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 오르는 길/ 우두커니 서 있다/ 비자(榧子) 고목 한그루/ 겉껍질은 세월에 벗겨주고/ 속껍질은 가슴애피로 벗겨주었나/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지팡이 짚으신/ 부르튼 피부 비집고 몇 개/ 위태롭게 난 잎들/ 백토 진토 비집고 나온/ 나의 배내옷/ 바람인가 오음(五音)의 노래인가/ 숭숭 뚫린 껍질 새/ 채 다 못 부르신/ 아, 그대로만 서 있어도 좋으실/ 어머니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다할미디어 시선 08)에 실린 졸작 ‘불일암 오르는 길’이다. 이 시를 인용한 서평이 올라왔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다. 누구인지는 ...
2024.04.25 13:49동해의 하늘은 바다를 사모해 쪽빛이 되었고 바다는 하늘을 사모해 쪽빛이 되었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이런저런 창조 후에 이윽고 사람을 짓는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의 생령이 된지라.” 동양에서는 천지창조와 인류의 기원 신화로 여와(女媧)와 복희(伏羲)를 등장시킨다. 마치 머리 둘 달린 하나의 뱀처럼 두 개의 가닥이 비비 꼬인 형상을 하고 있다. 후한 시대의 응소라는...
2024.04.18 11:16“어느 날 세상이 멈췄어/ 아무런 예고도 하나 없이/ 봄은 기다림을 몰라서/ 눈치 없이 와 버렸어/ 발자국이 지워진 거리/ 여기 넘어져 있는 나/ 혼자 가네 시간이/ 미안해 말도 없이/ 오늘도 비가 내릴 것 같아/ 흠뻑 젖어버렸네/ 아직도 멈추질 않아/ 저 먹구름보다 빨리 달려가/ 그럼 될 줄 알았는데/ 나 겨우 사람인가 봐/ 몹시 아프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BTS(방탄소년단)의 “라이프 고즈 온” 선율이 온통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반복되는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가 엇박자의 발디딤을 유도했던 것일까. 유장한 ...
2024.04.11 13:38일군의 농악대들이 재미나게 놀다가 갑자기 중지한다. “앗, 꽹과리가 없어졌다!” 상쇠의 꽹과리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두 수군거리며 꽹과리 찾기에 돌입한다. 꽹과리를 훔친 것은 필경 도둑의 소행일 것이다. 재담을 서로 주고받으며 일련의 연극놀이들이 진행된다. 상쇠가 말한다. “수상한 놈이 다니더니 꽹과리 한 짝이 없어졌다!” 상쇠가 갑자기 잡색 중의 대표격인 대포수의 멱살을 잡고 말한다. “이놈이 수상한 놈이다!” 대포수를 비롯해 여러 잡색들의 재담이 이어진다. 며칠 전 일이다. 영광읍 옛터에 새로 전수관을 리모델링한 우...
2024.04.04 13:56고려 시기 서해안 뱃길이 매우 중요한 대외교역로였다. 신라, 백제, 마한으로 거슬러 오를수록 그랬을 것이다. 뱃길의 여정에 흑산정(黑山亭), 벽파정(碧波亭), 군산정(群山亭), 안흥정(安興亭), 경원정(慶源亭), 벽란정(碧瀾亭) 등 기항지들이 보인다. 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중국 남경과 주산군도에서 뱃길 따라 개성에 이르는 길목들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항, 고속도로 터미널, 철도의 중요한 역(驛)이었던 셈이다. 정요근의 (지방사와 지방문화)에 의하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전남지역 역로망 구성은 총 34곳이다. 전남...
2024.03.28 11:38“귀신들의 땅은 황량했다. 그렇다면, 귀신은 정말로 있는 걸까. 시골 들판에는 도깨비들이 무수하고, 그들 대부분은 사람들의 입속에 살고 있었다. 한 줄로 늘어선 이 타운 하우스 앞에는 무성한 대나무 숲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에 여자 귀신이 날아다니니까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대나무 숲 여자 귀신은 일제 강점기에 강간당한 여자로, 정절을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쫓겨나 대나무 숲에서 목을 맸다고 한다. 이때부터 귀신이 되어 오직 젊은 남자들만 유혹한다고 했다.”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 피가 흐르는 이미...
2024.03.21 10:58“사람의 혼을 이루고 있다는 푸른 빛,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작은 밥그릇만 하다. 전라지방의 방언.” 국어사전의 혼불에 대한 설명이다. 남자의 혼은 대빗자루 모양의 길고 큰 불덩이고 여자의 혼은 접시 모양의 둥글고 작은 불덩이라고 한다. 이즈음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영화 에 등장하는 도깨비불이 그것이다. 커다란 횃불이 공중을 휘젓고 날아다닌다. 푸른빛의 밥그릇 크기 도깨비불로는 품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전반적인 정서는 풍수 관념과 무당굿이다. 일제의 잔재와 강제점유를 풍수 관...
