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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5ㆍ18때 광주교도소에 끌려간 중상자들 사망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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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5ㆍ18때 광주교도소에 끌려간 중상자들 사망 방치"

본보 당시 치료기록ㆍ사망 목격 교도관들 증언 확보 중상자 등 시민 150여명 이송… 치료도 못받고 사망 살인 행위 다름없는 만행… 교도관 \"입도 뻥끗 못해\"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의해 중상을 입은 채 광주교도소로 끌려온 민간인 일부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른 정황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전남일보는 당시 광주교도소 내에서 이뤄진 중상자 치료 기록과 사망자를 목격한 교도관의 증언을 확보했다.

전남일보 취재 결과 광주교도소에는 5ㆍ18 당시 시위를 벌이다 전남대에 붙잡혀있던 150여명의 시민이 이송돼왔다. 이들은 이미 공수부대의 체포 및 조사과정에서 무자비한 구타 등으로 대부분 생명이 위중한 중상자였지만 계엄군은 적절한 치료는 물론 외부 의료기관 이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셈이다.

본보가 입수한 광주교도소의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문건과 당시 광주교도소에 재직했던 전 교도관들의 증언은 교도소 내에서 시위대 중상자에 대한 '치료 외면', '사망 방치' 등 사실상 살상 행위나 다름없는 '만행'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1980년 5ㆍ18 당시 시위를 벌이다 공수부대에 잡혀 전남대 인문대 강당에 끌려갔던 광주시민 150여 명은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직후 광주교도소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사방이 폐쇄된 '박스카(car)' 형태의 군용차량에 실린 시민들에게 독성이 강한 화학탄을 터뜨렸다. 이미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중상을 입은 대다수 시민들은 코피를 쏟고 살갗이 벗겨지는 화상을 입었다. 차량에 실려있던 시민들은 질식증세를 보이기도 했고 일부는 결국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부터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광주교도소 안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학살이 벌어졌다. 시위대 중상자를 위한 별도 집중 치료는 커녕 흙바닥으로 된 창고에 집단 수용해 상태를 악화시켜 사망자를 키운 것.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광주교도소가 작성한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문건이다.

광주교도소 의무과가 80년 6월 작성한 이 문건에는 5월21일 오후 5시30분부터 6월26일 오후 12시30분까지 교도소에서 치료받은 이들의 연인원과 사용 의약품 및 수량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데모대 체포자', '소요체포자' 등으로 적힌 이들은 첫 치료가 시작된 21일에만 143명에 달했다. 해당 문건에는 이들 전부가 '중상자' 또는 '응급환자'로 적혔다. 하지만 정작 치료에 사용된 의약품은 해열진통제(살소노바킹주), 과산화수소수(옥시풀), 소독약(머큐롬) 등 기초약품들 뿐이었다.

약품 목록을 본 유경연 빛고을 전남대병원 교수는 이런 약품들로 중상자들을 치료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 교수는 5ㆍ18 당시 전남대병원 레지던트로 5ㆍ18 부상자 치료에 적극 나섰다. 유 교수는 "대부분 기초약품에 불과하다. 목록만 본다면 가벼운 상처를 입은 환자 외에 실제 중상자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광주교도소 의무과 소속이었던 민경덕(69) 전 교도관은 "해당 문건에 적힌 것은 전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민 전 교도관은 "당시 교도소에 중상자를 치료할 만한 시설이나 약품이 없었다. 의료인은 의무과장(의사)과 남자 간호사 등 2명 뿐이었다"며 "(체포자들은)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수가 많고 여건도 안돼 응급처치 밖에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치료가 행해진 창고 안은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 1명과 군인들에 의해 통제됐다. 의무과 직원들은 하루 2차례 정해진 시간에만 창고에 출입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려 하면 '뭘 보냐'며 고개를 숙인 채 일하게 했다"면서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대소변을 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환자도 있었지만 내버려 뒀다. 그런 환자들은 다음날 사라지고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5ㆍ18 기간 광주교도소에 끌려온 다수의 시위대 중상자들이 외부와 격리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익명을 요구한 교도관 A씨는 "교도소 교무과에 설치된 조사실에서 군 당국의 조사를 받고난 뒤 송장이 된 채 들려나가는 사람을 봤다"면서 "똑같이 될까 두려워 교도관들은 입도 뻥긋 못했다"고 말했다.


김정대 기자ㆍ박종호 기자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는 1971년 북구 문흥동 10만6000여㎡의 부지에 건립됐다. 1980년 5월에는 2700여명의 재소자가 수용돼있었고, 교도관 32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5ㆍ18 당시 다수의 시위대가 체포돼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일부 사망자 암매장 장소로 지목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10월 44년간의 문흥동 시대를 마감하고 삼각동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