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2000구 화장한 '二千骨' 동학혁명 땐 치열한 스무날 격전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특별기획
정유재란 2000구 화장한 '二千骨' 동학혁명 땐 치열한 스무날 격전
남도마실 금성산성의 아픈 이야기
연동사 있는 골짜기 이천골
남문앞 협곡에 시신들 모아
유족들 수습 감당할 수 없어
  • 입력 : 2018. 01.15(월) 00:00
담양군 금성면에 자리잡고 있는 금성산성은 정유재란과 동학혁명 당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곳으로 호국의 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다. 눈으로 뒤덮인 보국문일대와 산성 주변. 사진 제공=정승준ㆍ김영자씨
근래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남부지방에 폭설이 내렸다. 부산과 창원지방에도 많은 눈이 내려 교통대란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북새통에 사진작가와 지인이 몇 장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 설경이 아름다운 금성산성이다. 금성산성은 장성의 입암산성(立岩山城),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 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20여 년 전 잡지사 편집위원시절 금성산성 취재중 어디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따라 찾아 간곳이 노천법당이다. 그 근처에 작은 암반사이에 야트막한 굴이 있었으며, 한 스님이 그 속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찾아가는데 오솔길에 넘어진 소나무에 '下心 하라' 작은푯말을 걸어 놨는데 상당히 인상적 이였다. 그때 그 곳의 연동사(煙洞寺)란 사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연동사가 있는 골짜기를 이천골(二天骨)이라 부른다. 바로 남문앞 협곡으로 정유재란 때 금성산성 일대에서 2000명이 넘는 주검들을 이 골짜기에 쌓아 두었다. 유족들이 이 소문을 듣고 시신이라도 수습하러 왔으나, 도저히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유족들은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더미 위에 향불을 하나씩 피웠는데 그 향 연기가 안개처럼 온 산을 뒤덮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연기 연(煙) 자에 마을 동(洞) 자를 써 연동사라 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무슨 연유로 지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절 이름에 대한 유래가 전해 내려올 뿐이며, 불교유적 2기가 있다.

금성산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대표적인 형태로 산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능선을 따라 축조했다. 평야를 앞에 둔 산에 자리 잡는 것이 보통인데, 평지와는 동떨어진 깊은 산 속에 자리잡고 있다.



담양군 금성면과 용면,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과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성은 해발 603m되는 산성산을 주봉으로 하고 북동쪽에 시루봉(525.5m), 남서쪽에 노적봉(439.0m), 서쪽에 철마봉(484.4m) 등으로 이어진 가파른 능선과 깎아지른 암벽을 이용하여 골짜기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광주리처럼 가장자리가 높고 중앙이 낮은 고로봉의 지형에 쌓아 풍부한 물과 넓은 활동공간을 갖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능선을 따라 내성과 외성으로 성벽을 쌓았다. 산성은 외성 6,486m, 내성은 859m에 이르며 돌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터가 있는데 통로 이외에는 사방이 30여m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통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금성산의 주봉인 철마봉을 비롯하여 일대의 산지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또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성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으며 가운데는 분지여서 요새로는 완벽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 같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남원성과 함께 의병의 거점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산성의 수축 논란이 일어날 때 이항복은 선조에게 "담양은 산성이 크고도 더욱 웅장하여 평양성보다도 더 우수합니다. 사람의 힘은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2/5나 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금성산성의 중요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 정유재란 때 왜적이 전라도의 여러 성을 둘러보고 모두 그 허술함을 비웃다가 담양의 금성(金城)을 보고서는 "만약 조선이 이 성을 고수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락시킬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1895년에 제작된 금성진도와 고문헌을 살펴보면 금성산성은 외성, 내성, 성문, 옹성, 망대 등을 갖추고 있다. 성내에는 동헌, 내아, 삼문, 사찰, 화약고, 진리청, 승대장청, 연환고, 소금과 간장을 보관하는 창고 등 중요 건물과 성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민가까지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이렇게 볼때 산성으로 그 위용은 대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성산성의 전체길이는 7,345m이며, 외성(外城)이 6,486m, 내성(內城)이 859m이다. 연면적은 1,197,478㎡(362,237평), 내성(內城)의 면적은 54,474㎡(16,478평)이다. 부속 시설물로 성문 6개소, 여장, 치, 장대, 수구 2개소, 사찰을 포함한 건물지 12개소 등의 유구와 기와조각, 자기조각 등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산성의 축조 시기는 고려 우왕 6년 고려사절요에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말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종 10년(1440)에 고쳐 쌓았고. 그 후 세종 16년 무렵에 폐기되었다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다시 수축하여 사용된 이래, 광해군 2년(1610)에 외성 개축, 광해군 14년(1622)에 내성에 대장청 등 건물을 세우고, 효종 4년(1653)에 내성을 수축하는 등 여러 번 수리와 개축을 거듭하면서 1895년까지 사용하였다.

1688년(숙종 14) 당시만 해도 성내 주민호수가 136호로 꽤 큰 마을이 있었다. 2부3현 담양부, 순창부, 창평현, 옥과현, 동복현을 관할했는데 이곳에서 거두어 드린 군량미 근 2만여 석 정도 이었다고 한다. 평상시 상주군만 600~800명 정도로 요즘으로 본다면 작은 여단정도의 병력 이였다. 2만여 석의 군량을 비축해 산성의 유지와 보수, 산성에 주둔한 관리의 급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난이 발생되면 성안에는 병사들과 지방의 관속과 토호세력 까지 칠천여명까지 상주 할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금성산성은 주변이 절벽이라 접근이 어려운 지리적 특성과 막강한 병력과 병참기지로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거점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대혈전의 전투장으로 12월 전봉준의 지휘하에 동학농민군 1,000여명이 20여일간 관군과 피비린내 나는 동학농민의 마지막 전투장으로 끝에 전원 희생 또는 체포된 금성산 유적지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점은 이 전투에서 금성산성의 각종 문화 유산이 완전히 파괴됐다. 문루는 두 곳 남아 있고 외남문을 보국문, 내남문을 충용문으로 부른다. 모두 1994년 동문, 서문과 함께 복원하였다. 전라남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8월 24일 사적 제353호로 변경되었다.

만설이 지나 초봄에는 동학농민군, 정유재란의 2000여명의 주검을 위로 하듯 진달래가 만발하는 이천골에 막걸리 뿌리며 그들을 위한 재를 지내 볼꺼나.


박재완 남도마실 대표
특별기획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