2024.03.14 13:38“윈디는 경복궁 정문 앞 한 쌍의 해태 석상을 보며 마치 광화문을 지키기 위한 경계 근무자 같다고 생각했다. 밤에 보면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호랑이랑 코뿔소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해태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얼굴은 호랑이나 사자를 닮았고 머리는 코뿔소처럼 보였다. 비늘로 덮인 근육질의 다부진 몸은 그림 속의 용처럼 보였는데, 얼핏 보면 괴물 같아도 은근하고 귀여운 미소의 소유자였다. 윈디의 눈에는 웃고 있는 해태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보였다.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지닌 해태가...
2024.03.07 14:09부모는 죽은 아이를 안고 커다란 슬픔으로 울부짖는다. 무슨 악귀가 달라붙어서 어린 목숨을 앗아갔느냐고 소리친다. 아들이건 딸이건 자식은 똑같으며 오늘 아침 숨을 거둔 첫아이 시체 위의 하얀 이불이 눈물로 젖어 있다. 모든 식구들은 아직 시체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보이지 않는 악귀를 두려워하면서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이 악귀가 또다시 태어나는 아기를 잡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솜씨 있는 이웃에게 오쟁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쁘게 엮어와서 뜰 위에 놓아두었다. 아기 어머니는 깨끗한 보자기로 시체를 싸서 오쟁이를 잡고 있는 ...
2024.02.22 14:17지난 설날 광주교통방송 아침 인터뷰를 했다. 올해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니 남도의 용을 설명해달라는 취지였다. 갑진년 양력설 본 지면에 ‘용보다 소사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남도의 용을 소개한 바 있는데 종종 질문해오는 사람들이 계시기에 답변 삼아 다시 언급한다. 갑진(甲辰)은 60갑자 중 하나다. 우리 조상님네들은 세상의 주기를 60년으로 계산했다. 하늘의 수 천간(天干) 즉 10간과 땅의 수 지지(地支) 즉 12지를 서로 교직시켜서 최소공배수인 60을 만들었다. 갑자년, 을축년 등으로 조합해 열 번이 끝나면 10간의 첫째를...
2024.02.15 13:21진도군 의신면 내동마을 뒷산에 윷판바위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삼별초군들이 윷놀이하면서 새겨두었다고 한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을 쓰면서 이 정보를 얻게 되었으므로 답사한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책이 편집 완료된 시점이어서 졸저에 싣지는 못했다. 이후 전남지역의 윷판바위를 추적하던 차에 광양에도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에 있는 성혈 바위에도 윷판바위와 유사한 패턴들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지 않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는 중이다. 전북 임실의 윷판바위에 대해서도 본...
2024.02.01 10:31세이레는 아이를 낳은 지 스무하루째 되는 날을 말한다. 출산일부터 대문에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아이가 출생한 첫 7일째를 초이레, 14일째는 두이레, 21일째는 세이레라고 한다. 7일을 세 개로 묶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이레마다 새벽에 삼신(三神)에게 흰밥과 미역국을 올린다. 세이레째 금줄을 내리게 되면 비로소 일가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이 실과 돈 등을 가지고 와서 아기를 대면한다. 세이레를 보통 ‘삼칠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군신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칠일, 백일을 비롯해 천부...
2024.01.25 13:30광주 어느 독서실 골방에서 한겨울을 나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완행버스 차창으로 눈을 돌리다가 느닷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이런 해괴하고 뜬금없는 일이라니. 이유도 내력도 알 수 없는 복받쳐 오름에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옆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꺽꺽대는 사이, 남도의 들녘이, 샛강이, 야트막한 언덕들이, 갓 올라온 연록의 이른 봄을 장식하며, 손잡아 달리듯 스쳐 지나갔다. 울음의 출처가 궁금했다. 단지 갓 올라온 들녘의 풀들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어쩌면 내 것 아닌 어떤 울음들이 들녘을 배회하다 터무니없이 심...
2024.01.18 12:31어릴 때 기억 중 하나, 친구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출혈이 심해서였다. 출산이라는 축복이 장례라는 슬픔의 시공으로 일순간 바뀌었다. 사람들이 좁은 돌담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리 마을 유일하였던 한약방 어른의 얼굴도 순흑빛이 되었다. 이 경험이 어린 우리에게 어떤 무게감으로 다가왔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이리라. 삶과 죽음의 시공이 바뀌는 게 사실은 순간이자 찰나라는 것 말이다. 당골들의 분주한 발길이 괜한 마당만 즈려밟는 풍경의 중심, 작은 대나무 가지를 손에 잡고 죽은 이의 이야기에 집중하...
2024.01.11 13:312024년을 청룡의 해라고 한다. 음력으로 쇠는 단위이고, 역(易)으로 따지면 입춘을 기점 삼는다. 요즘은 양력과 병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고대의 설날로 따지면 동짓날을 기점 삼기도 한다. 하지만 관념이나 제도 모두 늘 재구성되어온 것이라, 핏대 올리며 따질 이유까진 없다. 지구의 공전이나 고대로부터의 역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열두 개의 해마다 상징을 넣어 의미를 부여한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한 해를 ‘띠’라고 부르는 것은 고리, 매듭, 환대(環帶) 따위와 상관된다. 자세한 것은 따로 다룬다. 열두 띠 중에서 용띠가 이...
2024.01.04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