해야 했다고 한다. 그 해결책은 가난한 그들을 미국 유입을 허락해 직접 실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아메리칸 드림 행렬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한국보다 100년 앞서 아시아계 중에서 최초로 미국 본토에 발을 들인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후 대농장의 노예를 대체할 싼 인력이 필요했다. 19세기 미국 팽창기에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할 막노동꾼 또한 절실했다. 이민 노동자가 된 그들은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처참한 노동 환경을 견뎌야 했다. 철도 건설의 경우 땅에 다이너마이트 구멍을 파고 대륙 횡단 철도가 지나다닐 철로를 놓다가 다이너마이트에 폭사하거나 폭설에 파묻혀 죽은 경우가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2마일씩 늘어날 때마다 평균 세 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는 통계가 있을까.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882년 미국은 중국인 이민을 금지한 최초의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했다. 생김새와 문화가 다른 그들을 도저히 받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의원들과 언론은 중국인을 '쥐새끼', '문둥이'이자 선량한 백인 미국인에게서 일자를 빼앗는 '기계 같은' 일꾼이라고 규정했다. 자경단까지 활동하며 중국인 가게에 폭탄을 장치하거나 불을 지르거나 총을 쏘아댔다. 1871년에는 중국인 몇 명이 백인 경찰을 살해했다는 유언비어에 500명에 달하는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이 떼 지어 LA 차이나타운에 들이닥쳤다. 중국인 성인 남자와 소년 18명을 고문하고 목매달아 죽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린치 사건이었다. 1917년 미국 정부는 이민 금지를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 적용했다. 필리핀은 한때 미국의 식민지였는데도 필리핀 사람들의 이민마저 제한했다. 이렇듯 오래된 이민의 역사만큼이나 혐오의 대상이었던 중국 이민자를 다시 소급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우한 바이러스로 끈질기게 반복 지칭하면서 인종주의자를 자극시켰다. 인종주의자들은 아시아계 사람들을 다 싸잡아 코로나 그 질병 자체처럼 취급했다. 수면에 가라앉았던 그들의 혐오를 어김없이 표출시키도록 정권이 도운 것이다. 팬데믹 동안 심심찮게 인종 혐오로 발생한 사건사고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차이나타운 내가 브루클린 다운타운에서 시작해서 브루클린 다리를 지나 뉴욕 차이나타운으로 걸어갔던 때는 뉴욕시 셧다운이 풀린 지 두어 달이 지난, 2021년 7월 3일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높은 그곳은 그때부터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주로 중국인들의 쉼터인 콜롬버스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거나 오락거리를 즐기는 편한 차림의 그들을 봤을 때는,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팬데믹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브루클린 다리를 걸을 때부터 나는 고층 건물을 아름다움을 두 눈에 두고 왔다. 그런 세련됨이 일시에 멈추고는 축지법을 사용한 듯 중국의 한 시장골목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와 또한 조우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뉴욕 질서를 따라야 하지만 차이나타운에서만은 차이나타운의 질서에 편입해야 할 것 같았다. 다국적 기업인 맥도널드나 하겐다즈의 간판조차 한자로 적혀 있었다. 멀리서도 금방 눈에 들어오는 붉은 등이 거리마다 신호등이 걸려 있는 듯한 느슨한 줄에 매달려있었다. 이곳에서는 백인이 되레 여행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낡은 건물 사이를 누비며 여러 상점들을 쇼핑을 했다. 맨해튼의 비싼 물가를 약간 비껴간 그곳에서 물건을 흥정하면서 억센 여행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한 골동품 가게에 들어갔을 때였다. 느긋하게 문 틈사이로 긴 곰방대를 내놓은 한 노인과 가게 안에서 아기를 안고 손님을 맞이하는 젊은 여자를 봤을 때는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차이나타운은 세계 어디에나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한다.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곳 또한 앞서 언급한 철도 노동자들이 1860년대에 모여들어서 세운 곳이다. 노동자보다 더 여자들의 삶이 더 비참했다.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납치되어 미국 땅을 밟은 중국인 여성은 여관에 감금된 채 하루에 열 차례씩 강간당하였다.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결국 매독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길거리에 버려져 홀로 죽어갔다. 여자의 아기가 칭얼댔고 여자가 내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자 나는 다른 곳을 구경하고 다시 온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 곳곳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고 심지어 털을 다 벗겨낸 닭과 오리들이 윈도우에 장식구처럼 걸려 있었지만 그것 또한 강한 생명력으로 빛나보였다. 그들을 강하게 하는 것은 뭘까. 아니, 먼 곳에서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비참함을 견뎌낸, 이민자들의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또다른 질문들을 연달아 만들어내며 걷고 있었다. 차노휘〈 소설가, 도보여행가〉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진주 남강에 몸 던진 호남 최초 임진의병장 김천일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최초로 거의한 의병장은 나주 출신의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다. 김천일은 중종 32년(1537) 외가인 나주 흥룡동에서 김언침과 양성 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난다. 흥룡동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처 장화왕후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고려 2대 왕인 혜종의 탄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김천일의 옛집, 즉 부친의 집은 담양부 창평현 태산리(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였지만, 모친이 친정에서 낳았으므로 나주인이 된다. 김천일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다. 태어난 지 이튿날 모친 이씨가 돌아가셨고, 7개월 만에 부친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이유다. 그는 15살이 된 명종 6년(1551) 작은아버지 김신침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후, 19세가 되던 1555년(명종 10) 당시 호남 일대에서 가장 숭앙받던 학자로 정읍에 거주하던 일재 이항의 제자가 된다. 그가 일재 이항의 제자로 들어가기 1년 전인 1554년 김효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슬하에 두 아들 상건과 상곤, 딸 하나를 둔다. 큰아들 상건은 선조 대의 왕세자를 모시다가 부친과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 투신한다. 둘째 아들 상곤은 부친과 형의 초상(初喪)을 치른 다음 해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부자의 삶이 장엄했지만, 슬픈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딸은 송강 정철의 셋째아들에게 시집갔으니, 김천일과 정철은 사돈이 된다. 청년 시절 김천일의 모습은 하서 김인후의 다음 평가가 참조된다. 21살 김천일이 장성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고 있던 하서 김인후 선생을 찾아간다. 하서는 "사물의 실제 이치를 터득한 선비를 남쪽 고을에서 보기는 이 사람(김천일)이 처음이다"라며 극찬했고, 작별할 때 두 수의 시를 지어 격려하고 있다. 후일 하서는 호남인으로는 유일하게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배향된다. 이해 김천일은 생원초시에 합격한다. 최고의 목민관이 되다 31살이던 선조 원년(1568) 미암 유희춘이 조정에 유일(遺逸, 아직 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유능한 사람)로 천거하자, 유희춘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내어 간곡히 사양한다. 그리고 36살이 되던 선조 5년(1572)까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는 37세 되던 선조 6년(1573) 관직에 나아간다.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사람"으로 천거되어 종6품직인 군기시 주부에 제수되었기 때문이다. 군기시는 조선시대 병기와 군기(軍旗) 등을 맡았던 관아였다. 그리고 그해 용안현감에 제수된다. 용안현은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그는 3년간 용안현감으로 재직했는데, 재직 중 최고의 목민관이었다. 이는 선조가 "지금 군의 치적 중에 어디가 제일이냐?"고 묻자, 이조(吏曹)가 "여주목사 황림, 해주목사 이린, 용안현감 김천일"이라고 답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어 강원도사, 경상도사에 이어 42세 된 선조 11년(1578)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과 임실현감에 제수되었다가 순창군수, 담양부사, 한성부서윤을 연이어 제수받았고, 마지막 받은 관직이 수원부사였다. 수원부사 시절 그는 중앙과 결탁한 부호들에 대한 잘못된 세금 및 부역(賦役)을 바로 잡으려고 애쓰다 오히려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만다. 올곧은 목민관의 뜻이 지역의 힘센 부호들에 의해 꺾인 셈이다. 그가 고향 나주에서 임진왜란의 비보를 들은 이유이기도 했다. 호남 최초의 의병장이 되다 그는 임금이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목 놓아 통곡한다. 그리고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 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신하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라며 거의를 결심한다. 6월 3일, 김천일은 나주에서 양산숙 등과 함께 300여 의병을 모아 나주 금성관에서 피로 맹세한 후 북상길에 오른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었고,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6월 23일, 수원에 도착한 후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금령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린다. 8월, 강화도로 진을 옮긴 후에도 양화도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다. 이때 의주 행재소의 선조는 그에게 장례원 판결사를 제수하고 창의사(倡義使)라는 특별 직함을 내린다. 그가 임진왜란 중 창의사란 호칭으로 불린 이유다. 1593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평양을 탈환하고 개성에 이르러 서울을 공략하려 하자, 막하 부하를 시켜 경성의 형세, 도로 사정, 적의 허실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알린다. 그는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양화대교 근처의 선유봉(仙遊峯, 양화대교 공사로 사라짐)에 주둔하면서 서울 공략에 큰 공을 세운다. 이여송은 "창의사(김천일)는 명실(名實)이 서로 상부(相符)한 명장이다"라고 칭찬한다.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른다. 이때 명·일 강화가 추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하한 왜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하여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2차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는 명을 내렸고, 도원수 권율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마저도 진주를 떠나고 만다. 조정의 반대와 경상도 출신 의병장 곽재우마저 포기한 진주성에 들어간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호남이 근본이 되고, 호남은 진주에 가까우니,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다. 진주성을 비우고 적을 피하여 왜적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계책이 아니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김천일이 6월 14일, 3백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자 최경회·고종후·황진 등 호남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뒤를 따른다. 진주 남강에 투신하다 왜군 10여만 명과 호남 의병이 주축이 된 수성군 4천여 명과의 싸움은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지만, 김천일은 민·관군의 주장인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어 10만에 가까운 왜적을 9일간이나 막아 낸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과 함께 북쪽의 임금을 향해 4배를 올린 후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김천일은 그를 부축하던 종사관 양산숙에게 "너는 이 사태를 모면하였다가 힘써 저 원수들의 섬멸을 도모하라" 하였지만, 양산숙은 "정의에 따라 나 혼자 살 수는 없다"며 함께 몸을 던진다. 광주 출신 고종후,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도 함께였다. 진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김천일·최경회·고종후를 '진주성 3장수'라 부른다. 진주성 함락 소식을 접한 둘째 아들 상곤이 진주성에 도착한 것은 두어 달이 지난 그해 9월이었다. 상곤은 촉석루로 달려가 부친의 유품을 거둔 후 나주시 삼영동의 내영산(양성이씨 선산) 언덕에 장사지낸다. 형 상건도 함께였다. 그러나 두 분의 무덤은 시신 없이 두 분의 혼을 불러 장례하고 만든 무덤 초혼장묘(招魂葬墓)다. 김천일은 사후 선조 36년(1603)에 좌찬성, 광해군 10년(1618)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다. 그리고 숙종 7년(1681)에는 '문열(文㤠)'이란 시호가 내린다. 시호 문열은 학문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셨다(勤學好問)'라는 뜻에서 '문(文)'을, '굳세게 이겨내고 왜적을 토벌하셨다(剛克爲伐)'라는 뜻에서 '열(烈)'을 취한 것이다. 선조 39년(1606), 나주시 월정봉 아래 사당을 짓자 조정은 정렬사(旌烈祠)라는 사액을 내린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84년 현재의 위치(대호동)에 재 건립하였다. 정렬사에는 함께 순국한 아들 상건과 종사관 양산숙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나주의 정렬사에는, 한 손은 불끈 쥐고 다른 한 손은 칼을 쥔 채 갑옷도 투구도 없이 나선 김천일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아래에는 "56세의 선비로 붓을 버리고 쾌자(맨소매 옷)만을 걸치고 투구 없는 맨머리로 앞장서니 선생의 충국에 큰 뜻을 따르는 의사가 많았다"는 글귀가 새겨 있다. 선조 40년(1607),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현장인 진주성 내에 건립된 창렬사(彰烈祠)와 순창의 화산서원, 정읍의 남고서원에도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64> 오월은 또 이렇게 왔능가
