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부재판 승소 판결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맨 앞의 인물이 이금주 회장 태평양전쟁 유족회 광주시지부 사무실 앞에 선 이금주 회장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이금주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태평양전쟁 유족회 광주시지부 남편의 전사통지서가 날아오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이금주(李錦珠, 1920~2021)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광복 후 일본의 강제 징용에 대한 사과와 배상, 강제 징용당한 분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도쿄·시모노세키‧나고야 등의 일본 법원에 7건의 소송을 직접 진두지휘한 여전사였다. 70세가 넘는 고령으로 일본을 건너간 횟수만도 80여 회를 넘는다. 소송은 패소로 이어졌지만, 절망하지 않고 30여 년을 버텨냈던 것은 징용으로 끌려가 사망한 남편과 피해 유가족의 명예 회복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다. 이금주는 1920년 평양에서 6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평...
최도철 기자2022.02.16 16:36광주 중외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동상과 숭모비 1961년 광주공원에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 이근준씨 집으로 옮겨진 숭모비 중외공원에 재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빅 데이터 1위 1910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그는 처음부터 무장투쟁론자가 아니었다. 1907년까지만 해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며 교육 운동에 전념했던 애국계몽운동가였다. 1908년 안중근은 아버지 친구의 조언을 듣고 만주의 명동촌·용정·훈춘을 거쳐 연해주 연추(현 추카노보)에 들어가 최재형·이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동의회의 의병장이 되어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다. 1909년 2월(음력)에는 11명의 동지와 함께 약지를 잘라 하늘에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할 것을 맹...
편집에디터2022.02.02 16:48고금도항일운동충혼탑, 왼쪽 석비에 이기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 근·현대사 산증인, 학생독립운동 주역 이기홍 이기홍의 부친, 이사열 백지동맹의 주역, 퇴학을 당하다 이기홍(李基洪, 1912~1996)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에서 이사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부친 이사열은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다닌 엘리트였지만, 1910년 8월 국권을 빼앗기는 비참함과 일진회 등 친일파의 망동(妄動)을 보고, 보장된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낙향, 고금도 청용리에 정착한다. 이사열은 고금도에 찾아온 아이들에게 경성에서 경험했던 망국 전후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을 통해 습득한 국제정세를 나누었다. 외진 섬마을에서 접할 수 없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아이들은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의식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들 이기홍도 그중 하나였다. 고금...
편집에디터2021.10.20 16:17장석천 출옥기사(동아일보 1933년 11월 16일자) 수감번호 451번 장석천의 모습 신지 항일운동기념탑 1920년대는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민족운동 방략이 다변화되었다. 이에 노동·농민·청년·여성·형평운동 등 대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조직 기반을 갖추고 활발히 전개된 것은 청년운동이었다. 특히 광주·전남의 경우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이 결합하였고, 그 결과물이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독립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1920년대 후반 전남지역 청년운동의 핵심 인물은 장석천이었다. 전남청년동맹 집행위원,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 조선공산청년회 전라도 책임자, 신간회 전남지회 상무감사 등의 직함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석천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본부를 결성했고, 조선 청년 총동맹 및 신간회와 협...
편집에디터2021.10.06 16:45양건당 황대중 충효추모비 황대중 시신을 옮긴 말 무덤 양건당 황대중 충효정려 '양건려' 양건당 황대중 '충신·효자' 정려 편액 황대중, 두 다리를 절다 황대중(黃大中, 1551~1597)의 호는 양건당(兩蹇堂)이다. 양건당의 '건'은 '절다'라는 뜻이니, 양건은 두 다리를 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두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 기가 막힌다. 황대중이 왼쪽 다리를 절게 된 것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강씨가 학질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황대중은 자신의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의 약으로 쓰게 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된다. 이후 사람들은 황대중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를 '효건(孝蹇)' 즉, '효성의 절름발이'라 불렀다. 황대중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의 효심이 알려져 십리 밖까지 조문객의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의 효성이...
