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팠던 산업화시대에도 잃지않은 ‘맛’ ‘멋’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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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고달팠던 산업화시대에도 잃지않은 ‘맛’ ‘멋’ ‘흥’
산업화시대 디아스포라 호남人 에필로그
먹고살려고 떠난 타향살이
찌든 가난과 온갖 차별에도
전국에 ‘藝鄕’ 자부심 심어
  • 입력 : 2018. 11.15(목) 21:00
  • dkkang@jnilbo.com
재경광주전남향우회 정기총회.
전라도 사람들의 대이동은 곧 전라도 ‘맛과 멋’의 전파를 의미했다. 산업화에 밀려 직장을 찾아 타향으로 달려가야 했던 호남 출신들은 ‘예향(藝鄕)’ 전라도에서 먹고 자라고 느끼고 체험한 우수한 문화를 전국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맛집으로 소문난 곳은 전라도 출신이 운영하는 음식점들이 대부분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게미 있는’ 전라도의 손맛을 전파하는 전령사의 역할을 했다.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손맛을 활용, 적은 자본으로 가장 손쉽게 타향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 음식점이었다. 거창한 전라도음식 전문집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을 상대로 한 백반집, 공사장 현장식당, 전통시장 내 순대국밥집 등을 차려, 고향에서 익힌 맛깔스런 전라도 아낙의 ‘손맛’과 ‘입맛’을 전국에 퍼뜨렸다. 내로라하는 음식점마다 “전라도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자랑하는 것도 전라도 음식의 손맛 때문이다.

(사)한국외식업중앙회가 지난 2015년 소속 서울지역 25개 구단위 회장 가운데 36%인 9명이 전라도 출신의 회장이다. 또 현 한국외식업중앙회장을 비롯 경기도, 제주도 등 시.도단위 회장도 전라도 출신이 많다. 그만큼 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요식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상도로 이동한 전라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산업화시대 경상도로 이동했던 대구지역 전라도음식점 대표들이 자리를 굳힌 것도 전라도 음식솜씨였다. 대구 중심가에서 전라도 음식점을 표방하며 영업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음식점은 6곳 정도. 대구시와 호남향우회에 따르면 이들 음식점은 대구시민들의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식당들이다. 이 가운데 ‘호남정(湖南亭)’ ‘ 전라도 밥상’ 등은 대구시내 한 복판에서 전라도 이름을 달고 성업 중이다.

조기석 전 대구경북호남향우회장은 “경상도 사람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음식만은 전라도’라고 인정한다”면서 “대구에서도 음식점의 경우엔 전라도 상호를 달고 영업을 해도 잘된다”고 말했다.전라도음식의 전파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척도는 홍어 맛의 보급이다. 수도권 전라도 출신들이 많이 사는 곳이면 어김없이 홍어집이 생겨났다. 서울, 안산, 시흥, 성남 등 수도권을 비롯 부산, 울산은 물론 내륙 깊숙한 대구까지 홍어전문도매상이 생길 정도다. 바다 건너 제주시와 서귀포시에도 홍어집이 성업 중이다.

홍어가 전국화의 바람을 타면서 부동산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는 홍어집 창업이 인기 투자대상으로 분류되고 있음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고, 인터넷에 홍어 애호가 모임들도 눈에 띈다. 홍어요리도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홍어회,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찜에서 진화해 홍어전은 일반화된 지 오래고, 홍어튀김, 홍어초밥, 홍어라면까지 선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홍어 수요가 늘어나면서 서울 가락동시장, 노량진시장, 안양, 구리, 성남, 부산, 대구 등 전국에 걸쳐 홍어를 판매하는 전문도소매점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 가락동시장만해도 10여 개 이던 홍어도소매점들이 이제는 30여 개로 늘어날 정도다. 이처럼 전국에 걸쳐 홍어도소매상들이 늘어나 시장을 점유하면서 오히려 홍어 원산지인 전라도 지역 판매상들이 울상인 상태다.

서울을 비롯한 국내 한국화를 이끈 사람들도 전라도 출신들이다. 남종화로 대표되는 전라도 예맥(藝脈)의 혼을 전국에 퍼뜨리는 것도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기에 상경한 전라도 출신들이다. 이들은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남도의 붓’의 예술혼은 전국에 전파했다.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은 한국화단의 새로운 개척을 위해 상경,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의재의 제자인 옥산 김옥진과 남농의 제자인 도촌 신영복(작고.이상 진도 출신)이 수도권 진출의 1세대들이다. 이들은 1950년대말 서울로 상경, 같은 집에서 기거하며 본격적으로 서울화단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재의 대표적인 1세대 제자인 옥산 김옥진은 서울에 정착한 뒤 제자들을 양성, 의재의 화맥을 형성한다. 옥산은 옥전 강지주, 화정 이강술(이상은 의재로부터 배우기도 함), 곡천 이정신 등 서울 화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가들을 길러낸다. 실제로 옥전.화정.곡천은 서울 인사동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더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희재 문장호와 금봉 박행보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남농의 1대 제자인 도촌 신영복은 산수화를 중심으로 남농의 뒤를 잇는 제자들을 다수 배출한다. 전정 박항환, 임농 하철경, 포전 손기종(이상 남농의 제자기도 함) 등이 수도권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남농 1세대 제자로 우리나라 화조의 대표작가로 알려진 청담 김명제도 서울에서 활동하다 작고했고 화조와 산수화에 능통한 백포 곽남배는 서울에서 활동하며 일본을 이웃집 드나들 듯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남농의 화맥을 이은 전정 박항환, 임농 하철경(전 한국예총 회장), 죽전 김원술, 소천 주영옥, 유정 강광일, 칠농 박제흥(전정 조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며 한국화의 저변을 확장시키고 있다.