오월은 또 이렇게 왔다 싱그러운 계절이라지만 언제부턴가 잔인한 계절이라고도 부르는 오월이다 '민주의 성지'라 말하는 광주에 오는 외지인들에게는 세월은 자꾸 흘러서 오래 전 일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5.18 묘역이 참배의 차원을 넘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제 다소 식상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광주 시민들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오월이다 이어지는 정치인들의 들락거림에는 관심이 없고 오래 전에 구묘역에서 찍었던 사진들이라도 들춰보면서 그날의 함성과 울분을 되새기고 희생된 민주영령들을 추모한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지만 아니,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인가 아직도 못다 푼 숙제가 남아있고 악의 뿌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세월아, 그냥 가지 마라 사랑도 명예도 불태워버린 투사의 울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잔인한 적군의 시신까지 거든 바다의 오래된 신앙
"명량 전투가 끝난 뒤 임준영은 이틀 동안 작전 해역을 수색했다. 나는 임준영에게 전선 2척과 어선 5척, 그리고 군사 50명을 맡겼다. 임준영은 이틀 후 군사를 인솔하고 암태도로 돌아와 보고했다. 임준영은 떠다니는 적의 시체 2000여 구를 건져서 묻었다. 연안 갯벌 쪽으로 다가오는 시체만을 정리했고 원양으로 떠내려가는 시체는 수습하지 못했다." 김훈의 소설 중 일부다. 난중일기를 기초로 쓴 이 소설에는 많은 수사자(水死者)가 등장한다. 해전(海戰)이니 응당 물에 빠져 죽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 읽기가 난처할 만큼 섬뜩하고 잔인한 묘사가 이어진다. 전쟁 노획에 수급(首級)이 가장 중요하다. 아군과 적군의 목들이 잘리고 소금에 절여져 진상된다. 베어 얻은 수급을 다 감당하지 못하여서인지 코와 귀만을 잘라 전과를 계산하기도 한다. 이를 일본으로 우송하여 만든 것이 교토 호코지(方廣寺) 귀무덤(耳塚, 미미츠카)이다. 코도 함께 베었으므로 비총(鼻塚)이라고도 한다. 관련한 내용은 2019년 7월 18일자 본 지면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의 여기저기 수사자들을 거두어 묻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김훈의 상상력일까? 아니면 실제 있었던 일일까? 아마도 김훈은 진도 왜덕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라는 책을 쓸 때, 나는 진도 관련 자료들을 한 보따리 마련하여 그에게 준 일이 있다. 이후 연통한 바가 없어 그의 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이든 수상록이든 일정한 사실을 바탕삼아 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 에 나오는 수많은 수사자와 그 주검의 처리방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궁금증이 생긴다. 왜덕산은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시 진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적군이었던 왜군을 수습하여 매장해주었던 것일까? 설마 왜군을 특별하게 대우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왜덕산과 교토 코무덤 평화제 진도문화원 박주언 원장에 의하면 현재 진도군 군내면 왜덕산의 지명은 범덕산, 왜덕산, 왜덕전, 와덕산, 외덕산, 덕산 등이다. 한두 달 후 출판될 보고서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진도문화원으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정호 전 진도문화원장,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비롯해 나도 이 보고에 한 꼭지를 맡아 참여한다. 내가 맡은 분야는 수사나 익사에 대한 민속 관념 혹은 의례에 관한 것이다. 박주언 원장이 현재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6~70여 기의 묘지가 왜덕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창녕조씨 선산과 혼재되어 있어서 무명연고의 묘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와음을 감안한다 해도 족보의 주소가 한자 왜(倭)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와를 구웠던 지역이기에 와덕산(瓦德山)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다수의 묘지 주소를 무엇 때문에 왜덕(倭德)이라고 표기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박주언씨가 2004년 이라는 잡지에 기고하면서부터다. 2006년 일본인들이 왜덕산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지휘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현창 사업회 임원과 수도대 학생들이 그들이다. 왜덕산에 묻힌 이들이 자기 선조들이라고 생각해서다. 이후 박주언씨를 중심으로 진도에서 평화제라는 축제가 진행되었고 교토 코무덤 앞에서 같은 이름의 혼령제가 열리고 있다. 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코무덤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민남녀의 코와 귀를 베어가 모아둔 곳이다. 당초에는 귀무덤이라고 했다가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라 코무덤이라는 수식을 부가했다. 귀보다는 코가 더 섬뜩해 귀무덤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전언이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 갔다. 왜군 장수들은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고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도 조선인 12만 6000명의 코가 묻혀있다 한다. 교토뿐만이 아니라 몇 군데 코무덤을 더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토록 잔인했던 적군 왜병들의 시신을 거두어 진도의 동쪽 해안에 고이 묻어 주었다는 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혹시 어떤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는 아닐까? 그렇지 않다. 족보의 묘지 주소가 왜덕인 이유를 상고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덕산 사람들 곧 진도사람들은 멀리 교토의 코무덤까지 찾아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이 진도의 왜덕산을 방문하기도 한다. 코로나 여파로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해마다 9월에 진행하는 이 행사는 명량의 바다에서 연행했던 평화제의 확장이기도 하다. 박주언씨가 오랫동안 연행해온 진도평화제라는 축제는 지금은 없어져 명량해전축제로 탈바꿈해버렸지만 원혼을 달랜다는 의미만큼은 여전하다. 적군의 시신들을 거두고 매장해준 왜덕산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여기에는 피아를 굳이 나누지 않고 위령한다는 바다 사람들의 심성이 깃들어 있다. 왜군이어서가 아니고, 왜군이어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매우 오래된 신앙이자 민속 관념 말이다. 민속학자들은 물속의 원혼이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기방어의례로 해석하곤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이를 인류가 지닌 박애 정신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간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사례라는 점도 부기해둔다. 쿄토의 코무덤과 진도의 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법이 더욱 긴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남도인문학팁 수사자(水死者)에 대한 바다 사람들의 생각 물에서 죽은 것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적어도 음양관을 철학의 기저로 두는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인 정서이고 감성이다. 나는 이를 졸고, 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이를 다시 졸저, (민속원, 2018)에서 풀어 썼다. 비혼 청춘 남녀의 동반 수사(水死) 사건을 사례로 그들에 대한 '혼건짐 씻김굿'과 '망자혼사굿'을 통해 뭍과 물의 대칭성, 남과 여의 대칭성, 나아가 자연과 인류의 대칭성 등을 톺아보고자 했던 글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죽음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바꾸는 방식, 물에 빠져 죽은 이를 대하는 초혼제(招魂祭), 수륙재(水陸齋), 위안제(慰安祭), 여제(癘祭) 등이 그 사례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온 국민이 분노했던 이유도 이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심리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것이 수사자에게만 해당되며 혹은 개별적이거나 집단 간의 일에만 국한되겠는가? 전쟁의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한 가닥 피어오르는 싹이라고나 할까. 진도의 왜덕산을 보다 슬기롭게 바라볼 필요는, 그간의 수사자에 대한 민속적 관념이나 신앙의 태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교토의 코무덤 위령제를 매개로 한국의 변방 진도의 왜덕산이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를 소망한다. 전후좌우 갈등과 이념과 심지어 전쟁을 뛰어넘는 우리의 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산과 강이 어우러진 배산임수 전형적 지형
김응문 장군 일가 현창비가 세워졌다. 김응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무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제막식은 위령제, 진군식, 현창비 제막식, 진혼무, 마당극 순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5월 11일․황토현 전승일)을 앞둔 지난 5월 4일 무안 차뫼마을에서다. 김응문(1849∼1894)은 '김창구'로도 불렸다. 몽탄 일대의 접주로 활동하며, 전투 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집에 대장간을 설치하고, 갖가지 무기도 만들었다. 마을주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김응문은 농민군을 모아 백산전투, 황룡강전투 등에 참가했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뒤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11월 같은 무안 출신의 배상옥과 함께 나주성 공격을 위한 고막포 전투를 펼쳤다. 하지만 농민군은 민종렬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패하고 만다. 중과부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막포 전투에 참가한 농민군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농민군은 무안과 함평, 나주, 해남 등지의 농민들로 이뤄졌다. 고막포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은 대대적인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다. 그때 무안에서 붙잡힌 동학 접주만도 70여 명에 이른다. 김응문은 12월 9일 일본군에 붙잡혀 목이 베어졌다. 막내동생 김자문(김덕구․1868∼1894)과 큰아들 김여정(김우신․1867∼1894)도 함께 붙잡혔다. 큰동생 김효문(김영구․1851∼1894)은 12일에 체포됐다. 나흘 사이에 일가족 네 명이 모두 효수(梟首)된 것이다. 김응문 집안에서는 이들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김응문의 머리만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참수된 머리를 항아리에 넣고 봉명리 앞산 둔덕에 '애기무덤' 형태로 몰래 묻었다고 전해진다. 김응문의 세 형제와 부자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현창비는 김응문 일가를 기리는 추모비다. '아!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이 서려 있는 곳. 무안 차뫼마을 옥녀봉 아래 터다. 갑오년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어 농민군을 이끌던 무안 동학 지도자 김응문 형제와 자제가 태어난 곳. 그해 내내 백산으로, 전주로, 서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렬하게 처형된 농민군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장소다.' 현창비에 새겨진 비문의 시작 부분이다. 현창비 제막에 앞서 지난 4월 김응문의 유골이 확인됐다. 문중에서 묘를 옮기려고 그의 무덤을 파서 본 결과, 머리 부분 유골이 고스란히 기왓장으로 덮여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유골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기록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일본군의 만행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동학농민혁명 때 희생된 농민군 가운데 유골이 발견된 건 처음입니다. 재판을 하지도 않고, 그것도 목을 잘라 효수를 한 일본군의 만행이 사실로 확인된 겁니다.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제막식에 참석한 박석면 무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말이었다.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선조들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히 높다. 도로변 당산나무 옆에 세워진 김응문 일가 현창비 외에도 마을경로당 앞에 '동학혁명투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1996년에 세운 비석에는 김응문 일가를 비롯한 동학농민군과 항일의병장 김용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용길은 무안 일로에 있던 일본 헌병대를 습격해 불을 지르다가 붙잡혔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까지 마을에서 해마다 추모제도 올렸다고 한다. 마을과 마을사람들의 큰 자긍심이 두 기의 현창비를 통해 묻어난다. 불굴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을 낸 차뫼마을은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에 속한다. 사창리 밀리터리테마파크에서 몽탄면 소재지로 가는 길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편으로 서해안고속국도가 지나고 있다. 옥녀봉과 연증산이 차뫼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 저만치 영산강이 흐른다. 도로 건너편의 들판 사이로 내(川)가 흐르고 있다. 배산임수의 지형 그대로다. 오래 전엔 냇가를 따라 아름드리 팽나무가 즐비해 마을의 경관이 더욱 돋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 베어지고,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차뫼는 뒷산에 차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차나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동학 접주 김응문의 호가 '다사(茶史)'였다. 그의 아버지 김광수의 호는 '다은(茶隱)'이었다. 차나무를 많이 재배했거나, 최소한 차를 가까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차뫼는 나주 김씨의 오래된 집성촌이다. 주변 산이 대부분 나주 김씨의 선산이라고 한다. 광주목사를 지낸 취암 김적(1507∼1579)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용무․김용현 형제도 이 마을 출신이다. 김용무는 미군정기 대법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을에 김용무 생가가 있다. 본디 10칸이 넘는 큰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예전의 당당함을 엿볼 수 없다. 덧없는 세월이 묻어난다. 마을에 소를 키우는 축사가 많이 보인다. 논밭에는 소한테 먹일 풀이 베어져 널려있다. 연녹색의 사료용 풀이 푸른 산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낸다. 적막하던 차뫼마을의 봄날 풍경을 활력으로 채워준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장단은 리듬의 패턴… 시간 흐름 따라 직조된 씨줄