편집에디터2021.09.08 14:50대구감옥 출감 후 동지들과 달성공원에서의 찍은 기념사진(1922. 9). 왼쪽부터 김태열, 최한영, 김범수, 김기형, 최정두, 서정희, 박일구, 최병준, 김복현 광주 3·1운동에 불을 지핀 김범수 선생 924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남선의원 개업 기사 광주 3·1운동의 견인차가 되다 광주 3·1독립만세 시위에 붙을 지핀 인물은 광주 출신의 경성의전 학생 김범수였다. 김범수(金範洙, 1899~ 1951)는 1899년 광주광역시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 335-1번지, '재매마을'에서 부친 김영관과 모친 최훈의 3남으로 태어났다. 지금 북구 신안동으로, 도로명 주소로는 북구 서암대로 93번지이다. 김범수는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에 입학한 수재였지만, 이전에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우 언수가 광주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
편집에디터2021.08.25 16:47홍암 나철 기념관(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115번지) 만주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3종사 무덤 (가운데가 나철선생 무덤) 대일 외교항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4명의 동지(왼쪽부터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 홍암사 사당에 모셔진 영정과 위패 순명 직전 황해도 사리원역 앞에서 제자들과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나철.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핵심 단체였다 대종교에 대해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대종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단군 신앙을 근대 신앙으로 발전시킨 종교로서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였으며, 1910년대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에 가담하여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대종교가 일제 강점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대종교인들의 활동은 교과서 서술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1919...
편집에디터2021.08.11 17:01대한민국 3년(1921)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 촬영. 셋째줄 오른쪽에서 여덟 번째가 정광호다. 광주시청에 걸린 정광호 선생 사진 애국지사 정광호 영위(현충원) 정광호 선생 생가터비(화순)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천 큰 장터와 작은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러퍼진다. 광주 3·1운동의 출발은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던 유학생이 가져온 2·8독립선언서와 맞닿아 있다. 그 선언서를 가지고 들어와 장성에서 인쇄한 후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분이 바로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정광호다. 정광호(鄭光好, 1895~1956)는 화순군 능주면 내리에서 온양 정씨 정대교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광주로 이사한 후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보 부설 임시교원양성소에 입학한다 양성소...
편집에디터2021.07.28 16:57의병 발의지 '쌍산의소' (화순군 이양면 증리 증동마을 60) 쌍산의소 막사터 의병장 행사 양선생 회일 순의 기념비 의병장 양회일 무덤 거의 자금을 마련하다 1907년 화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은 화순 능주에 유배 온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의 후손으로, 본관은 제주이며 자는 해심(海心), 호는 행사(杏史)이다. 1856년 화순 능주에서 태어난 후 1883년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로 이사한다. 가세가 넉넉했던 그는 20대 초반, 서울을 오가며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벼슬길을 접고 농사를 지으며 찾아오는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친다. 1904년에는 향약을 운영하는 도약장(都約長)의 직임을 맡는다. 당시 각처에서 일어나는 도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방도대(防盜隊)를 조직하기도 했다. 1904~...
편집에디터2021.07.07 15:18동학농민군의 운명을 갈랐던 나주 첫 전투지, 서성문 전봉준과 민종렬의 담판 장소, 금학헌 동학농민군 학살지였던 호남초토영 터에 세워진 표석 나주 수성군 도통장 정석진의 표석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났다. 동학 접주인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은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가 오히려 농민을 탄압하자, 고부 봉기는 농민 전쟁으로 번졌다. 3월 20일, 전봉준은 4000여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다시 봉기했다. 동참자가 점점 늘어, 새롭게 본진을 꾸린 백산(전북 부안)에 모인 농민군은 8000명이 넘었다. 백산 일대는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정개혁'과 '보국안민'을 외치는 농민군으로 가득 찼다. 4월 7일, 전봉...
