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고의 앙상블… 안익태ㆍ금난새ㆍ정명훈도 지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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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지상 최고의 앙상블… 안익태ㆍ금난새ㆍ정명훈도 지휘봉
백홍승의 클래식 카페 세계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베를린 필하모닉ㆍ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882년 10월 첫번째 정기연주
거장 푸르트벵글러 타계하자
대신 섰던 카라얀 종신지휘자로
  • 입력 : 2018. 02.22(목) 21:00
베를린 필하모닉. 필자 제공



수십여 년 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타이틀을 가졌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ㆍ2002년부터의 공식적인 명칭이다)와 또 그만큼의 세월동안 클래식계의 제왕적 지위에 있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늘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서 인식되어왔다.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1882년 여름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이라는 이름을 내걸었고, 이 해 10월23일에 제1회 정기 연주회를 가졌다. 사실상 베를린 필하모니의 창단 연주회로서 당일의 지휘자는 프리츠 베르너였다. 초대 상임 지휘자 한스 폰 뷜로를 시작으로 제2대 상임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를 거쳐 1922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30대의 나이로 제3대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면서 기존의 레파토리에 스트라빈스키나 라벨, 쇤베르크, 바르토크, 힌데미트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들까지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레파토리의 확장과 더불어 강력한 카리스마로 악단의 체계를 잡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54년에 유럽 클래식계의 거목(巨木) 푸르트벵글러가 타계한 뒤 이듬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대타로 전후(戰後) 최초의 미국 공연을 이끌었다. 1956년 정식으로 종신 상임 지휘자에 취임한다. 이후 30년도 넘게 자리를 유지하면서 도이치 구라마폰과 EMI 등의 메이저 음반사들과 수백장의 음반을 발매하면서 큰 명성을 떨침과 동시에 영상물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획과 주도로 '찰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를 창설하여 오페라 상연이나 녹음에 베를린 필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업적으로 베를린 필을 세계 최정상급의 오케스트라로 발전시킨 카라얀은 독재적인 운영으로 인하여 임기 후반부에는 단원들과의 잦은 마찰로 불화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카라얀 사후 새 상임지휘자로 로린 마젤과 다니엘 바렌보임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각각 반대하는 단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절충안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새 상임 지휘자로 선출되었다. 2002년 아바도의 후임으로는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2018년 여름까지가 계약 기간이다.

독일 출신 일색이었던 베를린 필 단원들의 국적은 카라얀 재임기의 오랜 시간을 거치며 국제적으로 면모했는데 여기에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예로 1963~64년에 새로운 호른 수석 주자를 뽑을 때 카라얀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스웨덴 출신 연주자가 호른 단원들의 반대로 채용되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다. 1969년 플루트 수석을 뽑을 때도 카라얀이 추천했던 제임스 골웨이에 대해 목관 단원들의 거부감이 심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제임스 골웨이의 자서전에 따르면 베를린 필의 목관악기 단원들이 리허설 중 음정을 반음이상 다르게 튜닝 한 상태에서 연주하며 제임스 골웨이를 당황하게 만들어 조롱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카라얀의 후반기 임기에 이르러는 실력이 뛰어나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입단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플루트의 제임스 골웨이(영국), 비올라의 쓰치야 구니오(일본), 바이올린의 야스나가 도루(일본)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야스나가는 이후 악장(콘서트마스터)으로 선임됐다. 베를린 필의 국제적인 특징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쓰치야와 야스나가 이래로 일본인 현악 단원들이 수석급이나 악장(콘서트마스터)을 맡는 경우도 늘어나게 된다. 2009년에는 야스나가의 뒤를 이어 카시모토 다이신이 두 번째 일본인 악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너무나 도전 의식이 생기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을 지휘한 한국인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베를린 필을 지휘했던 한국 지휘자는 안익태, 금난새(카라얀 지휘 콩쿨 4위의 부상으로 서곡1곡을 지휘함), 정명훈 이렇게 세 명이다.

베를린 필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전용 콘서트 홀을 가지고 있는 오케스트라다. 1963년에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개관하였으며 개관 공연으로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합창'이 연주되었다. 탁월한 음향을 자랑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후에 카라얀이 동양의 보석 상자라고 극찬했던 도쿄 산토리홀의 설계 모델이 된다.

오케스트라의 음악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향이다. 광주 지역 유일의 1000석 이상 연주홀인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1722석)의 음향 문제는 부끄러운 수준으로 클래식 연주회 때 만석 기준 잔향은 1.4초에 불과하다. 잔향이란, 실내 연주에서 나는 소리가 울리다가 그친 후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로, 실내 음향 효과를 내는데 중요한 요소다.

클래식 공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 극장의 잔향은 2.2초~2.6초 정도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광주시향은 40여년의 세월 동안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기에 극히 부적합한 환경에서 음악회를 해 온 셈이다.

클래식 음악회에서 제 1순위로 중요한 요소인 음향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전혀 고려되지 못하고 있는 지역의 척박한 여건 속에서 우리는 무모하게도 늘 광주시향의 갑작스런 발전만을 기대하고 있다.

변변한 아이스링크(Ice rink)장 하나 없던 나라에서도 김연아가 나오지 않았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광주시향 단원들은 피겨스타 김연아가 아니다. 동계스포츠 불모지 우리나라에서 김연아는 1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로서 일반화된 예로서는 너무나 부적합하다.