일군의 농악대가 한 집에 이르렀다. 집주인은 안쪽에서 맞이하고 농악대는 바깥쪽에서 연주한다. 4/3박자 리듬이다. 구음보(口音譜)로 적어보니 '깽매 깽매 구갱깽/ 구갱매 깽매 구갱깽'이다.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농악대원들 모두 합창하여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쥔 쥔 문여소/ 어서어서 문여소'라 한다. 쥔장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임을 알 수 있다. 꽹과리와 더불어 울리는 악기의 리듬 패턴이 이 요청의 말과 합일하여 공명(共鳴)한다. 이를 '문굿'이라 한다. 마당에 들어선 농악대가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샘이다. 문굿 보다는 더 느린 템포로 연주한다. 구음보로 적어보니 '깽매 깽매 구갱깽/ 구갱매 깽매 구갱깽'이다. 마찬가지로 합창하여 노래한다. '어따 그샘물 잘난다/ 얼떡벌떡 잡수쇼/ 아들낳고 딸낳고/ 미역국에 밥한술!'. 샘물 잘 나라는 기원의 말을 꽹과리며 장구며 북 등의 악기로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리듬 패턴의 첫머리에는 징을 쳐서 단위를 구분한다. 징 치는 개수를 따져 일채, 이채, 삼채, 오채 등으로 부른다. '채'는 한자말 '차(次)'에서 온 말이다. 일정한 순서(차례)라는 함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리듬 패턴들이 모두 사람의 말이나 노래에 따라 규율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문의 말과 몸짓과 절차와 혹은 오랜 역사 동안 체화되어 온 생래적 리듬이며 강박적 이데올로기들이 다층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고 재구성된 결과들이다. 통칭하여 장단(長短)이라 한다. 장단과 선율, 씨줄과 날줄의 직조 농악에만 장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모두 이 장단이라는 리듬 단위로 설명할 수 있다. 궁중음악에서부터 무속음악, 춤음악은 물론 노래와 몸짓 혹은 호흡과 절차의 층위들이 포괄된다. 지역별, 기능별, 형태별, 소요 악기별 등 천차만별의 구분법이 있다. 이 단위들을 분리하거나 중첩시켜 생성하는 것이 음악이다. 선율과 장단이 그 중심이다. 선율은 소리의 높낮이를 말하고 장단은 리듬의 패턴을 말한다. 선율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서 위로 직조된 날줄이고 장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직조된 씨줄이다. 의문이 든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일정한 리듬 패턴을 장단(長短)이라는 이름으로 의미화시키는 이유 말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에서 리듬적 특징을 지시하는 용어 중 장단만큼 중요한 게 없다. 하지만 개념 정의나 형식의 분석이 명료하지 않다. 수백명의 학자 혹은 활동가들이 장단에 대해 연구했고 수천개의 결과물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학자들이 쓸데없는 연구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만큼 장단 생성과 파생의 경로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아쉬운 것은 각양의 음악 장단 연구 중 어의적 의미를 톺아본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선율적 특성의 연구에 비하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 음악의 특성이 장단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장단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혹은 철학적 의미망에 대해 천착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리 전통음악의 장단체계를 비교적 내밀하게 분석했던 이보형은, 리듬 문제가 선율의 문제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선입견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는 장단 자체의 난삽하고 애매한 특성에 기인한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기원의 말과 노래와 몸짓과 혹은 그 어떤 음악적 행위들을 일정한 리듬 패턴으로 묶는 것이 선율의 문제란 말인가? 왜 일정한 리듬 패턴을 장단(長短)이라는 이름으로 범주화시켰을까? 남도무속음악의 대가였던 박병천은 굿거리 장단을 설명할 때 늘 '애기어깨걸이'를 강조한다. 구음보로 말하면, '덩기덕 궁 더러러/ 기덕덕기덕 궁 더러러'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장단이 물린다'고 한다. 장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앞의 4/3박자는 강하게 뒤의 4/3박자는 약하게 구성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남도굿거리 장단의 기본이다. 이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 리듬을 '애기어깨걸이'라 한다. 음양(陰陽)이니 대삼소삼(大三小三)이니 혹은 고저장단(高低長短)이니 쌍편고요(雙鞭鼓搖)니 하는 따위가 다 같은 말들이다. 이것을 확장해 말하면 판소리의 어단성장(語短聲長)으로 연결된다. 말은 짧게 하고 소리(노래)는 길게 하라는 뜻이다. 일종의 개념 정의다. 판소리가 아니리(창을 하는 중간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이 엮어나가는 사설)와 소리(唱)라는 기본 구성을 갖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리듬 패턴의 중심에 장단(長短)이라는 어의(語義)가 있다. 본래의 말뜻은 '길고 짧다'는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이라는 함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긴 것'과 '긴 것'이나 '짧은 것'과 '짧은 것'의 반복은 장단이 아니다. '음'과 '양'이요 '남자'와 '여자'요 '대삼'과 '소삼'이어야 장단이다.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가장 적절한 예가 '엇모리 장단'이다. 서양음악의 어법으로 말하면 2박과 3박을 뒤섞어 10박을 만드는 리듬 패턴이다. 2박과 3박은 분명히 길이가 다른데 동일한 음가(音價)로 받아들인다. 궁중음악뿐 아니라 농악과 정악의 수많은 혼소박 장단들이 이런 구성을 취한다. 그래서 이보형이 정리한 바에 따라 우리 음악의 특성을 분박(음을 쪼개는 방식)이 아니라 소박(음을 쌓아올리는 방식)이라고들 한다. 왜 다른 것을 같다고 이해하는 것일까?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장단에 남은 이데올로기의 결과들은 소멸의 경로를 밟을 것이다. 주역에서는 대대성이라 하고 인류학에서는 대칭성이라 한다. 이를 율려의 철학으로 풀이했던 이가 근자에 명을 달리한 시인 김지하다. 율려(律呂)는 전통음악의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에서 차용한 개념이긴 하지만, 판소리의 '흰그늘론' 등으로 확장한 의미망이기도 하다. 선율도 중요하지만 우리 음악의 큰 장점은 장단(長短)에 있다. 판소리도 장단의 발전과 더불어 재구성된 장르다. 이를 허투루 여기거나 귀찮아하거나 혹은 업신여겨 말살하는 것은 뿌리와 근본을 버리자는 말과 같다. 남도인문학팁 교과서에서 국악을 없앤다는 소문에 대하여 지게장단이란 말이 있다. 지겟작대기로 지게 동발을 치면서 맞추는 장단이다. 쪼빡장단이란 말이 있다. 옹기(물동이)에 물을 절반쯤 채운 후 바가지를 엎어놓고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물허벅장단이라 한다. 너무 지역적이고 촌스러운 이름이어서 부끄럽게 여겨지는가? 여기에서 남도소리의 뿌리 중 하나인 '둥당애타령'이 나왔는데도 말이다. 남도의 흥그레타령에서 여섯박자 육자배기 장단이 나왔고 판소리의 진양조 장단으로 발전했다. 무수한 장단의 이름들이 있다. 서로 다르니 불규칙적이라 한다. 너무 많으니 혼란스럽다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같다고 여기는 철학적 함의 말이다. 궁중음악이 그렇고 농악이 그러하며 세계적으로 지평을 넓힌 사물놀이가 그렇다. 우리 음악의 힘은 이 다종다양한 생성의 경로와 파생의 길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우리 고유의 장단이나 국악을 어떤 규칙 예컨대 국제표준이나 서양음악에 맞춰 통일시키려 하는 발상은 큰 문제가 있다. 이용식의 주장처럼 연주자의 내관적(emic)인식과 학자들의 외관적(etic) 인식의 구별짓기를 해체할 필요는 있지만, 장단을 비롯한 국악을 통째로 무시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고향말 없애고 표준말만 쓰거나, 한국말 없애고 영어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같기 때문이다.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6> "시간은 모든 존재를 탄생시키고 소멸시킨다"
'꿈'이 만들어낸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룻밤 머물러 보는 것은 어떨까. 아프리카 코끼리 부대가 달리고 코끼리의 조상인 워렌 마스토돈(Warren Mastodon)이 진흙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높이 15m인 바로사우로스(Barosaurus)가 발밑에 있는 어린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천적인 알로사우루스와 한 판 승부를 벌이는가 하면 에서 보던 4.5m 높이에 15m 길이인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육식 공룡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가 먹잇감을 찾기 위해 눈을 희붐하며 활보하는 그런 곳? 이것이 좀 시시하다면 '인도의 별'이라 불리는 563캐럿의 사파이어나 31톤에 달하는 세계 최대 운석 아니하이트를 찾아나서는 모험이라면? 우주 대폭발(빅 뱅)이나 지진이 일어난다면? 정말 그런 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가 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어린이라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미국 뉴욕주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자연사박물관은 6~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오후 5시 45분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한 달에 한 번 각종 모험을 즐길 수 있는 투어를 운영한다. 그 이름은 'A Night the Museum Sleepover'. 관람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 새로운 시간이 펼쳐지는 곳. 죽어있던 것들이 살아나는,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와 현상을 만나고 접할 수 있는 곳. 영화 가 괜히 스크린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미국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본다면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은 영어의 'museum of natural history'를 번역한 말 그대로 '자연에 대한 박물관'이라는 뜻이다. 'history'는 역사라는 뜻뿐 아니라 지식, 기록, 이야기, 경험, 탐구 등을 함축적으로 뜻하기 때문에, 자연사 박물관은 '자연의 역사'를 넘어 자연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를 다루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연간 3백만 명이 찾는다는 미국자연사박물관은 자연 서식지와 동식물의 생태를 보여주는 입체 및 실물 모형 제작과 현지 탐사 장면의 전시 분야를 개척한 박물관으로도 꼽힌다.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부친인 테오도르 루스벨트 시니어(Theodore Roosevelt Sr., 1831~1878)와 금융가 J.P.모건 등 20인이 함께 자연과학의 연구·지식 보급과 진보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1869년 4월 6일에 설립하였다. 실은 한 자연과학자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앨버트 빅모어(Dr. Albert S. Bickmore)는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부터 뉴욕에 자연사 박물관을 설립하자고 수년간 줄기차게 로비했고 마침내 루스벨트 등 유력 후원자들과 함께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시간의 거대함 미리 인터넷에서 기본 관람 외에 특별관과 쇼까지 모두 예매한 나는 하루 일정을 잡고 '캐슬(castle)'이라고 불리는 고딕양식 박물관으로 입장했다. 자연사 박물관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이곳은 실제로 하루를 다 투자해도 부족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실내 지도는 필수다. 종이 지도 대신 스마트폰에 디지털 지도를 다운 받아 놓았지만 입장하자마자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승강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제일 인기가 높은 공룡 전시실부터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입구부터서 길이 12m, 높이 6m의 공룡이 입 벌리고 발 올리며 나를 맞아주었다. 실은 나는 공룡에 대한 호기심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한때 이 세상을 지배했던, 거대한 그들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고고학자의 손을 거쳐 뼛조각들이 제 형체를 완성해가면서 빛나는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지만 역시나 시간 앞에서는 모든 존재가 동등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시간은 모든 존재를 탄생시키고 소멸시킨다. 아니 소멸된 것을 다시 소생시킨다. 어떠한 존재이든 차별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부여하지만 그 시간은 일정하다. 다음 존재에게도 그 만큼의 시간을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한때 욕망으로 빛났던 인간들.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어떠한 존재들이 이들의 흔적을 복원해줄까.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 또한 인간적인 욕망일까. 나는 시간을 거슬러 1만 1000년 전에 살았던 맘모스 앞에 선다. 맘모스의 거대함 앞에서 시간의 거대함을 본다. 너무 거대해서 무한하며 무한하기에 되레 무의미할 정도이다. 무의미와 무관하다는 듯한 힘찬 내 발걸음은 3층 모아이 석상 옆에서 오랫동안 머문다. 2층 포유류관 아프리카 코끼리 부대 앞에서는 이들의 질주하고픈 심박동을 느끼며 1층 천장에 매달려 있는 28.65m에 달하는 푸른 고래 아래에서는 등지느러미로 물살을 가르고픈 고래의 꿈을 꾼다. 마침내 플라네타리움 상영관에 앉아서 를 볼 때에는 돔으로 된 천장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별들이 나를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드디어 내가 우주와 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애초부터 한 몸이었다고 지나가는 말투로 내 속의 내가 말을 건다.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한말 근대교육의 선구자, 춘강 고정주
