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누나야'… 혁명을 넘어 사상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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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엄마야 누나야'… 혁명을 넘어 사상을 넘어
안성현과 안기옥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입력 : 2018. 05.10(목) 21:00
안성현 노래비. 나주시 제공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너무나 익숙한 김소월의 시다. '진달래꽃' 못지않게 전 국민이 애호하는 시(詩). <개벽> 1922년 1월호에 실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노래를 들어보니 익숙한 가락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서정적인 동요와 한참이나 거리가 있어 보인다.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장중하다. 육중하다. 무겁고 도도하다. 동요 중에서도 가장 서정적인 맥락을 담고 있는 노래 아니던가? 그렇다. '엄마야 누나야' 노래가 두 개다. 낯설게 느껴지는 노래는 4분의 4박자다. 보다 익숙한 동요는 4분의 3박자다. 현상적인 차이가 박자의 쓰임새에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박자의 활용 못지않게 성음의 굴림 또한 다르다. 전자가 행진곡 같은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면 후자는 아침이슬 같은 청아함을 담고 있다. 예컨대 가곡과 민요의 비교라고나 할까? 전자가 도도한 드들강의 흐름이라면 후자는 아기자기하게 흐르는 샛강의 흐름을 연상할 수 있게 해준다. 앞노래는 안성현이 곡을 붙였고 뒷노래는 김광수가 곡을 붙였다. 안성현이 먼저 곡을 붙였는데 금지곡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다.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안성현이 작곡한 곡 하나를 더 보면 이해가 쉽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오리에/ 하늘만 푸르러~푸르러". 이 노래 또한 한때는 불러서는 안 되는 곡이었다. 왜일까? 이른바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불러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서정적인 가사에 비해 매우 장중한 선율이다. 그렇다고 혁명적인 노래도 아니다. 가사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안다. 빨치산(가요를 뽕짝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게 부담스런 호명이다)이 즐겨 불렀다는 정황은 맞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 곡을 지은 안성현에게 있다. 대표적인 월북 작가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작곡가가 한 패턴의 노래만 짓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두 노래는 닮아 있다. 가사의 민요적 풍경과 서정이 그렇고 선율의 장중함이 그렇다. 근자에 이 곡을 노래하는 가수들이 많이 늘었다. 시절이 좋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1997년 안치환을 필두로 한영애, 이동원 외에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가수들이며 일반인들을 볼 수 있다. 노래방에 가면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곡에 얽힌 우여곡절이 많다.



안성현의 월북과 박기동의 애환

이제는 이런저런 지면들을 통해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다. 안성현은 영산강의 한 지류인 나주 지석강(드들강)변 출생이다. 일본에 도호음악대학을 나왔다. 귀국한 후 목포 항도여자중학교에 근무했다.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다. 1948년, 동료교사 박기동이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며 부용산(芙蓉山)이란 시를 쓴다. 전 해에 누이 박영애가 스물넷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벌교 부용산 아랫자락에서 자랐던 모양이더라.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이 들어선 뒷산이다. 그뿐인가. 곡을 붙인 안성현의 누이 안순자가 열다섯의 나이에 요절한다. 박기동의 시에 안성현이 곡을 붙인 것이 필연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1948년 4월 11일 목포 평화극장에서 5학년생 배금순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순사건과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연행과 구금을 번갈아 당하던 이들에게 이 노래는 어떤 의미였을까? 유치의 계곡으로 지리산으로 도망하던 이들이 불렀던 서정의 노래 부용산 말이다. 지금은 목포여자고등학교 입구와 드들강변 자락에 안성현의 노래비가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더 이상의 말이 없다. 안성현의 비를 세울 수 있는 세상이 왔다는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랄까. 그렇다면 안성현은 왜 월북을 하게 되었을까?



안성현은 왜 월북하였나?

안성현이 불가피 월북하게 된 이유를 여러 가지 거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설은 아버지 안기옥 때문이라는 점에 있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1950년 목포에서 공연을 하고 북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북에 있던 아버지 안기옥을 만나보기 위해 이들을 따라 월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안기옥은 1930년대부터 민속음악연구소를 개설하고 산하 창극단과 민족음악단을 설립하여 민족혼 고취에 나선 사람이다. 당시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지어 민족혼을 일으켜 세우려던 담양의 박동실과 쌍두마차격의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46년 평양으로 가서 조선음악연구소의 소장을 맡는다. 이후 북한 1급 배우 칭호를 받기까지 북한 음악의 토대 역할을 하게 된다. 북한의 초기 음악사에서 성악의 박동실, 기악의 안기옥, 무용의 최승희를 빼면 이야기할 게 없어진다. 그만큼 중심이었다는 뜻이다. 안성현도 아버지를 닮아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다. 지금 남한에 남아있는 열 한곡의 노래만으로도 그 지형을 짐작해볼 수 있다. 민감한 문제이니 추정은 불가하다. 대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안성현의 월북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점, 혹은 그의 음악세계가 지향했을 민족음악의 문제 정도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름도 거론하지 못하던 시절을 지나 나주시, 영암군을 중심으로 안기옥(스승 김창조) 선양사업을 벌이고 있고 '안성현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일부의 반대가 있기 때문에 순조롭지는 않다. 주의할 점이 있다. 관련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안기옥, 안성현 집안과는 관계가 없다. 안성현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소개에 안막을 연결시켜놓은 정보들은 대거 수정해야 한다.



가야금을 집대성한 안기옥은 어떤 사람인가?

