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ㆍ김민기 '세기의 만남'… '아침이슬' 열창한 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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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조용필ㆍ김민기 '세기의 만남'… '아침이슬' 열창한 용필
국소남의통기타- 노스텔지어 7080Ⅵ
둘다 40분동안 말없이 술만 마셔
  • 입력 : 2017. 11.22(수) 00:00
70년대 말 8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가왕 조용필.
민중음악계의 최고의 거장 김민기와 자타가 공인하는 가왕 조용필의 첫 만남에 대해 음악평론가 강헌이 말했다. 상식적으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거장의 만남은 어떠했을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수라 궁금했다. 방배동 조용필의 단골 일식 술집에서 김민기와 조용필은 왜 말 한마디 없이 40분 동안 소주만 마셨을까. 왜 조용필은 김민기 앞에서 '아침이슬'을 불렀을까.



● 조용필ㆍ김민기 '전설이 만나다'

대한민국 현대 가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가수. 도저히 만나지지 않을, 만나게 되지 않을, 장르가 다른 두 가수가 마치 음악적 장르에서 모순이 싹터 있는 보수와 진보의 양대 산맥처럼 느껴지는 두 사람 조용필과 김민기가 자리를 함께 했다. 귀가 쫑긋하다. 정말 그들이 만날 수 있을까. 기대치가 커 호기심을 넘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음악평론가 강헌의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야기를 녹취해 얘기를 풀어본다.

때는 1997년 겨울 어느 날, 강헌과 조용필이 술자리에서 한 얘기가 시작의 단초다. 조용필의 인기가 하늘이라도 찌를 듯, 최고조에 달하던 그 무렵, 조용필은 자신의 음악적 영역 외의 타 뮤지션에 대해 과연 얼마나 관용하고 인정하고 있었을까. 워낙 자신의 음악세계가 확고하고 타 뮤지션을 인정할 만큼의 심적 여유라도 있었을까.

아마 본인이 한국의 제1인자임을 자부하고 있음을, 자타가 공인하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던 시대적 상황이 그걸 뒷받침해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술자리에서 "형(조용필을 가리켜)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뮤지션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면 서로 다른 장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타 뮤지션 중 한명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조용필은 "김민기"였다. 강헌은 깜짝 놀랐다. (신중현이나 김홍탁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김민기를 인정한다는 말에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조용필 자신이 갈 수 없는 길,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존경을 나타낸 말이기 때문이다.

그 뒤 얼마 후. 강헌이 역시 방배동 술자리에서 국내 포크 선두주자 김민기를 만났다. "형, 조용필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김민기의 답은 놀라웠다. "너 내가 싫어한다고 말할 줄 알았지. 실은 나 조용필 좋아한다"고 답했다.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올 때 조용필의 노래를 듣고 큰 위안을 받았다고 자신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자기도 그의 음악세계를 존경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만나보시겠습니까" "좋지"

강헌은 그 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조용필이 자주 다니는 방배동(조용필이 살던 동네) 일식집에서 만난다. 약속한 당일, 3시간 전쯤 강헌은 김민기를 만나 시간을 때우다 택시를 타고 대학로에서 반포대교를 지나 방배동에 다다를 즈음, 빛바랜 버버리 코트를 입은 김민기는 차안에서 아무 말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낮고 묵직한 특유의 베이스 톤으로 "헌이야 오늘 술값 내가 낸다." 뜬금없는 얘기가 충격이었다. 택시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걸 걱정하고 내린 결론이 "술값은 내가 낸다" 였다. 그것도 우아하고 장엄한 목소리로 말이다. 강헌은 "그만 돌아가자"라고 말할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제 중년(40대 중반 조용필 50년생ㆍ김민기 51년생)의 두 사람이 만나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마치 김민기의 표정에서 세기의 매치(Match)를 겨루는 파키아오와 메이웨더의 심정이라도 된 듯 보였다. 그렇다. 세기의 매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앞에 있었다.

헌데 누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느냐가 또한 걱정거리였다. 내놓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감정싸움이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도 아니건만. 걱정은 기우였다. 도착해서 식당에 들어서니 오너 쉐프가 "조용필이 먼저 와서 방에 기다리고 계신다" 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악수하고 자리에 앉아 어색한 침묵 속에 시간만 갔다. 그 침묵의 시간이 40여분이나 걸렸다. 소주만 20병이 비워졌다. 세 사람은 정말 아무 말없이 밤 10시 반이 될 즈음 그 식당을 나왔다. 밖은 추웠다. 헌데 조용필이 부근 허름한, 70년대식 풍경이 물씬 풍기는 카페로 인도했다.

종업원은 없었고 나이든 마담이 수퍼스타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허름한 룸으로 안내했다. 위스키 한병을 셋이서 원 샷하고 또 침묵의 시간. 조용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는 낡은 노래방 기기(작동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은)로 가더니 쪼그려 앉아 번호를 직접 누른다.