규장각 직각을 박차고 낙향하다 임진왜란 당시 담양에서 거병했던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부친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다. 그리고 학봉의 5남매(4남 1여)가 맡겨진 곳이 외가였던 창평이었다. 외조부모는 사고무친의 외손들을 따뜻하게 보살핀다.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세거(世居)하게 된 이유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 주권을 상실한다.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론(自强論)이 등장했다.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과 투쟁을 통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무장투쟁론이다. 이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일어섰다. 바로 한말 의병이다. 학봉의 후손들도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자 목숨을 걸었다. 학봉 11대 사손(祀孫, 봉사손)이던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가 새겨진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가국지수(家國之讐)'의 깃발을 든다. 의병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학봉의 10대손인 춘강 고정주(高鼎柱, 1863~1933)는 녹천 고광순과는 생각이 달랐다. "화승총 몇 정으로 어떻게 일제와 맞설 수 있겠는가"라며 영학숙에 이어 창흥의숙을 건립, 인재를 키운다. 자강론이었다. 1907년 남원성 출정을 앞둔 녹천이 은밀히 춘강을 찾는다. "이 난세에 자손 하나는 선대의 유업을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춘강은 "광(곳간) 고리를 끌러(열어)두겠소"라고 답한다. 춘강은 의병투쟁에 직접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 취지를 이해하고 협조했다. 둘의 주권 회복 방식을 달랐지만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충(忠, 사랑)은 같았다. 자강론자였던 고정주, 그는 철종 14년(1863)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에서 고제두와 전주 이씨 사이에 태어나 5살 때 큰아버지 고제승의 양자로 들어간다. 189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고종은 "고경명이 그대의 몇 대 선조인가?"라고 묻고는 선물을 내리기도 했다. 1905년 규장각 직각(直閣) 겸 황자전독(皇子典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비서감승(秘書監丞, 승정원 승지의 후신, 정3품 당상관)이 된다. 규장각 직각은 오늘 국립도서관장 쯤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정주를 '고직각'이라고 불렀다. 직각의 임무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서적과 왕실 문서들을 관리하는 일이었고, 황자전독은 왕자에게 각종 경전을 가르치는 자리였으니 의친왕 이강(李堈·1877~1955)의 스승인 셈이다. 마지막 관직이 비서감승이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한 셈이다. 이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요지는 "조약을 맺은 부신들은 매국적입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종사를 위해 죽겠다는 뜻을 견고히 지켜 강제로 조인된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조인한 적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그들에게 붙은 놈들을 모두 배척하고 시무를 알고 절의가 높은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길 바랍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창평에 낙향한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교육 운동이었다. 주권을 잃었지만 나라를 되찾을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영학숙을 건립하다 1906년 4월 춘강은 월봉산 자락의 상월정(上月亭)에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한다. 사위 김성수와 아들 광준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학숙의 이름 '영학숙'의 '영'은 아예 영어(英語)의 '영'자였다. 당시 본격적인 학문을 하려면 상하이나 도쿄로 유학해야 했고, 그러자면 국내에서 영어의 기초를 어느 정도는 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학숙을 설립한 후 이표라는 사람을 서울에서 특별 초청하였는데, 그는 영어와 일어, 한문과 산술에 능통한 교사였다. 개원 초기의 학생은 둘째아들 고광준과 사위 인촌 김성수 두 사람이었다. 전북 고창 출신인 인촌은 13살이던 1903년, 다섯 살이 많은 고정주의 딸 고광석과 결혼한다. 김성수는 후일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경성방직 및 동아일보를 설립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을 인수하여 교장이 된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호남 최초로 세워진 영어 학교는 곧장 소문이 난다. 근동에서 유능한 젊은 청년들이 모여든다. 고하 송진우(宋鎭禹, 1890~1945)도 그 중 한 명이다. 송진우가 영학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송훈과 고정주가 절친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찍이 송진우는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이 된 의병장 기삼연의 제자였다. 1896년 장성에서의 거병이 실패하자 담양 송씨 문중의 식객이 되었고, 6살이던 송진우를 4년간 가르친다. 고하(古下)라는 그의 호도 기삼연이 지어준다. 고비산 밑에서 낳았으니 고비산처럼 꿋꿋하게 살라는 뜻에서였다. 송진우는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다. 이어 장성 출신의 김시중, 영암 출신의 현준호가 입학한다. 김시중은 후일 장성에서 신간회 활동 및 노동운동에 헌신하였고, 현준호는 호남은행을 설립하는 등 큰 기업인이 된다. 마지막 학생은 장성 출신 김인수였다. 영학숙은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6명의 학생에 그쳤지만, 김성수·송진우·현준호·김시중 등은 한국 근·현대사의 거목이 된다. 딱 1년 개설된 영학숙이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서 묵직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창흥의숙 교장이 되다 영학숙은 1908년 근대적인 커리큘럼을 가진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발전한다. 창흥의숙은 처음에는 창평 객사 용주관(龍注館)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개교 당시 수업연한은 4년이었고, 각 마을에서 매년 1명씩 추천받은 학생만 입학하였다. 초기 10여 명의 학생만이 입학했던 이유다. 1911년 창평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으며, 1919년부터는 여학생의 입학이 허용되어 처음으로 3명의 여학생이 입학한다. 1923년 6년제로 수업연한이 연장된다. 지금의 창평초등학교다. 춘강이 창흥의숙을 열었을 당시에는 학생이 부족하였다. 학교에 오려면 단발하여야 했기 때문에 부모들이 이를 꺼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광순이 주도한 창평의병에 참여하다 순절한 집안의 경우 단발한다는 것은 쉽게 용납할 수 없었다. 창흥의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고, 점심도 무료로 제공하였다. 교장이 된 만석꾼 춘강이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였기 때문이다. 만여 명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한 창평초등학교 출신의 인재도 즐비하다. 영학숙 출신인 김성수, 송진우와 창흥의숙 출신인 김병로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고윤석,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낸 고중석, 무등양말 창업자 고일석은 춘강 고정주의 친척들이다. 이중 고일석은 창평고등학교와 창평중학교를 설립한다. 인재 양성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창평초교 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분은 고씨들 만은 아니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기,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낸 이승기, 고창고보 창설자 양태승 등도 다 창평초교 출신들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다 국내로 잠입해 친일파 암살 기도로 체포된 후 10년형을 선고받은 이병욱과 옥중에서 옥사한 이병묵 형제도, 이회창 전 총리의 외삼촌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 3형제도 다 창평초교 출신이다. 이런 인재들이 시골인 창평에서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춘강 고정주가 교육에 쏟아부은 정성 때문이었다. 그를 기리는 흉상이 창평초등학교 100년 역사관에 건립된 이유다. 춘강 고정주가 태어난 창평 삼지내 마을은 2007년 우리나라 최초로 슬로우시티에 지정된 마을로,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관광객이 자주 찾는 관광 명소다. 그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솟을대문 집이 있다. 고정주의 집이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궁궐 같은 본채 건물은 폐허의 모습으로 흉가처럼 남아 있었다. 보기에도 민망했다. 그가 세운 창흥의숙은 오늘 창평초등학교다. 학교 건물 앞에는 1980년 세운 '昌興義塾(창흥의숙)이라 새긴 기념비가 서 있고, 학교 건물 본관의 벽면에 '창평초등학교가 만들어지기까지'라는 게시판에 춘강의 흉상 사진과 함께 업적이 새겨져 있다. 역사관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그의 흉상이 서 있다. 그가 처음 영학숙을 열었던 상월정은 월봉산 자락에 위치한 용운저수지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정형에 얽매이지 않는 '허튼 가락' 산조
우리 음악을 크게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으로 나눈다면, 민속음악은 다시 성악과 기악으로 나눌 수 있다. 성악(聲樂)은 사람의 음성으로 하는 음악을 말한다. 악곡의 종류에 따라서 판소리 등의 창가, 민요, 가요, 가곡, 기타 따위로 구분한다. 연주 형태에 따라서는 독창, 중창, 합창, 제창, 기타 등으로 나누고 기능에 따라서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 놀면서 부르는 노래, 종교적인 제의에서 사용하는 노래, 기타 등으로 구분한다.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악기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한 음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기악(器樂)은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연주자의 수에 따라 독주, 중주, 합주 등으로 나누고 표현 형식에 따라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실내악곡 등으로 나눈다. 우리 민요의 가창 방식 즉, 혼자 부르는 노래, 여럿이 부르는 노래, 돌려가며 부르는 노래,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 등에 대입해보면, 악기 연주 또한 유사한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산조(散調)란 기악 독주곡을 말한다. 악기 하나를 가지고 연주하는 형태라는 뜻이다.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에서 발달하였다 하고,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아쟁의 순서로 발생하였다 했다. 또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배열된 3~6개 장단 구성의 악장으로 구분되며 반드시 장구 반주가 따른다고 했다. 하지만 다양한 산조의 기원설을 전제하거나, 판소리 소리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예들을 보면 '반드시'라는 수식으로 완성되는 장르나 개념은 아니다. 대개 그렇게 발생했고 그렇게 연주되니 그러한 것을 표본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산조(散調)의 우리말은 '허튼가락'이다. 산조의 기원을 시나위니 봉장취니 판소리의 선율을 악기로 표현한 것이느니 하는 얘기들이 여기서 나왔다. '허튼가락', 산조(散調)는 어디서 왔을까? '허튼가락'의 문자적 함의는 '정형적이지 않은', '흩어져 있는', '자유분방한', '율격에 얽매이지 않는'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 장르에 산조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정형적이지 않고 흩어져 있는 어떤 음악의 형태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산조라는 용어에 가장 근접한 기원설 중 하나가 시나위이다. 악기들이 어울려 서로 연주하는데,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하는 듯하지만 절묘한 화성을 이룬다 해서 여러 기원설을 들어 설명하곤 한다. 그 바탕이나 기원이 무속음악인 점은 분명해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정악에 상대하는 향악(俗樂) 혹은 굿거리, 살풀이 따위의 무속음악이라고 풀이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남부, 충청도 서부,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 등지의 무가 반주 음악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시나위 자체가 육자배기 특징으로 된 산조의 기악곡을 말하기 때문에, 민요의 사례에 견주어 말한다면 육자배기토리로 권역화된 전라도지역의 무속음악, 다른 말로 하면 남도씻김굿 등이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조라는 음악의 기원이 시나위로 대표되는 남도 무속음악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심방곡(心方曲) 혹은 신방곡(神房曲)기원설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방곡(신방곡)은 무속음악의 반주 음악과 다르다. 1610년 거문고 악보인 에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 중의 중대엽에 속칭 '심방곡'이 나온다.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오나리 오나리소서 뫼일에 오나리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르시고....'라는 가사가 그것이다. 또 안민영의 (1885)에 '창원 기녀에게 가야금 신방곡을 청해 들었다'는 기록과 '퉁소 신방곡'이 언급되고 있다. 무속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으로부터 산조가 발생했다는 증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유력하게 대두되었던 것이 판소리 기악화론이다. 판소리의 선율이나 장단을 모사하여 악기로 연주했다는 뜻이다. 판소리의 역사가 산조의 역사보다는 훨씬 오래되었으니 시대의 예술로 급성장했던 판소리를 모본 삼아 악기로 연주했다는 가설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봉장취 기원설도 있다. 봉장취는 유랑예인들이었던 풍각쟁이들이 봉황 혹은 기러기 등의 새 한 쌍을 주제로 하여 음악을 곁들여 연행하는 일종의 재담 연주 혹은 그로부터 파생된 새소리를 주제로 하는 기악곡을 말한다. 봉장취는 '봉장추', '봉작취', '봉황곡' 등으로 불렸다. 판소리 에 '봉장추'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중국 한나라 이후 전해진 음악이라는데, '봉이 새끼를 거느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신재효의 에 따르면, 눈먼 '봉사'들이 구걸을 위해 연주하던 곡이었고 이것이 풍각쟁이들의 음악으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오로지' 혹은 '반드시'라는 수식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봉장취나 산조가 제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병행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계보론이나 지역론 특정 계파론 만으로는 산조의 기원이나 발생설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영암사람 김창조가 재구성한 초기 형태의 심방곡을 산조의 발생 시점으로 보는 견해는 아래 팁에 소개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대표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판소리의 기원설을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일정한 텍스트나 인물을 거론하고 예컨대 영산강의 시원을 말하는데 황룡강, 극락강, 지석강의 여러 물줄기 중 담양 용소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도인문학팁 가야금산조 발생과 영암사람 악성(樂聖) 김창조 함화진(咸和鎭, 1884~1948, 일제강점기 아악사)의 (1948)에 보면, "신방초는 화초사거리를 창작하고 김창조는 심방곡을 변작(變作)하여 산조를 창작할새, 우조와 계면조로 분류하여 각종 악기에 탄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김창조가 가야금으로 현재의 산조라는 음악을 재구성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의 형태는 지금의 산조형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유분방한 초기 형태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가 19세기 중반 무렵에 심방곡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는 안민영의 (1885)가 대표적이다. 