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이념 논쟁보다 제대로 봐야 할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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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이념 논쟁보다 제대로 봐야 할 ‘독립운동사’
김준엽의 길 3,200㎞
윤영수 | 맥스 | 2만원
  • 입력 : 2023. 09.07(목) 17:44
  •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
김준엽의 길 3,200㎞.
항일 무장단체 의열단 출신이자 중국 3대 작곡가인 정율성의 행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달 29일 오후 광주 남구 정율성로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전시관 방명록에 정율성 규탄 글들이 남아있다. 뉴시스
광주의 정율성 기념사업과 관련해 연일 나라가 시끄럽다. 광주 남구에 생가가 있는 정율성은 일제에 항거해 의열단에 들어가 해방 후 북한과 중국에서 활동한 음악가다. 정율성은 생전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했다는 상충된 이력을 지녔다. 이번 정부가 걸고넘어진 것은 공산주의 활동 이력이다. 정부는 급기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고 있다.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자. 해방 후 한반도에는 6·25전쟁이 일어났고 지식인 중심으로 이념이 나뉘었다. 민족이 둘로 나뉘어 서로의 적이 된 가슴 아픈 한반도의 역사다. 현 정부는 그 당시 사람들이 행동과 생각을 지금의 잣대로 재단하고 있다. 해 묶은 이념 논쟁에 묻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를 외면하고 있다. 책 ‘김준엽의 길 3,200㎞’를 보면, 현 정부의 낡은 색깔론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는다.

‘김준엽의 길 3,200㎞’는 일본군 학도병 탈출 제1호, 한국광복군, 미군 특수부대 OSS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인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준엽의 독립 투쟁 길을 엮어낸 책이다. 김준엽은 해방 후 중국 난징의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근무하면서 중국사를 공부했다. 이후 1949년 귀국해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김준엽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워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적 연구기관으로 그는 공산주의 연구의 선구자가 됐다. 공산주의를 연구한 이유는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지금의 정부의 논리라면 김준엽 역시 배척해야 할 공산주의 추종자일 뿐인가?

아니다. 김준엽은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다. 이후 학자의 길에 몰두하면서 두 번의 총리직 제의를 거절하고 군부독재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장직을 과감히 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준엽은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자 스승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3년 올해로 탄신 100년을 맞은 김준엽 선생은, 살아생전 장준하 선생과 더불어 대표적인 독립투사로, ‘시대의 어른’이라는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의 투철한 역사관은 ‘후대의 나침반’이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일제 학도병으로 끌려가 병영을 탈출,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까지 걸은 2400km(6만 리)는 고난의 연속인 그야말로 생사를 건 길이었다.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인들을 만나면서는 독립의 절박함을 더욱 깨닫는다. 나라를 빼앗긴 채 조국을 떠나 유랑했지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준엽은 우리 현대사에 독립운동사를 주류로 앉히지 않는다면 민족사가 올바로 정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독립운동사를 들여다보면 일제의 침략과 함께 그들의 온갖 만행이 드러나는데 이에 관한 철저한 연구가 따르지 않는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김준엽이 남긴 말은 갈라치기가 성행하고 있는 지금, 현 정치권에 깊은 울림을 준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