도쿄 산토리홀은 일본의 유명한 음료회사인 산토리(Suntory)회사에서 지어준 것이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국민소득 3만불 시대가 눈앞에 있다고 야단법석이니 우리 지역에도 이제는 한전이든 기아든 무슨 기업의 이름으로든지 클래식 전용홀 하나 정도는 생길만 한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천재 마에스트로? 흉악한 나치스트?


거장이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세계 클래식 절대적 영향력
나치당 가입 후 승승장구 전력
1984년 세종문화회관 공연땐
"날 보려면 대통령도 대기실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ibert Ritter von Karajan)은 단순히 '거장' 정도의 단어로는 표현이 충분치 않은 인물이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 잘츠부르크음악제의 음악총감독으로서 절정의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는 세계의 음악가들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의 눈에 들어야 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곧 출세의 보증수표였다.

1979년 아키오 모리타 일본의 음향기업 소니 사장은 곧 레코드 혁명이 도래한다는 정보를 카라얀에게 말했다. 카라얀은 그 후 행해지는 자신의 모든 레코딩을 디지털로 만들 것이라고 공표했다. 카라얀은 거의 모든 음악을 암보로 지휘하는 천재적인 지휘자였으며, 또한 시대를 앞서가는 타고난 비즈니스맨이었다.

카라얀은 1917년 1월27일 잘츠부르크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1989년 4월 23일 빈에서 있었던 그의 마지막 연주회에 이르기까지 총 3524회의 공연을 가졌다. 또 1938년 12월부터 1989년 4월까지 음반 509종, 영상물 78종이라는 어마어마한 음악 콘텐츠를 남겼다.

카라얀은 유럽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을 모두 장악했다. 오페라 연출, 음악 영화 연출, 매니지먼트 사업 등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스타였으며 요샛말로 갑 중의 갑이었다.

카라얀은 1908년 4월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외과 의사인 유복한 가정이었다. 성에는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붙었다. 카라얀은 어릴 적에 피아노의 신동으로 유명했으나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할 때 스승으로부터 지휘에 집중하라는 충고를 받고 지휘로 전향했다.

1928년 12월 27일 빈에서 처음 정식으로 지휘대에 서 보았던 카라얀은 193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파우스트'를 지휘하며 데뷔한다. 카라얀은 1933년 나치당에 가입했고, 이후 이것은 나치의 협력자라는 그를 향한 가장 큰 비난의 이유가 되었다.

실제로 나치당에 가입한 후 그는 승승장구한다. 1934년 카라얀은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했고 1937년 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했다.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아헨 극장의 음악감독겸 지휘자로 일한 카라얀은 1939년에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까지 오른다.

유대인이었던 부르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프리츠 부슈 등의 당시의 일류 지휘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한 후 생긴 독일 음악계의 빈틈은 카라얀에게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훗날 카라얀은 음악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당시 나치당 입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펴면서 본인의 입장을 변명하고 동정적 여론을 조성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훗날 아무도 카라얀을 통제 할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간 후에는 오히려 1967년 12월2일자 '뉴요커'지(誌)의 인터뷰 기사 내용처럼 당당하고 거침없는 답변을 한다. 그의 나치 가입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에 대해 카라얀은 "당시의 입당이 지휘대(指揮臺)를 확보하기 위한 편의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범죄라도 저질렀을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떤 식의 변명이든 그가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살아 있을 때 그는 약삭빠른 카라얀을 매우 싫어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죽자 한 언론이 과감히 외쳤다. "왕은 죽었다. 새 황제 만세!"

푸르트벵글러가 살아있을 때 이미 베를린 필은 1955년 2월에 전후(戰後) 첫 미국 연주여행을 계약해 놓은 상태였다. 카라얀은 미국 여행의 지휘를 맡는 대신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 자리를 요구했다. 카라얀 이상의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베를린 필은 어쩔 도리가 없이 그 조건을 수락하고 만다.

뉴욕에서는 "나치 고 홈"을 외치는 시위가 줄을 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연주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때 뉴욕 타임스에 이런 유명한 기고문이 게재된다. "나치즘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문제 삼은 것은 정치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다. 나치는 삶의 방법적 측면에서 도덕을 배신한 인간들이다. 허울 좋은 '정치적 관용'에 속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항상 도덕이므로…."

1960년대 말까지 카라얀은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1964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이사로 임명되어 전권을 휘둘렀으며 1967년에는 잘츠부르크 부활절음악제를 만들어 예술총감독에 취임했다. 1968년에는 베를린에서 카라얀 재단을 설립하고 카라얀 지휘 콩쿠르까지 개최해 여러 지휘자들을 배출했다.

니콜라이 겟다ㆍ군둘라 야노비츠ㆍ아그네스 발차 등의 성악가들을 발굴했다. 안네 소피 무터(바이올린)ㆍ자비네 마이어(클라리넷)ㆍ예프게니 키신(피아노) 등을 대가로 키워낸 사람도 카라얀이었다. 말 그대로 카라얀의 시대였다.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아티스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카라얀의 사진과 기사들을 모으고, 카라얀의 연주회 때마다 따라다니는 극성 팬들이 줄을 이었다. 이른바'카라얀 병' (Karajan-krank)이었다.

1984년 10월27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그가 이끄는 베를린 필의 첫 내한공연이 펼쳐졌다(당시 떠도는 이야기로 대통령이 카라얀을 만나보기를 원했는데 카라얀은 나를 만나려면 공연장 대기실로 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1989년 7월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진정 클래식 음악계의 제왕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든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목적을 너무 낮게 잡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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