권도희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심방곡의 명인이 경상도 마산포에 살던 최치학이었다.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로 전남의 김창조, 한숙구, 유성천, 전북의 박한용, 이영채, 박한순, 충청의 박팔괘와 심정순 등을 거론한다. 이들이 동시대의 음악 형식을 정형화하는데 충분히 기여했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후 김창조의 제자 한성기, 안기옥, 정남희, 강태홍, 최옥삼 등과 한숙구의 제자 한수동, 정남옥 등, 유성천의 제가 유대봉 등, 박한용의 제자 김삼태, 이영채의 제자 신관용, 박학순의 제자 신쾌동, 심정순의 제자 심상건 등과 더불어 김해선, 김운선, 함동정월 등 여성 산조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산조의 발생과 정형화에는 이같은 맥락들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김창조만이 산조를 재구성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김창조를 내세우는 것은 문헌들이 전하는 바를 전거하는 것이요, 시대적 수요에 부응했던 초기 기여자들의 대표격으로 거론하는 것이라는 점 부기해둔다. 김창조(1856~1919)의 출생설이 두 가지다. 1865년과 1856년설인데 여러 가지 맥락상 후자가 사실에 더 근접하다. 세습율객집안 출신으로 영암읍 회문리에서 출생했다. 1915년 경에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고 1916년부터 전주로 옮겨 군산, 나주, 정읍, 대구 등지에서 활동한다. 64세 되던 1919년 인후염에 걸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광주 북문안 어느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63> 변방에 뜬 달을 보다
나는 자주 여행을 떠난다 국내의 이곳저곳만이 아니라 물설고 낯설은 다른 나라의 깊숙한 곳도 마다하지 않고 무대포식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우리 인생 그 자체가 여행이지 않던가 몇몇의 지인들과 어울려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혼자서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다소 외롭기는 하지만 홀가분 그 자체가 보석이다 휴식을 위한 것, 단순 관광을 위한 것, 일을 위한 것, 아니면 죄를 짓고 도망을 치는 여행자까지도 그 순간만은 자유인이 되는 것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자는 행복한 것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가고 고원에서 만년설을 마주하고 잊혀져 가는 흔적에서 역사와 조우하다 보면 그 분위기 돋우며 눈길을 붙잡는 벗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변방에 뜬 달이다 오늘도 나는 떠날 채비를 한다 저 변방에 뜬 달이 부르기 때문이다
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30> 옛 국군병원…'5월광주' 조망하는 미래 현장으로
언제나 그렇듯, 푸르름이 짙은 5월이 시작되었다. 올해 2022년 5월은 무슨 일들이 있을지 기대가 되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광주에서 5월을 맞이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생각이 든다. 아직도 뉴스에서는 이 시기가 되면 '5·18 민주화운동 왜곡 대응' 관련 기사를 마주하게 된다. 42년의 간극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우리의 움직임은 어디를 향해있나 상념에 잠기곤 한다. 인도의 환경 운동가이자 작가인 '아룬다띠 로이(Arundhati Roy)' 가 무차별적인 국가의 강 유역 댐개발로 인해 매 말라가는 나르마다(Narmada) 강을 바라보며 "나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예술가가 아닌, 저 강이 원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간절함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시대적 상징성이자 예술(예술가)의 태도와 관점을 다양하게 응시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역사는 누구의 소명이나 상처라 명명할 수 없고, 기억은 누구의 책임이거나 의무가 될 수 없기에 우리의 역사와 기억은 삶, 그리고 존재 자체로 기억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80년 5월 처참한 희생과 항거 끝에 광주는 결국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아직까지도 5·18 진상문제가 우리 시대의 숙제로 남아있으나 역사적 증명과 사실은 확연하게 내려진 상태이다. 40년의 시간과 세월이 지나는 동안 광주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는 5월을 경험하고, 보아왔고, 기억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오늘까지도 직·간접적 공감을 통해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과거 독재정권에 대응했던 지난 시간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이 써내려간 현재의 촛불이자 시대의 정치·사회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오월의 광주, 정신'은 한국 사회문제 및 문화예술 현장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별 자유의지와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화까지도 다른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1980년 5월에서 오늘로, 역사적 사건에서 보편적 일상으로'를 주제로 기획된 전시⟪메이투데이(MaytoDay)⟫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재)광주비엔날레가 선보이는 다국적 특별전시 프로젝트였다. 전시회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5·18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민주주의 정신의 동시대성을 예술을 통해 탐색한다. 전시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유산들을 국제적인 맥락에서 재탐색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담론들이 생성되는 장을 형성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정치화되고 이념화된 편향적 시선에서 한 발짝 벗어나 5·18민주화운동의 숨겨진 의미와 가치를 현재의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시각으로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창립 이래 '광주 정신'을 세계에 알리며 동시대 예술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매김하였고,⟪메이투데이⟫전시를 통해 지난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비엔날레의 역사와 기록을 꺼내어 재조명하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으로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80년 5월의 광주와 질곡의 역사 혹은 현재를 관통하고 있는 해외 도시들을 전시 장소로 연결하여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 민주주의 담론과 관점들을 예술의 시각을 통해 제시한 것이다. 대만 타이베이, 한국 서울, 독일 쾰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총 4개의 도시에서 초청 큐레이터의 기획 아래 전시가 구성되었다. 각각의 전시들이 함의하고 있는 서사들은 이후 하나의 전시로 재편되어 광주를 거쳐, 현재는 이탈리아 베니스까지 '예술로 승화된 5월 정신'의 미학적으로 재해석된 전시가 진행 중이다. 작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구국군광주병원 옛 터에서 진행 된 전시 (공동 기획 이선, 임수영) 는 광주의 일상에서 격리되고 잊혀져 병원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병원을 찾아가 광주작가들과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1964년 개원한 구국군광주병원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한 학생과 시민이 치료를 받았던 군사병원(군병원)으로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로 등록되어 있지만, 2007년 함평으로 이전한 이후 '구 국군광주병원 옛터'로 불리우며 도심 속에 폐허처럼 남겨져 있었다. 지도나 네비게이션에도 잡히지 않는 이곳은 광주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으로,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었기에 자연적 동식물의 환경이 최적화 되어 있고, 지역민들은 흡사 '남도의 DMZ' 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근현대사 주요 사적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아카이브 기록되어 있고, 광주 5.18의 역사와 기억, 아픔과 치유, 폭력과 저항이 공존하는 장소이자 의료 공간으로써 구)국군광주병원은 각각의 서사에서 사유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주인공이자 내러이터(narrator)가 되기도 하며, 배경이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은 기념화 된 과거의 역사가 아닌, 오늘의 일상에서 다른 '가능한 역사(potential history)'를 상상해보고 말할 수 있게끔 한다. 그곳은 잊혀진 기억의 자리였으며 상흔이자, 피하고 싶은 과거였고, 풀어야하는 현재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구국군광주병원는 군사시설 특수성으로 인해 광주 시민으로부터 소외되어, 이후 광주시민의 일상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고 2018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션프로젝트(GB커미션)를 시작으로 일정 공간을 장소 특정 '전시장(exhibition hall)' 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후 2021년 동시대의 국제 현대미술작가들이 참여한 GB커미션 작업과 함께 전시는 이러한 병원의 일시적 개방에 동참하는 셈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립 트라우마센터'로 활용방안이 계획되어 있다. 지난 5.18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광주광역시는 '어린이 역사 교육관',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치료 공간', '기념공원'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구국군광주병원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 온 것인지 모른다. 2018년 5.18 기록관이 입수한 1980년 당시 현장을 기록한 촬영 영상은 국군광주병원에 실려 온 남자를 비롯한 어린이와 여성의 모습을 포착하며 5.18의 참상을 다시금 조명했고, 이후 밝혀진 전505부대 수사관의 증언으로 병원의 보일러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광주시민들의 시신 소각장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밝혀지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감히 떠올릴 수 없는 1980년 그토록 처참한 희생과 항거 끝에 광주는 민주주의를 얻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5.18 진상문제가 우리 시대의 숙제로 남아있으며 역사적 증명과 사실은 확연하게 내려진 상태임에도 그 숙제와 진실을 풀어야만 하는 신군부 중요 인물 5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면조사위원회가 직접 만나 조사하겠다고 통지한 인물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이희성, 정호용 5인이다.) 오월의 광주는 한국 사회문제 및 세계인류 문화예술 현장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각하며 전시 는 우리의 시선이 간과해 온 예술의 역사적 발생과 그 변화를 추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2021년 전시는 1980년 5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광주의 구국군광주병원이 마지막으로 예술가(예술)를 필요로 하는 시간임을 인지하고, 장소성과 역사가 창작자의 예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약 두달여 시간 동안 구현되어 종료 되었다. 지난 40여년의 시간 마주하지 못했거나 잊혀졌던 '5월의 광주'를 다시 조망하는 미래의 현장이자 사유로 기억되었으면 했다. 전시를 위해 기획자, 참여 작가 및 지원 담당자들은 도면, 화장실, 전기, 물도 나오지 않는 그 곳에서 매일, 매일 숨죽이며 역사적 상흔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애썼고, 기도하듯 작품들을 구상·배치하며 그 공간에 작은 염원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만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사유와 침묵의 틈 사이'가 희미한 윤곽으로 나마 기억되었길 바란다. 이선 광주 남구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마을 곳곳에 살아 숨쉬는 '충무공의 숨결'
