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옥한 호남평야 젖줄… 동학농민운동 일어난 만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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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재발견
비옥한 호남평야 젖줄… 동학농민운동 일어난 만석보
定道 천년 전라도의 재발견
전북 서부지역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진강
노령산맥 서쪽 서해로 흐르는
총길이 44.7㎞ 짧은 하천
  • 입력 : 2018. 06.07(목) 21:00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낙양 취수문.
전라북도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진안군, 임실군, 순창군)으로 이어지는 노령산맥을 경계로 동부의 산간지대와 서부의 평야지대로 구분할 수 있다.

동부 산간지대는 다시 북쪽의 금강 수역(진안군, 장수군, 무주군)과 남쪽의 섬진강 수역(임실군, 남원시, 순창군)으로 구분되며, 서부 평야지대는 북쪽의 만경강 수역(전주시, 완주군, 익산시, 군산시)과 남쪽의 동진강 수역(김제시, 정읍시, 부안군, 고창군)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이 중 동진강은 전라북도 서부 평야지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호남평야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동진강(東津江)이라는 이름은 김제와 부안을 연결하는 나루터인 동진(東津)에서 유래했는데, 현재 부안군 동진면(東津面)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부안군의 상동면, 일도면, 이도면을 통합하여 과거 동진원(東津院)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면명이 붙여졌다.

동진강의 발원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데, 먼저 하천의 길이로 봐서는 정읍 내장산 까치봉(717m) 까치샘에서 시작되는 정읍천이 51.0㎞로 가장 길다. 그러나 수량으로 봐서는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 촛대봉(369m)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만경강의 원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4.7㎞).

촛대봉에서 시작된 물은 팽나무정 마을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하고(평사리천), 북쪽의 상두산(575m)과 엄재에서 시작된 상두천, 옹동면에서 시작되는 용호천, 내장산 까치봉에서 시작되는 정읍천, 고창군 신림면에서 시작되는 고부천, 김제 금산면에서 시작되는 원평천을 합류하여 김제 광활면과 부안 동진면 사이를 흘러 서해로 유입된다.

동진강은 정읍과 김제의 호남평야를 흐르는 하천이지만 만조시에는 현재의 신태인읍까지 바닷물이 밀려오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기 때문에 동진강 본류는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었다(해발고도 약 4m까지).

삼국시대에 동진강의 지류인 김제 원평천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와 정읍 고부천에 축조된 눌제는 바닷물을 막고 담수를 확보하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 따라서 동진강의 본류인 신태인읍 이 후의 하류는 농업용수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고, 지류가 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진강은 하천이 길지 않아 호남평야의 넒은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에는 수량이 부족했다. 넓은 농토에 공급할 수량이 부족했던 동진강은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산계획과 함께 동진수리조합이 결성되고(1925년), 동진강 주변의 홍수를 방지하고 농경지 확보를 위한 하천의 직선화 공사(1924년~1940년)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동진강의 수자원 확보를 위하여 노령산맥의 반대쪽인 섬진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사를 하였다.

즉, 섬진강 상류에 운암제(임실군 강진면 옥정리)를 축조하고(1925년~1928년, 높이 33m),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 굴등마을에서 노령산맥을 통과하는 759m의 지하 터널을 뚫어 서쪽의 정읍 산외면 종산리 팽나무정 마을로 섬진강의 물을 끌어들였다. 1931년에는 제2의 도수터널을 만들어 정읍 산외면 종산리에 유효낙차 77.02m를 이용하는 수력발전소를 만들었다(운암발전소, 1931년~1985년 폐쇄).

수력발전으로 이용한 물은 동진강으로 방출하여 농업용수로 공급되었다. 1945년에는 정읍 산내면 장금리에서 칠보면 시산리까지 6.2㎞의 칠보터널을 뚫어 유역변경식 발전소인 칠보발전소도 만들었다. 그리고 1965년에는 운암제 하류 2.4㎞ 지점에 국내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댐을 만들어 더 많은 수량을 확보하였다(운암제의 7배인 4억6600만톤).

산간지역을 흘러 수량이 풍부했던 섬진강에서 서쪽의 동진강에 유입된 물은 식수와 발전용으로도 이용되었으나, 주목적은 호남평야의 농업용수 공급이었다. 유역변경으로 섬진강에서 동진강으로 유입된 물은 정읍 동진강 본류를 따라 흐르다가 정읍시 태인면 낙양리 취수보에서 일단 멈춘다. 이곳에 모인 물은 동진강 본류와 김제 광활 방면, 정읍 고부 방면 등 3갈래로 나누어진다.

