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손필영>따돌림을 당하기 위해 학교에 갈 수는 없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손필영>따돌림을 당하기 위해 학교에 갈 수는 없다
손필영 시인·국민대 교수
  • 입력 : 2024. 03.06(수) 10:57
지난 4일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에서 학생들이 왕관을 쓴 채 참석해 있다. 뉴시스
손필영 교수
초봄은 입학 시즌이다. 개나리처럼 귀여운 아이들도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집단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부모들은 아이의 성장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걱정도 한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낼까? 아이들은 교육 기간인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또래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리며 보내는 이 12년간의 집단생활이 모든 아이들에게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밖으로 드러난 ‘왕따’라는 폭력적 상황을 걱정했는데 요즘에는 ‘은따’라는 집단적 따돌림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아이들만의 상황이 아니다. 직장생활에서도 소외당하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순진하고 귀여운 아이들부터 회사를 다니는 성인들까지 한 사람을 공격하는 못된 짓은 왜 계속 발생하는 것일까?

저지 크진스키(Jerzy Kozinsky)라는 폴란드 출신 작가의 <무지개빛 까마귀(The Painted Bird)>를 읽으면서 집단의 공격성에 놀란 적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아버지의 반나치 활동경력 때문에 6살에 혼자 피난길에 올랐다. 어린 그가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에게 시골에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를 보호해 줄 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는 폴란드의 시골 마을 여러 곳을 쫓겨 다니면서 극단적인 일들을 겪었다. 아마 그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이 소설의 내용인 것 같다.

이야기 초반부에 6살인 주인공은 몇 곳을 전전하던 중에 새를 잡아서 파는 사람(레흐)에게 의탁하여 지내게 된다. 어느 날 레흐가 사랑하는 여인을 한동안 못 보게 되자 분노에 가득 차 제일 크고 힘이 센 새를 골라 자기 손목에 묶고 여러 가지 물감으로 알록달록하게 색칠하는 것을 목격한다. 레흐는 그 새를 데리고 깊은 숲속으로 가서 새의 목을 약간 비튼다. 새가 숨이 막혀 빽빽 소리를 지르자 동료 새들이 날아와 초초하게 날아다닌다. 머리 위에 새들이 충분히 모이면 새를 놓아준다. 갑자기 자유를 누리게 된 새는 기쁨으로 무지개처럼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그 새를 맞이한 갈색 새들은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무지개빛 새는 자신이 그들의 종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부산을 떤다. 하지만 그 새의 화려한 색깔 때문에 어리둥절해진 다른 새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을 빙빙 맴돌 뿐이다. 무지개빛 새는 무리에 끼어들려고 안간힘을 다하지만 점점 더 멀리 쫓겨날 뿐이다. 잠시 후, 우리는 새들이 화살처럼 내려 꽂히며 무지개빛 새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얼마 못가서 무지개 빛 새는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땅 위에 떨어진다. … 어느날 레흐는 올가미로 커단란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았다. 날개에는 빨간색, 가슴에는 초록색, 꼬리에는 파란색 물감이 화려하게 칠해졌다. 까마귀 떼가 오두막 위에 나타나자 레흐는 색칠한 새를 놓아주었다. 이 알록달록한 까마귀는 조금 전까지만해도 친구 사이였던 다른 까마귀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사방에서 쉴 새 없이 공격이 가해지자 우리 발밑에는 검고 빨갛고 파란 깃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지막 일격을 당한 색칠 당한 까마귀는 무거운 돌멩이처럼 새로 갈아놓은 밭 위로 떨어졌다.”(무지개빛 까마귀(The Painted Bird), 박은수 옮김, 지혜의 샘)

이 이야기가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졌건 작가의 상상력으로 쓰여졌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색칠 때문에 동료들이 못 알아보고 공격하는 것은 비극이다. 본질은 같은데 보이는 색 때문에 조금 전까지 같이 놀던 친구를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하고 제거해버리는 까마귀의 얘기는 무척 상징적이기도 하다. 사람이나 새떼가 가지고 있는 집단의 공격성을 본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집단의식이 작동될 때 그 집단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의 집단의식이 아이들에게조차도 공격성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이러한 맹목적 집단의식이 작동될 때마다 어떻게 그 맹목성 대신 타인을 좀 더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지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맹목적인 것도 위험한데, 그것이 집단적으로 발현되면 사실 답이 없는 것이다. 학교와 가정의 역할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