여수는 이순신과 엮인다. 호남이 다 그렇지만, 여수는 더욱 각별하다. 임진왜란 때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머물던 통제영이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해 온 건 1591년. 통제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601년까지 10년 가까이 설치됐다. 하여, 여수는 이순신이 전라도 백성들과 함께 왜란을 극복한 현장이 됐다. 거북선을 처음 출정시킨 곳도 여수였다. 여수가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여수였다. 때마침 이순신 탄신(4월 28일)을 맞았다. 발걸음이 여수로 향하는 이유다. 연초록으로 싱그럽던 산천이 초록으로 짙어지고 있다. 계절도 초여름으로 향한다. 여수에는 이순신 관련 유적이 많다. 의미도 다 깊다. 널리 알려진 진남관을 비롯 선소, 고소대가 먼저 꼽힌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진해루는 당시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다. 이순신은 진해루를 지휘본부로 썼다. 선소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한 곳이다. 지휘소 역할을 했던 세검정, 배를 매어 뒀던 계선주, 그리고 군기고, 대장간, 망해루가 복원돼 있다. 고소대는 이순신이 수군의 훈련을 독려하고 군령을 내린 곳이다. 이순신을 기리는 타루비(墮淚碑)가 여기에 있다. 1598년 이순신이 전사하고 5년 뒤인 1603년 부하 수군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웠다. 높이 97㎝, 폭 58.5㎝로 크지 않지만, 이순신을 기리는 최초의 비석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도 있다. 길이 305㎝, 폭 124㎝로 국내에서 가장 큰 대첩비다. 1620년 조정이 주도해 세웠다. 해남 우수영에 있는 '우수영대첩비(명량대첩비)'와 구별해 '좌수영대첩비'로도 불린다. 빗길을 달려 덕충동으로 들어섰다. 여수시립 현암도서관과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가 있는 곳이다. 오래된 마을답게 일반주택과 고층 아파트가 뒤엉켜 있다. 그 사이로 넓지 않은 도로와 골목이 이어진다. 길은 도서관 앞에서 충민사, 석천사로 이어진다. 빨갛게 핀 철쭉과 영산홍이 연등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충민사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도 62년 앞선다. 1601년 어명을 받은 이항복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에 명을 내려 세웠다. 편액도 선조가 직접 썼다.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앞뜰에는 옛 사당의 주춧돌이 놓여 있고, 한쪽에 비석이 서 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을 1970년대에 다시 지었다. 지역의 유림들이 앞장서고 힘을 모았다. 사당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이 배향돼 있다. 이억기는 이순신과 함께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안홍국은 안골포 해전에서 숨졌다. 충민사 유물관도 있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청동상이 맞아주는 전시관이다. 로 통용되는 이순신의 친필 임진일기, 정유일기, 갑오일기 등이 복제본으로 전시돼 있다. 당시 사용됐던 곡나팔과 영패, 귀도, 조선장수의 갑주도 보인다. 일본군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이순신과 전라도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유물관 앞에는 임진왜란 때 쓰였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화포가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화포의 생김새와 기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충민사 바로 옆에는 절집 석천사가 있다. 1599년 자운스님과 옥형스님이 이순신의 충절을 기리려고 지었다. 자운은 승려 300명으로 이뤄진 당시 의승수군의 대장이었다. 옥형은 군량미 조달에 앞장섰다. 절집의 의승당 기둥에 이순신과 자운·옥형, 의승군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불교의 절집이 한데 어우러진 사연도 애틋하다. 충민사는 당시 의병에 참여했던 향교 교리 박대복에서 비롯됐다. 박대복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7년 동안 종군했다. 그는 이순신이 물을 마시러 오가던 곳에 작은 사당을 지었다. 지금의 충민사 뒤쪽이다. 나중에 옥형이 충민사 옆에 작은 정사를 지었다. 옥형은 죽는 그 날까지 정사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호남의 많은 승려들은 절집에서 이순신 추모재를 올렸다. 자운스님은 1599년 노량에서 수륙재를 지냈다. 수륙재는 나라의 큰 행사였다. 충민사와 석천사에서 덕충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덕충동은 마래산 아래 둔덕으로 인해 '떡더굴' '덕대'로 불렸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덕대'와 '와동'이 합해지고, 충민사의 '충'을 가져다 써 덕충리가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덕충천을 사이에 두고 덕대, 석동으로 나뉘었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덕대, 돌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고 기왓장을 굽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석동이다. 덕대의 '덕', 충무공 이순신의 '충'자를 가져다 붙여 덕충동이 됐다. 덕충동은 충무공 이순신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마을이다. 주민들의 자긍심도 높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향한 효도에 극진했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효사랑 한마음 잔치를 열어왔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효도관광도 다녔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까지 그랬다. 오후 늦게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주민들이 한두 명씩 나와 충민사 앞길을 오가며 걷기운동을 한다. 이제 그만 코로나19를 떨치고, 주민들이 같이 웃고 즐기는 마당이 다시 펼쳐지면 좋겠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5> 미술관 자체가 작품 '구겐'… 미국의 자부심 '메트'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푸른 생선 뱃속이 이런 모습일까. 구겐하임 미술관 1층에 누워서 천장을 멍하게 보고 있으려면 여럿생각이 든다. 고래 뱃속에서 3일간 있었다는 성경 속 요나 같기도 하고, 요나가 머물렀던 고래뱃속을 생명탄생공간으로 상징화한 모 문학작품의 자궁 안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 무덤 같기도 하다. 푸른 조명이 굴곡진 안쪽의 로턴다(Rotunda)라 불리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나선형 곡선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을 때면, 흡사 6개의 아가미(1층부터 6층)가 자체 발광하는 것도 같다. 물을 들이켰다가 내뱉을 때마다 야광빛 아가미가 꿈틀거리면서 등뼈가 있는 공간으로 휴, 숨이 차오를 것 같은 뻥 뚫려 있는 중심 공간. 마침 그곳에 긴 스크린이 걸려있고 흑인 뮤지션이 스크린 속에서 전위적인 음악을 장송곡처럼 내보낸다. 창문이 없는 건물에서 유일하게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은 햇볕 대신 음울한 그늘이 걸쳐져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 건물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하다. 미술 애호가이면서 부호였던 솔로몬 구겐하임이 수집한 샤갈, 르누아르, 클레의 작품과 칸딘스키, 몬드리안 같은 추상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맨 처음 추상 회화 미술관을 개관했다. 그것이 시초였다. 이후 세잔, 드가, 고갱, 고흐 피카소, 마네 등의 작품을 기증받는다. 갈수록 늘어나는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서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지금의 미술관을 설계하고 건축한다.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더라도 우아한 굴곡을 감상할 수 있는 머그잔 형상의 건물. 1층부터 6층까지 계단 없이 사방 벽을 타고 올라가면서 우아하게 구조물을 감상할 수가 있다. 나는 승강기를 타고 6층에서부터 내려가면서 감상하기로 했다. 마침 6층에 전시된 약간은 에로틱한 특별전에서 묘한 감정을 입히고는 상설 전시관인 2층 탄하우저 컬렉션(Thannhauser Collection)에서 비웠다. 그리고는 1층 소파에 허리가 아플 때까지 누워서 장송곡 같은 전위적인 음악과 어울리는 우중충한 조명(날씨가 흐렸다)을 벗 삼아 묘지 같은 그곳에서 나만의 제를 지냈다. 하지만 결코 그곳이 우울한 장소라고 말할 수 없다. 구겐하임으로 입장하기 위해서 잠깐 동안 대기했던 시간 동안 발랄한 아침 공기를 들이켜면서 관람자들을 위해서 길거리 상점 주인들이 오픈 준비하는 부산함을 지켜보았다. 책받침만한 크기에 인쇄된 아트 상품들과 엽서들 그리고 푸드 트럭 등. 관람을 마치고는 푸드 트럭에서 할라 음식 점보 소시지로 늦은 점심을 먹을 때는 예술 공간과 일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의 탈의한 조깅하는 사람들과 섞여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The Jacqueline Kennedy Onassis Reservoir) 주변을 달릴 때는 미술관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금 떠올라 그 우중충한 빛과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우아한 건축물에 걸려 있는 햇살 사이에서 나는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재클린 오나시스 저수지는 센트럴 파크의 8분의 1를 차지하는 인공호수이다. 뉴요커들에게센트럴 파크는 오아시스와 다름이 없다. 공원 주위에도 근사한 뮤지엄들도 여럿이다. 구겐하임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뮤지엄이자 뉴욕의 자랑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 자리 잡고 있다. 뉴요커들이 애칭으로 '메트(The Met)'라 부르기도 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내가 뉴욕 도착해서 맨 처음 갔던 곳이다. 명성에 걸맞게 팬데믹 시기에도 미술관 주위로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보였다. 30분 정도 기다려서 입장했을 때는 웅장한 미술관 건물처럼 전시관 내부도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역시나 뉴욕의 부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천문학적 가격의 수많은 명화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의 작품부터 유럽, 아프리카 및 중국과 한국 유물들까지, 시간과 공간을 떠난 작품들이 종일 걸어도 다 보지 못할 정도로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세계 3대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은 '기부'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그 시작은 1866년 미국 외교관인 존 제이(John Jay)가 파리에서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파티에서부터였다. 그날 그는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들만한 말을 했다. "미국이 유럽, 특히 프랑스에 밀리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문화'만 아니면 어느 것 하나 뒤질 게 없지 않습니까. 프랑스가 루브르를 나라의 상징으로 가꾸듯이 우리도 그에 버금가는 멋진 미술관을 설립해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는 문화 교육기관으로서 미술관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그의 연설은 파장을 몰고 왔다. 당시 그 행사에 참석한 사업가와 예술인들은 뉴욕 중심가에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경제력에서는 어느 나라보다 앞서가던 그들이지만 문화에서만은 한없이 작아지던 때, 미국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존 제이의 한 마디가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지금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탄생시키게 했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봐야할 것들이 더 늘어나는 듯한 요술 공간인 메트로폴리탄. 나는 허기진 사람처럼 보고 또 보며 빈속을 채워나갔다. 19~20세기 조각과 미술 그리고 이집트 미술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고는 박물관 내 카페로 향했다. 오후 관람을 위해서 정신적인 허기뿐만 아니라 육체의 허기도 채워야했기 때문이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나를 벗어 던지고 우주·영원과 교감하는 명상터
경악! 바로 그 자체다. 거대한 땅굴, 7년간 매일같이 그것도 혼자서 굴을 팠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벌이로 한 것도 아니다. 굴을 다 파놓고도 자랑은커녕 문을 닫아걸었다. 전남 장흥의 사자산 자락, 평범한 시골이지만 굴은 예사스럽지 않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갖가지의 조형물들이 가득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거대한 지하 조각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면적 약 500평 규모에 굴 길이만 합쳐도 약 100미터 정도는 될 것 같다. 굴속의 각종 이미지는 부조 중심으로 50가지 정도다. 한 작가의 구도자적 수행공간으로 시작한 특이한 지하 현장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쓴 해설의 첫 대목이다. 4월 초 발행된 신간, '강대철 조각토굴'(살림출판, 2022) 내용이다. 사실 나도 지난해 4월 윤관장을 따라 이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김영균 원장(조자용기념사업회 이사)과 유시춘 EBS 이사장이 동행했다. 일체의 공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굴은 참석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나하나의 부조가 주는 영감들을 어떤 수사학으로 형언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첫 느낌은 김영균 원장의 명저 '탯줄코드'(민속원)가 굴속에서 재현된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나무뿌리와 해골 혹은 뇌수와 자궁과 뱀들의 신화가 부조 형식의 조각품으로 직조된 현장이랄까. 굴속에서 나는 수많은 영감을 받았다. 허락을 받아 휴대폰으로 일일이 사진을 찍었지만 공개할 수 없었다. 공개 여부를 아직 결정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1년 만에 단행본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것인가. 근원의 자리를 찾아 책의 들머리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조각은 석관 안에 든 부처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예수의 상이었다. 이 동굴의 첫 작품이랄 수 있다. 부처가 잠든 석관은 거대한 나무뿌리 형상들이 에워싸고 있다. 2000년 동안 인류의 무지가 부처로서의 예수를 가둬놓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책을 한두 장 넘기기도 전에 의문이 풀린다. 우리나라 불교 조각의 최고 작가이자 불교 신자이지만, 강작가의 본래 종교가 기독교였고 주위 친척 지인들이 대부분 기독교였다는 고백 말이다. 한국 동란 때 아버지가 사상범으로 희생된 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듯했다. 이후 월남전에 참전하거나 공부를 지속하면서 종교의 본질이랄까 신앙의 뿌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석가와 예수를 위대한 보살로 이해하는 그의 심성이 이를 말해준다. 조각 예수상이 오른손을 펼쳐 보이는 것은 미륵의 한 표현이다. 미륵과 메시아 예수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시대에 역사의 기득권자들에 의해 조율되고 왜곡된 예수가 아니라 부처로서의 예수,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예수 본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함을, 제 주변 기독 신앙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로서의 예수라는 생각은 예수로서의 부처라는 생각과 통한다. 석관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뿌리 형상들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에서 소개한 동굴을 몇 개만 따라가 본다. 첫 번째 동굴의 맞은 편에는 머리 위로 둥근 우주 같은 형상을 한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뇌수와도 같고 나무뿌리와도 같은 장엄한 연결의 꼭지점에는 아마도 연꽃일 수 있는 8개의 꽃잎이 부조되어 있다. 사람을 작은 우주라고 한다. 이 공간이야말로 육근(六根) 즉 육식(六識)을 낳는 눈, 귀, 코, 혀, 몸, 뜻이 모인 작은 우주 아닌가. 이 자리 앉아 명상하면, 필시 진리를 깨달아 욕심과 집착이 없어지고 육근이 깨끗해지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의 단계에 이를 것만 같다. 때때로 뿌리는 엉키고 설켜 근원과도 같은 뇌수 혹은 인식의 동그라미로 집중되다가 이내 두 번째 굴에서 수천수만의 해골들을 에워싼다. 