진도출신 한국화가로 국전 입선 이상 작가가 100명이 넘고 1970년대에는 호남출신 국전 입상작가가 30%에 달했던 점에서도 그 세를 짐작케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타향으로 진출한 호남인들은 판소리를 비롯한 남도소리를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시켜 산업화의 굉음소리에 짓눌려있던 국민들에게 흥을 북돋우는 역할을 해냈다.

‘남도의 소리’가 전국적으로 전파되고 일반대중의 소리로 자리잡은 과정은 역시 전라도 사람들의 이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판소리 명창들이 서울로 상경하면서 급속히 보급됐다.

지난 1964년 문화재법이 제정된 이후 현재까지 중요무형문화제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25명 가운데 22명이 전라도 출신이고, 나머지 3명도 전라도 출신 스승들에게 전수를 받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현재 생존해 있는 판소리 다섯마당의 예능보유자 5명과 고수 2명은 모두 전라도 출신들이다. 판소리 이수자.전수자의 80%가 호남출신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판소리와 더불어 무용과 기악도 중앙무대로 진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매방(목포.작고)이다. 이매방은 스승인 박영구의 호남살풀이와 승무 등을 중앙무대에 전수하며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또 기악분야에 활동하고 있는 명인도 50% 이상이 호남출신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남도소리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국민적 흥을 북돋운 것은 타향으로 이동한 전라도 출신들이 고향에서 접한 느낌과 체험을 통해 ‘귀명창’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산업화 과정을 겪으며 고향을 등져야 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전라도의 우수한 맛과 멋을 전국에 전수해 우리나라의 문화적 수준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전라도 사람들은 이동한 지역에 호남향우회를 구성, 고향의 정을 나누며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며 의지했다. 초창기 향우회는 대부분 마을이나 동단위로 조직됐다. 조직이 늘어나면서 구.군.시단위 향우회가 조직돼 갔다. 호남향우회라고 부르던 명칭도 출신지역 향우들의 구성 정도에 따라 호남향우회(광주.전남.전북 향우 혼재한 모임), 광주전남향우회(광주.전남 출신 향우 모임), 전북도민회(전북지역 향우 모임)로 구분해 부르기도 했다. 또 출신 고향에 따라 면향우회, 군향우회도 생겨났다.

현재 서울, 경기도를 비롯 전국 8도에 호남향우회가 조직되지 않은 곳이 없다. 서울에는 재경광주전남향우회가 광주.전남지역 23개 시군단위 향우회(광주 포함)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고, 서울 25개 구별로도 별도 향우조직이 활동하고 있다. 경기도도 경기도호남향우회 총연합회 소속으로 31개 전체 시군에 호남향우회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다. 부산호남향우회, 제주호남향우회, 대전광주전남향우회, 대구경북호남향우회, 울산호남향우회, 구미호남향우회, 포항호남향우회 등 전국 어디를 가든 향우회가 사무실을 갖추고 있다.

전국 각 지역을 통합한 전국단위 향우회조직도 4개가 활동하고 있다.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 중앙회’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 ‘(사)국내외통합호남향우회’ ‘전국호남향우회 중앙회’가 전국단위 향우회 조직이다. 이들 전국조직은 합종연횡을 통해 통합하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하는 등 부침을 겪고 있다.

지난 2013년에는 전세계 24개국 60개 지역에 걸쳐 조직된 ‘세계호남향우회 총연합회’가 출범해 200만 해외호남향우를 대표하고 있으며, 매년 광주와 전남.북을 순회하면 ‘세계호남인의 날 기념대회’행사를 갖고 있다.

전국 각 지역 호남향우회들은 독자적인 향우회 회관을 건립, 임대수입으로 향우회 운영비를 조달하는 곳이 많다. 전국에 걸쳐 파악된 곳만 18곳(표 참조)에 1~5층의 향우회관이 건립돼 있다. 또 나머지 향우회도 대부분 건물 일부분은 분양받아 향우회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평택호남향우회관의 경우 향우들의 공동묘지터로 활용하기 위해 구입한 임야가 개발영향으로 크게 올라 이를 밑천으로 지난 2007년 평택역 인근(평택시 평택동)에 지하 1층 지상 5층의 평택호남향우회관(연면적 2539㎡)을 건립했다. 빚 한 푼 없이 평택 시내 중심가에 향우회의 구심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5개층 가운데 3개층은 임대로 내놓고 4층은 향우회관, 5층은 향우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역민과 함께 하는 각종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수도권 향우회들은 고향출신 유학생들을 위해 학숙(學宿)건립에 나섰다. 1994년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에 건립된 ‘남도학숙’은 광주시와 전남도가 함께 투자해 건립했지만 재경향우들의 노력이 건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례학사는 재경구례군향우회가 중심이 됐다. 구례향우회는 구례군의 협조를 받아 지난 1997년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지상 4층의 구례학사(求禮學舍)를 마련했다. 이 학숙은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단독학사를 마련한 첫 사례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아파트상가내 강진학사,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원룸건물(지상 7층)을 인수한 여수학숙, 나주학사, 광양학사, 순천학사, 고흥학사 등도 향우회의 협조로 건립돼 고향후배들의 숙식을 해결해주는 장소다.

이렇게 성장한 전국 각 지역 호남향우회는 젊은층 향우들의 참여저조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 먹고살만한 향우들의 참여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전국 모든 향우회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위기다. 전국 각 지역 호남향우회도 시대흐름에 맞게 조직.운영 등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덕균 선임기자
dkkang@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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