나주 드들강변 사람 안기옥은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가야금산조를 집대성한 사람이다. 본래 심방곡 등으로 불리던 가야금 독주 장르를 창조한 것은 영암의 김창조다. 우리가 흔히 국악이라고 호명할 때 성악의 판소리 기악의 산조를 그 중심에 둔다. 이 중 산조의 시작이 가야금이었으니 그 중요성만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창조와 가야금 산조에 대해서는 지면을 따로 해 소개할 예정이다. 거문고산조, 창극, 음악극 등의 기획 연출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근자의 연구에 의하면 김창조 외에도 일명 '허튼가락'을 연주하거나 조직했던 사람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창조의 영향만큼은 부동의 사실이다. '심방곡'이니 '허튼가락'이니 따위의 호명방식에서 '산조(散調)'라는 이름이 왔다. 허튼(散) 가락(調)이니 흩어져 있는 소리들을 가지런히 모은다는 뜻의 한자로 수렴해 쓴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나주, 광주, 영암을 들락거리던 김창조에게 안기옥이 가야금을 수학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안기옥이 공부한 것은 김창조 뿐만이 아니다. 나주 남평의 가야금 명인 김달진에게도 심방곡이며 병창 따위의 수학을 하게 된다. 이때가 1900년 초반이고 김창조가 1856년생으로 1919년 타계하였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음악의 부침기이자 재창조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략한 생애는 팁에 부기한다.



비로소 부용산의 제2절을 노래할 때

안기옥으로부터 안성현을, 최승희로부터 안성희를, 그리고 박기동을 본다. 우리에게 매우 낯선 이름들이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입에 달고 불렀어도 작곡가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다. 노래방에서 부용산을 즐겨 부르면서도 그것이 무슨 노래인지 모르고 지내왔다. 무엇이 이들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던 것일까? 시대일까 이념일까 아니면 철학일까. 항도여중(목포여고)에 재직하던 당시 부용산 시를 지었던 박기동은 여수 돌산 출신이다. 1982년 76세의 나이에 호주로 이민을 간다. 가택수사와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은 몸이니 추방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이 귀국해 2002년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석하다. 2000년 그가 우여곡절 끝에 부용산의 제 2절을 지었다 하더라. 박기동에게 부용산은 어떤 노래였을까? 본래의 부용산도 그렇거니와 새로 지은 2절의 가사 또한 그렇다. 여기에 어떤 혁명이 있고 사상이 있나. 그렇다. 이제는 돌아와 부용산의 제 2절을 불러야하지 않겠나. 드들강변 자락에서 ‘엄마야 누나야’를 4분의 4박자에 맞춰 불러봐야 하지 않겠나. 비로소 안성현과 안기옥을 불러내고 영산강 산하 드들강을 불러내고 영변의 약산 산하 소월의 서해 바다를 불러내야 되지 않겠나. 눈을 들어 남도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말 없는 하늘이 무심하게도 푸르고 푸르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홀로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푸르러."




남도인문학 TIP 안기옥(安基玉ㆍ1894~1974년)의 생애



양승희가 편저한 '가야금산조 연구1'의 자료를 토대로 간략한 생애를 언급해둔다. 1894년 5월 28일 나주군 남평면 대교리에서 세습무계 안영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안영길은 농악의 명인, 할아버지는 젓대(대금)의 명인, 증조할아버지는 판소리 광대였다. 1902년 9세에 남도지역 가야금의 대가 김달진에게 심방곡 등을 배웠다. 1904년 11세부터 가야금산조의 시조라 하는 김창조에게 배웠다. 1909년 16세에 수양아버지 정장섭을 따라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함남도, 경기도 등지 전국을 다니며 공연했다.

1916년 23세에 화순 협률사에 참여한다. 1919년 26세에 3.1운동을 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1924년부터 3년여간 '리리협률단'에 소속되어 박동실(창작판소리 열사가), 백낙준, 정남희, 김창환, 리동백, 이화중선 등과 교우, 공연한다. 1926년 33세에 광주시청에서 요구한 일본 환영 공연을 거부하여 구속, 3개월 만에 석방된다. 1930년 37세에 서울에서 '조선음악연구소를 조직하여 박동실 등과 활동한다. 목포극장에서 협률단을 지도한다. 1934년 41세에 정남희, 임상문 등과 농악놀이를 사물놀이 형식으로 만들어 공연한다. 사실상 사물놀이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1936년 함흥으로 이사하여 권번(기생학교)을 꾸리고 1940년 이후 한양창극단을 꾸려 활동한다. '재일조선인 탄광노동자 위문단'을 조직해 일본 공연을 한다. 1942년 최승희 무용단에서 반주를 맡는다. 1945년 52세에 박동실 등과 함께 농촌위문단을 조직해 활동한다. 1946년 서울에서 민족음악연구소를 창립하고 산하 창극단과 민족음악단을 건립해 활동한다. 당해 평양으로 건너간다.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1차 국제청년학생콩쿨에서 가야금 산조를 연주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한다. 1948년 55세에 ’조선민족음악단‘을 창립하며 단장으로 임명되는 등 활동을 한다. 한국동란 후 1952년 공훈배우 최고 대의원에 임명된다. 1956년 전후 불멸의 금강산 등 수십 편의 가요를 작곡한다. 1957년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근무하며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전수한다. 1958년 음악가 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당선된다. 1959년 66세에 인민배우로 임명된다. 1966년 73세에 최고대의원, 인민배우, 국립예술극단 단장, 음악연구소 소장, 국제음악심사위원, 통일전선 상무위원의 직무에서 모두 해임된다. 풍산 채석 광산으로 쫓겨난다.

우리는 흔히 이를 숙청이라고 표현한다. 이 이유에 대해서도 따로 다루겠다. 1970년 77세에 양강도 예술단에서 근무하는 아들 안성현(엄마야 누나야 작곡가)집으로 돌아온다. 1974년 1월 14일 81세로 사망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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