세 번째 네 번째 굴로 이어지는 이 기이한 조각들은 해골로 표현된 무의식의 장엄(莊嚴)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말한다. "옛날부터 구도자들은 육신의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집착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수행 중 하나인 백골관(白骨觀)이 있는데, 시체 앞에서 그 시체가 부패하여 살이 흩어지면서 온갖 감정들을 표현했던 형상들이 사라지고 뼈만 남을 때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상함을 실감하는 수행입니다." 아! 그렇다. 이 굴들은, 나를 벗어던지고 우주와 혹은 영원과 교감하는 백골관의 명상터 아닌가. 다섯 번째 굴에서는 알을 깨고 나오는 조옥(鳥玉)을 거쳐 반가부좌를 한 사유상에 다다른다. 작가는 이 불상을 바라보면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신을 성찰하고자 하는 의도로 구성했다고 한다. 고통을 형상화한 얼굴상을 지나 여섯 번째 굴에 이르면 육바라밀의 세계가 펼쳐진다. 보살 열반의 실천단계인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들이 각양의 형상으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곱 번째 굴에 이르면 여덟 개의 수레바퀴와 태아가 잉태되는 듯한 깨달음의 씨앗이 형상화되어 있다. 현재는 여기까지 조성되어 있지만, 작가의 뉘앙스대로라면 아마 계속 진행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남도인문학팁 동굴의 노래, 동굴의 아우라 나는 수년 전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가장 오래된 잡지이자 대표적 저널인 '월간 기독교사상'에 1년간 연재를 한 적이 있다. 라는 제목이었는데, 무속, 불교, 우리의 전통문화를 기독교에 버무린 글이었다. 불상을 태워 땔감으로 사용했다는 불교계의 오랜 전설처럼 예수를 죽여야 예수가 산다는 나의 철학을 피력하였다고나 할까.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해 아직 단행본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중 여섯 번째 연재에서 '동굴의 노래, 여울굴에서 부유하는 돌배까지'라는 타이틀로 동굴의 아우라를 다루었다. 동굴 관련 설화의 역사는 깊고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군신화다.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잘 알려져 있다. 단군의 동굴 신화소는 자연스럽게 석탈해(昔脫解)의 석총(石塚)이야기와 연결되고 수많은 설화들로 연결된다. 이들 설화소는 남근바위와 대칭을 이루며 음양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굴 자체 즉 음기(陰氣) 만으로 출산 혹은 생산의 의미를 완성하기도 한다. 내가 단군신화의 동굴을 여음굴로 해석하는 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동굴 은유를 위한, 아마도 논쟁적일 지난한 여정이기도 하다. 낙산사 홍련암과 전국에 분포하는 석굴의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다. 부안의 죽막동 여울굴에서 태어난 개양할미는 그중의 한 사례일 뿐이다. 설화적으로 보면 마치 심청이 연꽃으로 재생하기 위해 구성해둔 장치들 같다. 지면상 중국 보타도의 관음신앙이나 일본의 시조신에 대한 설명은 차후를 기약하지만, 전국에 산재한 여음굴, 여음곡, 여음순 풍수와 신화, 전설, 민담들과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남도땅 끝자리 장흥 사자산 자락에 마련된 동굴이 주는 아우라를 깊이 생각하는 중이다. 강작가는 마음자리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이를 풀이하지만, 나의 눈에는 산재한 동굴신화의 정점이요 김영균의 와도 같은 근원 찾기의 순례로 보인다. 다만 생각한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남도땅 한 자락에 세계 유일의 이런 동굴이 마련되었다는 것이.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 녹도진 만호 정운
조선 수군의 신망을 받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녹도진의 만호(萬戶)는 정운(鄭運, 1543~1592)이었다. 정운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선조 27년(1594) 8월 12일자 『선조실록』의 다음 대화가 적격이다. 선조가 "임진년 이후 우리 군대가 움츠리기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 교활한 적병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가벼이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정운이 1592년 9월 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그래서 아군이 물러서기만 하고 기세가 크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는 정운의 사망이 조선 수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돌격대장이었던 정운은 중종 38년(1543) 전남 영암(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훈련원 참군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하동이며 자는 창진(昌辰)이다. 일곱 살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 새긴 칼을 차고 다니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했다. 선조 3년(1570) 2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를 시작으로 금갑도(현 진도) 수군 권관, 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목 판관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늘 짧았다.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안방준이 남긴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정운유사(鄭運遺事)」의 다음 서술이 참고된다. "젊어서부터 강개하여 호협한 기풍이 있어 매양 절의에 따라 죽을 수 있다고 스스로 허여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거산찰방이 되었을 때 감사(관찰사)의 수행원 중에 신임을 받은 사람이 민폐를 끼치자 공(정운)이 곤장을 쳤는데, 감사가 좋아하지 않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웅천현감이 되어 감사의 미움을 사자 또 그날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떠나버렸다. 이윽고 제주목 판관에 임명되었다가 또 목사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는데, 돌아오는 배에 한 마리의 망아지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강직하고 청고(淸高)한 바가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여러 해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선조 24년(1591) 종 4품직인 녹도진 만호에 임명된다. 녹도진은 전라좌수영 관할이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과 인연을 맺은 연유다. 녹도진 만호에 부임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멈칫하던 이순신을 설득하여 경상도로 나아가 돌격대장이 되어 옥포·당포·한산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1592년 9월 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적의 대포를 맞고 순국한다. 정운, 이순신을 재촉하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지원 요청을 받는다. 그런데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곧바로 수군을 출동시키지 않은 채 머뭇거린다. 그 이순신을 설득하고 협박해서 경상도 출병을 강행시킨 분이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자 정운이 이순신을 설득했다는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는 '우리가 우리 지역(전라도)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경상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전라도)도 보존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전라좌수사의 직계 부하였던 종4품 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정3품 이순신을 협박해서 경상도로 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선조 27년(1594) 11월 12일자 『조선왕조실록』에 정곤수는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에게 '장수(이순신)가 만일 가지 않으면 전라도는 반드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할 수 없이 가서 (적을) 격파했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록에는 박협(迫脅)이라고 나온다. 박협은 "남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위협함"이라는 뜻이니 협박과 상통한다. 부하였던 녹도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협박했다는 기록은 놀랍다. 선조 30년(1597) 1월 23일자의 실록에는 아예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하여 목을 베려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운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상대 붕당의 모함과 관련되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순신은 이후 10여 일 뒤인 2월 6일 군공을 날조하고 적장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원균이 후임에 임명되고 있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녹도진 만호 정운이 칼을 뽑아 들고 경상도로의 진격을 망설이는 이순신을 재촉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 없지만, 앉아서 왜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영남으로 진격하여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정운의 주장을 이순신이 따른 것만은 분명하다. 정운의 주장은 적중했고, 이순신은 무적의 신화를 남기게 된다. 경상도로의 출정을 앞장서 주장했던 그가 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이 되었던 연유다. 나라가 오른팔을 잃다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적진포(5.8),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 한산도(7.8), 안골포 해전(7.12)에서 연승을 거둔다. 그리고 한달 여의 휴식을 취한 후 9월 1일 부산포를 급습한다.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한 대승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녹도진 만호 정운이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라며 탄식한다. 정운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시신을 수습한 후 해남의 두륜산 자락 선영에 안장하고 영전에 다음의 제문을 올린다.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아, 슬프도다……" 정운은 사후 화려하게 부활한다. 사망 소식을 접한 조정은 곧바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증직한다. 이어 선조 39년(1606) 병조참판에, 정조 20년(1796)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에 가증(加增)된다. 정조 22년(1798)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는데,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니 '충'이요, 싸움터에 나가 죽으니 '장'이라." 그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사당도 건립된다. 효종 3년(1652) 영암 유림들에 의해 경호사(鏡湖祠)가 건립되고 숙종 8년(1682)에 충절사(忠節祠)로 사액된다. 충절사 사당 오른쪽에는 정운을 기리는 충신 정려각도 있다. 그에게 '충신 증 가의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정운지려'라는 충신정려가 내려진 것은 선조 41년(1608)이었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충신각은 숙종 7년(1681)에 세워졌다가, 1985년 10월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그는 흥양(고흥)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雙忠祠)에도 배향된다. 쌍충사는 선조 20년(1587) 녹도진 만호로 왜구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충렬공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을 기리기 위해 녹도진성 안에 건립된 사당이다. 당시 이름은 이대원 묘당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녹도진 만호 정운이 부산 다대포(몰운대)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하여 이대원 묘당에 함께 모시게 된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숙종 7년(1681)에 새로 건립하였으며, 2년 뒤인 1683년 조정으로부터 쌍충사로 사액을 받는다. 정운은 오늘도 후배 해군들의 기림을 받고 있다. 정운을 기리기 위해 1997년 잠수함을 건조하고 붙인 이름이 '정운함'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정운의 역할은 안방준의 시문집인 『은봉전서(隱峯全書』에 나오는 「부산기사(釜山記事)」의 다음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힘입은 것이며, 이순신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62> 백운산의 진달래
전남 광양에 있는 해발 1,222m 높이의 백운산 남쪽으로 광양만과 한려수도가 내려다보이고 북쪽으론 지리산의 주능선이 펼쳐져 보이는 명산이다 도선국사의 부도 탑이 있는 옥룡사지로 가는 소풍길이 좋고 이른 봄철에 나오는 고로쇠 수액 채취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백운봉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여럿 있겠지만 주봉과 따리봉 사이에 있는 아구사리 동산 한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흔적들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여순사건의 주동자들이 처음 숨어든 곳이며 전남 빨치산의 최후 보루였던 곳이 바로 이 산이지 않던가. 정상을 지척에 두고 있는 신선대 코앞의 능선에 올라 산행을 멈췄다 사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이지만 아무 사연도 없는 곳은 아니다 전남 빨치산 김선우 사령관이 묻힌 곳이다 당시 토벌군 대장이 최후를 맞이한 적장을 예우하는 차원과 다시는 이 같은 민족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녹아내려 있는 것이다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또한 민족을 사랑했기에 선택한 운명이었다 그들을 추종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역사를 기록하면서 애잔한 마음 금할 길 없어 그를 기억하고 있을 주변의 진달래꽃으로 위로의 마음 전한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대낮에도 등불켜고 사람 찾는 세상' 얼척이 없다
