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이탈리아 오페라계를 향한 무솔리니의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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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
[전남일보]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이탈리아 오페라계를 향한 무솔리니의 '손짓'
<푸치니 서거 100주년-④음악가 무솔리니>
‘로마진군’ 통해 이탈리아 왕국 정권 이양
파시즘정권 정당성·확장에 문화예술 이용
푸치니 ‘로마찬가’ 정치 선전도구로 사용
로마제국 향한 무솔리니 열정 노래에 투영
  • 입력 : 2024. 02.22(목) 18:19
1922년 검은셔츠단과 로마에 입성한 무솔리니.
예술가의 작품은 제작된 시대를 들여다보는 돋보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푸치니는 외세의 지배를 받던 시대를 넘어서 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왕국 시대, 그리고 전후 경제 사회의 혼란을 틈타 등장한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과 함께했다.

푸치니가 그의 마지막 완성된 단막 작품 <잔니 스끼끼, Gianni Schicchi, 1918>가 완성될 무렵, 유럽은 세계 1차 대전의 소용돌이 끝 무렵이었다. 이때 승전국이었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경제적, 사회적 혼란에 휩싸였으며, 이러한 시기를 틈타 등장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8~1945)의 전체주의 파시즘은 이탈리아를 삼키게 된다. 무솔리니 파시스트당은 ‘로마진군’을 통해 이를 통해 이탈리아 왕국의 정권을 이양받았는데 이 사건은 1922년 파시스트 선봉대인 ‘검은셔츠단’이 로마 부활을 외치며 나폴리에서 행진하여 로마에 입성하게 되는 사건을 일컫는다. 급진적이며 비합리적인 정치사상과 과도한 전체주의 사상으로 인해 초기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이탈리아 국민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좌파 사회주의가 시도하는 파업과 사회 혼란을 파시스트들이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성장하였고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 된 극우적 파시즘이 대세를 이루며 이탈리아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검은셔츠단과 로마에 입성한 무솔리니.
비합리적이며 획일적이고 힘 중심의 폭력적인 정책을 펼쳐나가던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은 자신들의 실정을 감추고 이탈리아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문화예술을 이용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푸치니가 <잔니 스끼끼>를 만들 때 등장한 무솔리니는 음악적 식견이 많고 악기를 잘 다루는 ‘음악가’로 소개하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음악학자 민은기는 그의 저서 ‘독재자의 노래-그들은 어떻게 대중의 눈과 귀를 막았는가?’를 통해 그가 저널리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예술을 향한 프로파간다의 모습을 야욕으로 규정짓고 우상화의 길을 밟아 나가는 모습을 간과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대표적인 예로 무솔리니를 꼽고 있다.

로마진군
무솔리니는 비범한 음악적 소양을 가졌고 음악계에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포장할 만큼 소재는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푸치니와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통치자의 음악적 소양과 입장을 종합하여, 발간된 도서 ‘음악가 무솔리니’에서 ‘파시스트의 예술’이란 과거의 유산과 함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유산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앞세운 정책이 바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였으며, 이는 앞의 ‘로마진군’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무솔리니를 음악가로 포장한 것은 오페라계를 지배하는 이탈리아 음악계를 이용해서 파시즘 정권의 정당성과 확장에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로마진군’의 모습에 푸치니는 크게 감명받았다고 전해진다. ‘로마진군’ 다음 날 쓴 대본가 아다미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보낸 게 틀림없다”라고 썼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혼란을 해결해 줄 구세주로 푸치니는 생각한 것이었다. 당시 푸치니의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작품에도 드러나 있으며, 훗날 자신이 무솔리니에 동조한 여러 주장을 부정했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파시스트들에게 그는 좋은 프로파간다 도구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솔리니와 바이올린
국가지상주의 ‘파시즘’의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푸치니의 <잔니 스끼끼>를 살펴보면, 단테 ‘신곡’의 소환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었던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시대의 분위기에 동참하여 창작된 작품이 정치의 선전도구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푸치니가 1919년에 작곡한 <로마찬가, 1919>는 파시스트당의 행진곡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곡은 로마와 리소르지멘토를 주제로 한 것으로, 파시즘이 대두되기 전 작곡 되었지만, 프로파간다에 푸치니가 협조한 증거라고 몇몇 음악학자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파시스트가 이탈리아를 지배할 당시 힘의 논리에 지배당했던 철학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밖으로 팽창하고 그것을 지탱하고 지배할 힘을 얻었다. 문명을 창조한 주체로 그것을 지배할 힘의 근거를 정치에서 보고 그 정치적 힘을 로마제국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로마제국을 향한 무솔리니의 열정은 파시즘이 생각하는 위대한 논리로 자리 잡았으며, 푸치니의 <로마찬가>는 그들의 생각을 투영한 것이라고 생각 할수 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셔츠단.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은 푸치니를 적극적으로 찬양하며 이들을 푸치니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내 신문들의 부고문에 “오페라에 있어 세계를 정복한 작곡가”, “국위를 선양한 영원한 외교관” 등 푸치니의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는 문구들이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등장했다. 무솔리니도 공식적으로 푸치니를 “조국의 가장 순수하고 찬란한 영광중 하나이며 국보”라며 극찬하였으며 이는 국가적 자부심과 예술적 성취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전도구였다.

이러한 오류 세력의 접근은 예술가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예술가에게는 큰 오점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의 순수예술로 푸치니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오페라를 간혹 왜곡된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녀린 여주인공의 희생을 당시 베리즈모 오페라 유행의 한 사조로 보기보다는 힘의 논리를 앞세운 파시즘의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라고 호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부 학계에서는 이러한 시각으로 푸치니를 바라보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가에게 다가서는 오류 세력의 프로파간다의 모습을, 작곡가 푸치니에게 투영해 보았다. 실제로 이러한 계속된 정치 사회의 예술을 향한 프로파간다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탈리아 리리코 극장에서 연설하는 무솔리니.
조지 오웰의 말처럼 진정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인 것인가? 사회를 담고 사회를 끊임없이 진보시키는 예술을 보자면 조지 오웰의 주장이 한편으로 맞지만, 물질이나 권력의 유혹에 빠져 예술이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자신의 철학을 굳건히 담은 예술의 모습은 프로파간다를 뛰어넘어 사회를 향한 부단한 질문을 던지는 예술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선거의 계절을 앞두고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맞이해 그가 남긴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를 살펴보며, 우리 사회가 예술을 품길 위한 노력을 다시 한번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푸치니
1919년에 푸치니가 작곡, F. 살바토리가 작사한 노래 <로마의 찬가-Inno a Roma>는 파시즘이 대두하기 전에 작곡되었으나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많이 애용되었다. (가사축약 내용: 거룩한 로마, 수도에 견결히 선 네게 녹색의 월계관을 씌운다 네게 우리의 힘과 자부심을 안겨주며 너를 찬양한다…. 자유와 희망의 서광이 비치고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너의 진정한 기사도 정신이 있는 로마는 최고다, 로마는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