● 조용필, 카페 룸서 '아침이슬' 열창

그 노래는 '아침이슬'이었다. 한국 최고의 가왕이 작곡가 김민기 앞에서 '아침 이슬'을 멋드러지게 열창(사전연습이라도 해온 듯)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조용필이 '아침이슬'을 부름으로 해서 순간 실내공기는 밝아졌다. 서먹서먹한 눈맞춤 하나로 보낸 긴 침묵의 시간이 '태양은 묘지위'가 아닌 두 남자의 어깨 위에 타오르고 있었다.

● 조용필ㆍ김민기 '아름다운 엔딩'

강헌이 말하길 "내 인생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순간은 그날 밤 조용필이 김민기 앞에서 '아침 이슬'을 부른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술회했다. 1998년 당시에도 조용필은 몇 천명 규모의 콘서트(체육관ㆍ운동장)만을 고집하던 시기였다. 강헌이 제의했다. "대형 매머드 공연만 할 게 아니라 진정 팬을 위한다면 근거리에서 침 튀기며 이마에 흐르는 땀까지도 볼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을 시도해 보시면 어떨까" 설마 했는데 "한번 해보지 뭐" 곧바로 소속사에 전화하고 대학로 소극장(500석 규모)에서 1개월간 공연이 진행됐다. 첫날 총 리허설이 끝나고 김민기가 꽃다발을 들고 몇 달 전 초청에 답례했다. 사나이들의 우정이란 게 이런 것인가.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선구자적 음악성과 보수적 가치만큼 진정한 카리스마와 강인한 여유가 느껴지는 김민기. 한국 대중 음악사에 가장 긴 세월(40년)동안 가왕으로 진면목을 보여준 조용필. 주류와 비주류의 두 거장 조용필과 김민기. 동시대에 태어난 그 둘의 만남만으로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문명의 절반은 쓸 수가 있겠다.

(15)1976년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국의 마이클 잭슨 조용필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3남4녀 중 6번째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송산초교, 경동중, 고교(1968)를 졸업했다. 80년대 조용필의 이름을 알린 기념비적인 음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1976)는 원래 1972년 독집앨범에 통기타 버전으로 실린 곡이다. 당시 재일동포의 모국방문 러시에 초점이 맞춰 안치행이 1976 버전으로 재탄생 시켰다. 가사도 '내님아'가 '내 형제여'로 바뀌었다. '너무 짧아요' '정' '돌아오지 않는 강' 등이 담긴 이 음반 B면은 안치행이 이끌던 영사운드 노래로 채워졌다. 마침내 이 음반은 대박을 치게 된다. 4년 뒤 1980년 3월 20일 발표한 조용필의 정규 앨범은 우리 가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 1. 창밖의 여자 2. 돌아와요 부산항에(약간 리메이크) 3. 단발머리 4. 잊혀진 사랑 5. 한 오백년 6. 돌아오지 않는 강 7.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8. 정 9. 대전부루스 등이 실린 이 음반은 역사상 최초 100만장 판매 실적을 올린다. 하지만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빅히트 후 대마초 파동에 뒤늦게 연루돼 활동이 전면 금지되고 만다. 80년대 신화를 쓰기 시작할 때까지 무려 3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수많은 수상 경력, 40년간 따라다닌 '가왕'이란 닉네임 역시 그를 다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16) 1977년 산울림 1집 (아니 벌써)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가벼운 아침 발걸음 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이리저리 지나치는 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아니벌써ㆍ산울림)

● 그해 겨울, 노래는 신선했다.

1977년 12월 말. 그야말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 음반 덕분에 1970년대 전체가 빛났다. 이 노래가 빅히트 한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가 그다지 밝지 못해 밝은 리듬과 건전한 가사가 어둡던 국민적 정서와 맞물렸다. 1975년 크메르에 이어 월남이 적화된 직후 5월13일. 국가안보와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유신체제 찬반 국민투표가 2월12일 73%(980만명 찬성)로 가결됐다. 1976년 8월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미군장교 2명이 살해돼는 사건이 발생했고, 1977년 11월에 이리역 화약폭발 사건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난 어수선한 시기였다. 부가세 실시,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의료보험 실시 등 굵직한 일이 1970년대 중ㆍ후반 이어졌다.

●70년대 절망적 상황서 변화 이끌어

산울림은 연예계 대마초 파동과 가요사전 심의제로 진공상태에 빠졌던 70년대 후반 가요 팬들이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생기이자 발랄함이었다. 그랬다. 시작은 늘 설렌다. 변화를 확인할 기회다. 산울림. 이들은 암울하고 무겁고 절망적이던 1970년대 음악 신에서 그나마 즐겁고 가벼웠으며 희망적인 위안이자 위로였다. 단언컨대, 이는 김민기도, 한대수도, 신중현도 선사하지 못했던 크나큰 덕목이었다. 리더 김창완, 김창훈, (고)김창익 3형제는 그만큼 위대했다. 1978년 초 '아니 벌써'외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골목길' '안타까운 마음' '그 얼굴 그 모습' '불꽃놀이' '문 좀 열어줘' '소녀' '청자' 등 수록곡 모두가 대한민국 음악계를 강타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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