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 진격의 보수, 이외수와 이문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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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기·김강> 진격의 보수, 이외수와 이문열 전
김강 호남대 영어학과 교수
  • 입력 : 2023. 04.18(화) 13:12
김강 교수
두 사람은 외모만큼 생각도 달랐다. 필력으로 치자면, 우열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개성 있는 작가들이다. 그러나 판이한 필체처럼 정국을 대하는 시선은 중원의 맞수처럼 살벌했다.

비유하자면, 진보와 보수, 강개와 타협, 재야의 은사로서 ‘칼’을 아끼는 ‘장외인간’과 ‘초한지’ 무념 장수의 대결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 배후 논란으로 온라인 논쟁이 벌어졌다. 네티즌들은 광우병 괴담과 관련해 정부 편에 우호 댓글을 달고 촛불시위를 비판했던 자들을 ‘알바’로 폄훼했다. 독일산 콩글리시 아르바이트의 준말인 알바는 인터넷에서 특정 세력을 옹호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세력을 일컬었다. 특히 돈을 받고 기사의 논점을 흐리는 댓글로 악명이 높아 세칭 ‘댓글알바’로 불렸다.

먼저 이외수가 독침을 날렸다. 이외수는 ‘딴나라 알바들’이라는 인터넷 글에서 한나라당 알바들의 망국적인 행동을 조롱한다. 아울러 촛불시위와 관련한 정부 입장에 대해서는 ‘한국에 미개인 콘크리안 의외로 많아’라며 비판한다. 그는 “오늘날의 촛불집회는 국민의 열망을 전달하는 문화적 표현”이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사상적 투쟁이 아니다”고 평한다.

그는 이어 “색깔론이나 불순분자, 배후조종설 따위로 아직도 물타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콘크리안, 뇌가 콘크리트화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에 60년 넘게 인생을 살아온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개탄한다. “저토록 많은 대중이 주관도 없이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감화되어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라고 반문하며 정부가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 없이 강공일변도로 사태를 해결한다면 더 많은 희생과 비극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작가는 촛불문화제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집회 운영과 그에 대처하는 민주적이고 성숙한 정부의 모습을 기대하며 글을 닫는다.

이제 이문열의 반격. 2001년 ‘홍위병’ 파문으로 분서갱유를 겪은 바 있으며, 정치인들의 작전상 후퇴 격인 미국 망명도 나섰던 그다.

그는 라디오에 출연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촛불장난’에 비유하며 “불장난도 오래 하면 결국 델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예전부터 의병은 국가가 외적의 침입에 직면했을 때뿐만 아니라 내란에 처해 있을 때도 일어나는 것”이라며 “이제 촛불시위에 대항하는 반작용 의병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읍소한다. 국민을 한낱 불장난이나 치는 철부지로 본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 불렸다.

이 씨는 “촛불집회 배후에는 자발성과 순수성을 충분히 위장할 수 있을 만큼 분산된 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조직적인 배후세력은 아닐 것”이라며 딴지를 건다.

그 무렵 네티즌들이 벌였던 ‘조중동 광고주 압력 운동’을 범죄와 집단린치로 내몰고,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네티즌이 정부 위에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됐다면서 “합법적인 정부가 아직 시행도 하지 않은 정책을 전부 꺼내 가지고 반대하겠다며 촛불시위로 연결하는 것은 집단 난동”이라고 분노한다.

한편 보수세력의 분열과 혼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받지 말아야 할 유산까지 보수의 이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범보수가 합치면 헌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데도 쩔쩔매고 정신 못 차리는 것을 보면 절망감”이 든다며 한탄한다.

이문열처럼 명망 ‘있었던’ 작가가 어디 할 법한 소리인가. 학창시절 그의 마스터피스 ‘사람의 아들’을 읽은 후, 종교와 개인의 구원문제에 골몰해 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정체가 더욱 미스터리하다. 예술가도 지식인이다. 물론 ‘예술가들이 심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윤리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는 토마스 만의 말을 간과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몰이성적 사회분석 시각과 황폐한 발언은 참으로 황망했다.

그가 작가 혹은 지식인 아니면 파시스트였던 것인지.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초한지’ 등을 펴냈으니 작가는 분명했다. 그러나 글의 행간에서 지식인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와 정치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읽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대의에 대한 적절한 논리도 결핍됐다. 작가로서 갈구하는 비유와 독설만 가득할 뿐, 인문학적 존재의 부정성으로서 ‘입세의식’과 ‘창안’에 대한 희구도 모자랐다.

누군가는 말했다. 이문열이 충격 발언으로 자기와 신간을 광고한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자기를 성공시켰던 조중동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는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일종의 ‘병증’으로 간주했다.

이외수와 이문열 전, 벌써 15여 년 전 우화다. 역사는 역시 반복한다. 요새 또다시 한 종교인의 설교적 고함이 세상을 뒤흔든다. 정치도 쩔쩔매는 판이니, 마르크스 말처럼 신앙이 압도한다.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 비 사유적 논거로 정치적 또는 신분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그의 혹은 그들의 목적과 목표는 대체 무엇일까. 주변에 흔하듯, 충신과 충성파, 상전의 은전에 대한 보답인가 아니면 퇴행적 보수주의 근성인가.

지금 시국이 어지러운 근원은 제도권 정당이 ‘이전투구’에 고부라져서 인사불성 코마 상태 인데다 난국을 타개할 진보정치 세력의 대중적 지도력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곁불 쬐듯 곡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리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에끼, 너희들도 무슨 쓰레기, 돈, 성에 매몰된 사이비 집단인가. 보수, 보스, 네 추태에 차라리 박수를 보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