"나의 친우 성번중의 집에 일찍이 귀신의 장난이 있었는데, 초저녁 종이 울릴 무렵에 은은히 서산의 수풀 속에서 나와 돌을 던지기도 하고 불을 붙여 와서 한 여종을 능욕하여 임신이 되었는데 마치 사람과 접촉하는 것 같았다. 민가에 이따금씩 이러한 환난을 만나는 수가 있으니, 의원들이 말하는바 귀태라는 것으로, 백방으로 막으려고 애써도 되지 않는다." 김안로가 지은 야담설화집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귀태설화(鬼胎說話)라고 한다. 흔히 얘기하는 도깨비 이야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두려워하고 걱정함' 또는 '나쁜 마음'이라고 풀이해두었다. 홍나래는 귀태를 이렇게 분석한다. "귀태 이야기 속 주인공은 아비 없이 태어났다는 소문과, 나자마자 세간의 비웃음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아이들이다. 그는 철이 들면 마을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이거나 특출한 사명을 지고 가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서사에서 완곡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넘어 논란이 된 여성에게 삶의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 짓는다. "귀태란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실현되던 사회에서 성적 피해 여성과 그 가족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로 기능했던 것이다(홍나래, (2014)." 그 사례로 의 기사를 소개한다. "불사의의 망량촌 도깨비마을(1913), 경성의 독갑이 이것이 무엇인가(1914), 심야비석 독갑이 작란인가(1915), 방화범 아가애녀, 독갑이 작난으로 알엇던 불이 실상은 자긔집 딸의 소위이다, 십이세 소녀의 변응적 심리(1923), 독갑이 작난인가 사람의 소위인가(1924), 독개비에게 홀려 불노핫다고 의문의 방화광여자공판(1926)"등이 그것이다. 1900년도 초부터 1920년대까지 도깨비를 독갑이로 호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망량, 독갑이, 독개비 등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다. 혼외혼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랄까. 제목만 늘어놔도 당시의 상황이 짐작된다. 이런 측면을 졸저 에서 자세하게 다루어 두었다. 귀태설화, 아버지 없이 출생한 아이들 "아계 이산해(1538~1609)라는 조선시대의 재상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선조시대에는 팔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분이다. 이산해의 이버지 이지번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산해관에서 잠을 잤는데 부인과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집안에서는 이를 의심하여 부인을 내치려 하였다. 이산해의 삼촌 토정 이지함이 만류하였다. 귀국한 이지번이 자신의 꿈을 말하여 부인의 결백이 입증되었다. 꿈꾼 곳의 이름을 따서 '산해(山海)'라 이름 지었다. 그래서인지 대낮에도 이산해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에 실린 이야기다. 도깨비의 시원으로 거론되는 삼국유사 비형랑설화도 사실은 죽은 왕과 통정해서 낳은 아이의 이야기다. 일종의 귀태설화다. 졸저를 좀 더 인용해둔다. 이 이야기에는 악귀나 코믹한 버전의 캐릭터들이 뒤섞여 있다. 때로는 돌을 던져 창문을 부수거나 솥뚜껑을 솥 안으로 집어넣었다 빼내는 요술도 부린다. 철을 능숙하게 다룬다는 대장장이가 도깨비의 시원으로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집안 담장을 무너뜨린다든지 화재가 났다든지 창문을 누군가 깨트렸다면 그것은 모두 도깨비짓이다. 불도깨비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집안에 불을 내는 존재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재를 예방하는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유익함을 제공해주는 재복신과 거리가 있지만 긍정적 성격이라는 점은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민담류의 도깨비와 식자층이 기록해두었던 한자 용어의 도깨비들(이매나 망량 등)을 보통 도깨비의 이중성 혹은 양가성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면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겠다. 그만큼 도깨비는 핑계 댈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이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다. 도깨비가 없으면 어쩔뻔했을까?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도깨비의 현현은 만능처럼 보인다.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보다 교묘하게 도깨불에 투사했던 귀태설화가 기능해온 측면이기도 하다. 아버지 없이 출생한 아이들은 모두 도깨비의 자녀들로 묘사되는가? 그렇지 않다. 한편으로는 매우 거시적이고 출중한 출생 비밀로 포장되고 급기야 동정녀 잉태의 단계로 추앙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기분 나쁘겠지만, 적어도 남녀의 직접적인 결합 없이 신기하게 발생한 임신 사건의 알고리즘은 예수 탄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 이래 꿈속 교합이라는 몽교(夢交), 햇빛이나 달빛, 죽은 남자의 영혼에 의한 감응으로 전개된 수많은 신화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상기해보라. 탯줄 없이 태어난 신비한 출생을 고대의 건국설화에서부터 수도 없이 접해왔지 않는가. 귀태에 대한 사회사적 맥락은 이렇듯 천차만별이다. 고대의 탯줄 없이 태어난 영웅들로부터 조선 후기 아버지 없이 잉태한 아이들, 또 남편 없는 여자들에 대한 보호 이야기를 거쳐 비로소 우리는 거대한 생명문화를 담론화하는 시대의 입구에 다다라 있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 시대는 귀태 도깨비 이야기로부터 얼마나 진보했는가. 혹은 퇴행했는가. 대낮에도 활보하는 귀태스런 이들을 보며 드는 생각들이다. 남도인문학팁 대낮에도 활보하는 귀태 도깨비 2003년 김지하 등이 참여하였던 에서 이미 이렇게 정의하였다. "현대 서구사회를 유형 지어 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나 중대한 영향을 미쳐온 서구근대주의는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신념, 인간 신체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 생존을 위한 투쟁처럼 사회에 있어서도 무한경쟁의 생활관, 물질적 진보에 대한 신념, 남성들의 여성 억압을 자연법칙으로 강제하는 신념 등의 사상과 가치를 포함한다." 근자에 일부 무리가 이대남 이대녀 패미 따위의 계층 갈라치기로 재미를 톡톡하게 보고, 급기야는 장애인의 권리까지 쟁점화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 고향 말로 하면 '얼척'이 없다. 사람의 사회는 아랫돌과 윗돌이 대칭하여 돌아가는 것인데 '어처구니'가 없으니 어찌 맷돌을 돌릴 수 있으랴. 이른바 소수 약자를 포섭하는 개념의 여성성 혹은 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이해관계로 해석될 만큼 천박하지 않다.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과 여성, 어린이와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성소수자까지 예컨대 '에코페미니즘' 등으로 수식되는 지난한 투쟁의 역사요 각성의 행로였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다 자라도록 나와 맞상을 하지 못하셨다. 오로지 흰쌀밥 맞상은 아버지와 나, 이른바 가부장으로서의 남성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일시적인 굴절과 퇴행을 거치며 진보해왔다. 이 피와 땀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귀태의 비슷한 말로 '음모(陰謀)'가 있다.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미거나 또는 그런 꾀를 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의 기성체제는 서구 중심의 거대자본과 과학기술의 폭력성, 서구 백인 남성들을 미러링한 것인가? 귀태 도깨비 난무하던 조선 후기의 폐습을 상속한 것인가? 대낮에도 등불 켜고 사람 찾는 세상이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세는 나이'가 '폐습'이라고?
새 정부 들어서면서 변화하는 것 중 하나가 나이 셈법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한국식 나이 셈법이라고 말들이 많았다. 많은 매체가 앞다투어 이를 보도했다. 한 여론조사 발표를 보면, 국제표준인 '만 나이'를 우리 국민 70% 이상이 찬성한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이기도 하고 대다수가 찬성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만 나이' 세는 방식으로 바뀌는 듯하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심지어 북한까지 '만 나이' 셈법으로 바뀐 지 오래이니 반대할 명분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근자의 설왕설래를 거쳐 코로나 확산과 지원 등의 문제에 봉착하면서 이 문제가 더 도드라졌다. 한 가지 상고해볼 일이 있다. '세는 나이'라 일컫는 한국식 나이 셈법이 지닌 함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언설이 일종의 레토릭이 아니라면 말이다. 유사한 회한이 있다. 2014년부터 전면 시행된 도로명주소 표기법이다. 이미 늦긴 했었지만 남도민속학회 229회 월례회(2018. 7. 28)에서 이를 문제 삼았다. 2018년 한국민속학자대회(2018. 11.9~13)의 섹션 주제로 다루기도 했다. 두 번 다 내가 회장과 이사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문제 제기였다. 하지만 이미 국가적으로 공표되고 시행되는 정책이어서인지 별다른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나이 셈법이나 도로명 표기 모두 관리의 편리성과 비용의 절감, 글로벌한 시스템과의 융화 등 행정적 편의성이 강조되었다. 그것이 전부일까?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실질 이면에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 것일까? 이를 환기한다는 의미에서 차제에 도로명 주소 표기법의 문제점도 다뤄보겠다. 나이가 세 개라는 한국 사람들 이즈음 각 매체에서 뽑은 제목들이 현란하다. 이름은 하나인데 나이는 3개라는 둥, '만 나이'를 도입하면 일상이 바뀐다는 둥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안을 소개하기 바쁘다.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세는 나이'를 비롯해 민법상으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만 나이' 또 '연 나이'의 용례들 말이다. 수년 전 법률 개정까지 시도되었던 이 흐름을 보면 '세는 나이'의 불합리성이 강조되고 '만 나이'를 도입했을 때의 장점들이 열거된다. 세는 나이가 일종의 악습이나 폐습이 되어버렸다. 꼭 그런 것일까? 하지만 관습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관념되는 '세는 나이'가 행정집행을 교란하거나 방해한다는 시각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세는 나이의 전통이 생각보다 넓고 깊다. 굳이 법률이나 제도로 없애지 않아도 현재 있는 민법상의 '만 나이'를 충분히 활용하거나 재구성하면 해결될 문제들 아닌가? 작년 민주당 김형배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가 강한 비판을 받고 철회했던 교육기본법 개정안이 떠오른다. 홍익인간 등의 용어가 너무 추상적이라 하여 민주시민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꾸려던 사례 말이다. 홍익인간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따왔으니 추상적이라고 느꼈던 것일까? 견주어 말하자면, 세는 나이는 추상적인 것이고 만 나이는 구체적인 것일까? 예컨대 음력설은 추상적인 것이고 양력설은 구체적인 것일까?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는 풍속 등 부지기수의 사례들은 또 어떠한가? 한글, 한복, 한식, 한스타일, K-컬쳐의 범주에 '세는 나이'의 전통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새 정부의 안으로 모두 두 살씩 어려졌다고 말하는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한 사람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나이'라는 말은 '낳다'의 '낳'에서 왔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낳'으로, 19세기부터 '나히', '나이' 등으로 변화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라고 설명한다. 용례를 보면 나이, 연경, 연령, 연세, 연치, 연식, 춘추, 치산, 행년, 낫살, 나잇살, 귀경 등 십여 가지가 넘는다. 표면적으로는 한 해를 기점 삼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생명의 시작이라는 우주적인 철학이 깃들어 있다. '세는 나이' 방식은, 한 사람의 시작을 출생으로 보는 과정론적인 방식이다. '만 나이' 방식은 출생 1년 후에야 1살을 부여하는 결과론적 방식이다. 그렇게 따지니 후자는 1년 동안 0살이다. 물론 세계가 그렇게 사용하고 있기에 우리 전통을 고수하려는 이들이 고루하거나 편협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둘 것이 있다. 본래 '세는 나이' 셈법은 동아시아 보편이었다. 그 안에 많은 기표와 기의가 있다. 단군신화가 대표적이다. 한 사람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우리 고유의 철학적 토대라고나 할까. 삼칠일과 백일은 임신과 출산 즉 '낳(나이)'의 기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정보다. 곰은 동굴에서 마늘 스무 매(20)와 쑥 한 단(1)을 먹고 사람이 된다. 세이레(21)는 지금까지도 지켜지는 출산 풍속의 하나다. 100일은 백일잔치, 백일기도 등 보다 구체적인 행위와 사건들로 관념된다. 탯줄과 금줄이라는 수많은 암호와 상징들이 더불어 직조된다. 혹자들은 관련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태아기의 생명존중 사상을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사실은 태어나자마자 1살을 부여하는 관념 자체가 그 증거다. 태교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굴리스&세이건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상적 관점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의 출생 약 9개월 전에 당신 어머니의 자궁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약 40억 년 전 초기 지구의 반죽 속에 빚어진 생명의 대담한 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의 '세는 나이' 전통은 적어도 이런 아름다운 신화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지면상 할애하지 못했지만, 육십갑자를 배경 삼는 '갑계'와 '동갑'의 의미들도 이 나이 계산법에 포섭되어 있다. 남도지역의 '갑계'가 다종다양한 기능을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어깨동무, 송아지동무, 삼바꿈동무 등 '동무'라는 말이 '동갑내기'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세는 나이' 전통이 그 기저에 있다. 행정적으로 난망하다면 음력설과 양력설이 병존하듯, '만 나이'로 집행의 묘를 살리면 될 일이다. 굳이 '세는 나이'가 폐습인 것처럼, 호들갑 떨 필요 없다. 남도인문학팁 '세는 나이' 전통은 생명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 현대에 횡횡하는 생명경시 풍조가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오만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태아를 생명으로 극진히 생각했던 동양 고유의 철학 체계가 무너진 것도 그 하나의 원인이랄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양, 시신 따위야 태워 없애버리면 된다는 풍조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음택의 풍수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모가 사랑으로 만나 임신하고, 열 달 만에 탯줄 끊어 광명한 세상으로 나오는 사건의 의미를 허투루 여길 수는 없다. 단군신화로 거슬러 오르는 우리 고유의 철학 체계이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관심만큼 부모의 몸을 빌리기 전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거슬러 올라 조상들에게 묻고 내리내리 후손들에게 묻는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만 남아있다는 '세는 나이' 전통을 폐습처럼 여길 일인지, 그래도 우리가 생명존중 기반의 나이 셈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