낙양 취수문은 1927년 동진강 본류인 정읍 정우면 대사리 사동마을과 태인면 낙양리 내이마을 사이를 막은 취수문인데, 농업기반공사는 매년 이곳 낙양동산에서 한 줄기의 물이 백갈래로 퍼져 광활한 농경지를 적셔준다(‘一源從是百派’라고 쓰여진 기념비가 있음)는 의미로 백파제(百派祭)라는 통수 기념식을 가진다.

2018년 4월27일에는 제91회 백파통수식이 열렸으며, 이곳에서는 4월부터 9월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낙양 취수문에서 분리되는 세 갈래 물줄기 중에서 동진강 본류의 북쪽으로 만들어진 김제간선(약 26㎞, 공급량 25톤)은 폭 14.5m로 1927년 2월에 완공되었는데, 낙양리에서 김제 백산저수지, 만경읍의 능제를 거쳐 김제 광활면 간척지까지 연결되어 있다(1949년 광활면으로 승격됨).

광활 간척지 사업은 1923년 10월부터 시작되어 1927년 가을에 방조제(10㎞, 학당마을~거전마을) 축조를 완성하고, 이 후 1935년까지 농지조성공사가 이루어졌다. 광활 간척지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김제간선에 의한 농업용수 공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들의 생활은 광활면 출신인 임영춘이 쓴 ‘갯들’(1981년)이라는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광활면 사무소 앞에 기념비가 있음). 또 하나의 물줄기인 정읍간선(20㎞, 공급량 4.5톤)은 동진강의 남쪽으로 흘러 정읍의 이평면을 지나 부안군 백산면에서 동진강 본류와 합류하는데, 1927년 2월 김제간선과 함께 완공되었다.

그리고 1965년 섬진강 댐의 완공과 함께 칠보 발전소(일명 섬진강 수력발전소)에서 부안군 계화간척지까지 약 67㎞의 동진강도수로를 건설하여, 칠보발전소에서 수력발전으로 이용한 물을 부안군 하서면 청호저수지까지 끌어들여 계화도(界火島) 간척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계화도 간척사업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제1방조제(3556m, 서쪽 방조제, 계화도~부안군 하서면 의복리 남돈마을), 제2방조제(9254m, 북쪽 방조제, 계화도~부안군 동진면 안성리 문포마을)를 완공하였다. 그리고 1978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내부 간척지를 조성하였으며, 섬진강 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던 지역주민 2000여 세대가 이주했다. 1983년에는 계화면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같이 동진강은 동쪽의 노령산맥에서 서쪽의 서해로 흘러가는 44.7㎞의 짧은 하천이지만,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이었기 때문에 과거 삼국시대부터 농업용수 공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본류의 하류 부분은 바닷물이 밀려오는 감조하천이었기 때문에 농업용수로 이용하는 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본류 보다는 지류에 벽골제(원평천)나 눌제(고부천) 등을 축조하여 제방 겸 저수지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노령산맥 동쪽의 섬진강 물을 유역변경으로 확보하면서, 1920년대 김제 광활 간척사업을 가능하게 하였고, 1960년대에는 부안 계화도 간척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칠보와 무성서원 동진강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지역의 중심지가 동쪽의 산지에서 서쪽의 평지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대산군(현재 정읍시 칠보면)에서 조선시대에는 태인현(현재 정읍시 태인면), 그리고 호남선 개통(1914년) 이후에는 신태인이 새로운 지역 중심지로 떠올랐다.

통일신라시대 대산군의 중심지는 현재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였는데, 당시 유학의 거장인 최치원(857년~?)이 890년에 태수로 임명 받았던 곳이다. 현재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정극인(1401~1481년)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상춘곡(賞春曲)’을 지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향약(1475년)을 만들었던 곳이다.

또한 조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1440~1521년)도 이 고장 출신이다. 그리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1833~1907년)이 의병을 일으킨 곳도 이곳 무성서원이었다.

동학농민운동과 만석보 동진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만석보(萬石洑)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정읍천의 하류 부분에 예동보(1938년)를 만들어 배들평(梨坪, 현재 정읍시 이평면)에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년)이 부임하면서 1893년 주민들을 동원하여 예동보 아래 동진강 본류와 정읍천이 만나는 지점에 정읍천을 가로막아 만석보를 만들고 보세(洑稅)를 징수하였다.

보세를 줄여달라고 건의하는 농민들이 관아에서 매를 맞고 나오는 것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1월10일 이평(梨坪)의 말목장터에 모여 다음 날(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를 헐어버렸다.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후 해산한 농민군은 3월20일 무장(현재 고창군 무장면)에서 다시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4월6일 황토재 전투, 4월23일 장성 황룡강 전투에 이어 4월27일에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다시 해산한 농민군은 같은 해 9월4일 삼례에 집결하여 북으로 진격하였으나, 11월9일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다가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조성욱 전북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전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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