편집에디터2021.06.22 16:251997년 광주 광산구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 유적 신창동 유적-칠이 담긴 토기 신창동 유적-벼껍질 압착층 신창동 유적-수레바퀴통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위치한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 유역 초기 마한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습지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62년 서울대학교 고고학팀이 53기의 옹관(독무덤)을 발굴하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30년이 지난 1992년부터 2012년까지 13회에 걸친 발굴이 진행되었고, 발굴이 진행될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최고의 수식어가 붙는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첫 발굴이 이루어진 1992년, 신창동 유적은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곧바로 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신창동 유적이 마한사의 복원에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최초·최고의 타이틀이 붙은 출토 유적·유물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2,000년 전의 타임캡슐...
편집에디터2021.05.05 16:40영암 내동리 쌍무덤 나주 반남 고분군 나주 복암리 정촌 고분 영암 내동리 쌍무덤 발굴 모습 필자는 몇 년째 전국 역사 교사들의 영산강 유역 마한 연수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연수에 참여하기 위해 온 서울·경상도 등 타 지역 역사 교사들은 거대한 봉분과 옹관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렇게 거대한 고분(옹관묘, 독널)이 많은데, 왜 아직 몰랐지"라는 반응이다. 외지의 역사 교사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 보는 것들이고, 그 크기와 숫자에 놀라는 것이다. 역사 교사들은 이런 큰 고분이 경주나 부여·공주에만 있는 줄 안다. 영산강 유역 마한을 상징하는 유물·유적은 국보 제295호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과 대형 옹관, 엄청난 구슬, 구멍이 있는 유공토기 등 엄청나지만, 눈에 보이는 가장 큰 흔적은 누가 뭐래도 옹관을 ...
편집에디터2021.04.21 16:17마한인의 부엌 모습(국립나주박물관 제공) 마한인이 사용한 고깔과 빗 마한인이 사용한 농기구 광주 신창동 출토 마한인 고깔 영산강 유역 마한을 연재하면서 2,000여 년도 훨씬 전인 광주·전남 지역에 둥지를 틀었던 마한인들의 삶이 궁금했다. 마한인들은 무엇을 재배하여 먹었고, 어떤 농사 도구를 사용했으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오곡을 심고 누에를 치다 마한 사람들은 곡식을 심어 먹었고, 누에를 쳐 옷을 해 입었다. 이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마한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 누에와 뽕나무를 알아 면포를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광주 신창동 등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확인된다. 보성 조성리,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는 논과 함께 물이 흐르는 통로인 수로, 저수시설, 인공 제방 등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 농사를 짓...
편집에디터2021.04.14 15:58광주 선암동 유적 옥 공방터와 그곳에서 출토된 거푸집(오른쪽 아래) 기원전 2~3세기경부터 형성된 마한 54개 소국이 어떤 문화를 꽃피웠는지를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한강·금강·영산강 유역 마한 소국의 성격이 전부 같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백제에 병합되었던 시점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앞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백제의 마한 병합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는 3세기 말 차령산맥까지, 2단계는 4세기 중엽 노령산맥까지, 3단계는 6세기 중엽으로 영산강 유역 광주·전남 일대를 포함한 남해안까지이다. 마한에 관한 국내 기록은 매우 빈약하고, 3세기 이전 마한의 모습을 담은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나 『후한서』 동이열전은 6세기 중엽까지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영산강 유역 마한의 문화를 서술해내지 못하고 있다. 문헌이 담지 못하니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
편집에디터2021.03.31 17:13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대형 옹관 나주 오량동 대형 옹관 제조 가마터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의 상징인 대형 옹관 발굴 모습. 국립나주박물관에는 '금동관'도 있고, '옹관'도 있다 6세기 중엽 영산강 유역의 마한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은 대형 옹관(甕棺, 독널)이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나주 반남을 지나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다음의 글을 남긴다. "반남면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는 7∼8개씩의 큰 무덤들이 떼를 지어 있는데 그 무덤에서는 커다란 독 두세 개를 포개서 만든 옹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옹관묘(독널무덤)는 삼국시대에 오직 영산강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무덤 형식인 것입니다. 지금 광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무지하게 큰 옹관은 신촌리에서 수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광주박물관장을 지낸 이을호 관장은 남도에 답사온 학생들을 보면 '여기는 ...
편집에디터2021.03.24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