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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프로젝트가 새로운 날개를 달고 찾아온다
지난 2015년부터 이어져 왔던 전남일보 공공캠페인인 '공'프로젝트가 4년5개월의 대장정을 마친다. '공'프로젝트는 사회 전반의 본질을 짚어보고 화두를 던지기 위해 출발했던 공공캠페인이다. '공'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겼다. 공익(public interest), 즉 공공성 회복을 뜻하는 '공'(公)과 '공'(共)의 의미다. 여기에 아라비아 숫자 '0', 영어의 'Zero'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본(basic)'에서 다시 출발하자는 뜻도 담겨있다. 욕심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삶의 고통(번뇌)을 줄일 수 있다는 불교의 '공'(空) 사상과 사회 공헌의 '공(貢)'의 뜻도 포함하는 등 다양한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남일보의 '공'프로젝트는 '본질을 묻다'(2015), '공익(公益)을 실천하면 공존(共存)이 열립니다'(2016), '동행(同行), 함께 만들어갈 사회의 시작입니다'(2017), '다시 정의(正義) 다'(2019) 등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는 공익캠페인을 이어왔다. 성과가 많았다. 2015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주최로 열린 '2015지역신문 컨퍼런스'에서 창의주도형·지역공동체캠페인 분야 대상을 받았으며, 2016년에는 한국광고총연합회가 수여하는 2016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금상을 받았다. 아시아소사이어티(Asia Society)의 네트워크인 '아시아 21(Asia21)'이 개최한 '아시아21서밋(Asia21 summit)'에서 '공'프로젝트의 내용과 성과 등이 공유되기도 했다. 특히 2017년에는신문과 방송을 포함해 지역 언론사로는 최초로 '서재필 언론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 '공'프로젝트는 오는 7월 창사 31주년(7월19일)을 맞아 새로운 프로젝트로 재정비 해 독자를 만날 예정이다. '전남일보 공공 캠페인 시즌2'다. 그동안 지면에 나온 여러 주인공들과 나눔의 의미와 도움의 의미, 또 본질과 정의를 이야기 했던 전남일보 '공'프로젝트. 53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잠시 후 다른 날개를 달고 독자들에게 다가올 것을 약속드린다.
(영상)"아그들아, 물러나 있어라 인자부터 엄마들이 나설랑께."
1980년 5월. 그것은 전쟁이었다. 사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고, 방금 숨을 거둔 시체를 지나쳐 다른 환자에게 가고 있다. 이제 겨우 아이티를 벗은 10대가 총에 맞았고, 곤봉에 머리가 터진 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손에 묻은 피가 닦아질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밀려 들어왔다. 잠을 자는 것, 먹는 것조차 미안하던 그 봄이 그렇게 피비린내 속에서 지나갔다. 그런데 세상은 고요했다. 광주를 제외한 어디서도 분노의 목소리는 없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면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전경들과 치열하게 대치할 때쯤 서로의 팔짱을 낀 어머니들이 도로에 선 것이다. 이들은 광주 오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월의 저항에 모성애가 있음을 알린 이들이었으며, 나아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오월어머니회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 안성례 오월어머니회 설립자. 여성운동가이자 시의원이었으며 광주시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서른아홉번째를 맞는 5월의 어느 날, 그녀를 만나 광주의 봄 이야기를 나눴다.
솔갱이가 병아리를 채갈때엔 닭도 목숨걸고 싸우는 벱이여
하물며 평화롭던 집 앞에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죽어 자빠지는 판국에 가만 있을 엄마가 어딨단가. 우리 병아리들 죽이고 간 솔갱이들은 저리 살아 멀쩡한디, 어미들 보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되잖어. 왜 싸우느냐 그만 묻고,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나 말해주소. 이 질기고 긴 싸움을 이 엄마들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말이여. 다시 정의(正義)를 생각한다
뭐 있었것소. 죽으면 죽으리라 사필귀정 그 하나로 싸웠을 뿐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질 때쯤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전경들과 치열하게 대치할 때쯤 서로의 팔짱을 낀 어머니들이 도로에 선 것이다. "아그들아 다칠라. 물러나 있어라. 인자부터 엄마들이 나설랑께." 최루탄 속에서 집회를 하던 대학생들은 "아따 어머니 뭣하러 나오요. 다친당께라"라고 만류하지만, 어머니들은 "느그들이나 저짝 가 있어. 다치믄 니 엄니 속 터진다"라며 전경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들이 바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일명 '민가협' 소속 어머니들이었고 회장은 안성례 여사였다. 대부분이 80년 5월 군인들의 총칼에 학살된 가족을 둔 여성 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광주 오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월의 저항에 모성애가 있음을 알린 이들이었으며 나아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오월어머니집으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 그 중심에는 안성례 여사가 자리했다. 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설립자. 수많은 호칭과 행적에 따른 지위가 있지만, 광주 오월의 어머니이자 오월어머니집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그래서 광주 기자들 사이에서도 '어머니'로 통하는 사람이다. 실제 이날 인터뷰에서도 필자는 안 여사를 '어머니'라 불렀다. (대화는 편하게 이뤄졌으나 본문에는 존대어로 기재한다) 그렇게 서른아홉번째를 맞는 5월의 어느 날, 그녀를 만나 광주의 봄 이야기를 나눴다. - 어머니(안성례 설립자)는 여성운동가이자 시의원이었으며 광주시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인생을 바꾼 계기는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자세히 말해 달라. △80년 5월 전에는 되레 국방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지요. 오죽했으면 제가 1949년도 초등학교 때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많이 쓴 아이로 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군인들이 광주에 와서 시민들을 칼로 찌르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이고 병원에 실려 온 숱한 부상자들의 참담한 모습에 내가 돌아버렸소. 이럴 수가! 권력이 무엇이기에, 무슨 죄가 있다고 사람들을 죽이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 광주를! 나는 크게 분노를 느꼈소. 저 불법 부당한 전두환과 계엄군에게 희생당한 시민들을 보면서 그전에 내 가정 등 사사로운 일상은 없어져 버렸지요. 바로 전두환 때문에 말이오. 내 가족이 당한 것처럼 분노만 솟구쳤소. 이어서 우리 남편인 명노근 교수가 평화적 수습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내란음모로 고문을 당하고 감옥을 살고 참여자들을 무작정 보안대, 상무대로 끌고 가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소. 거기 갔다 온 사람들은 일주일 후에 죽기도 하고 정신이상이 되기도 한 이런 현실을 보고 내가 변하지 않을 수 있겠소. 누구도 이런 반인륜적이고 잔인무도한 정권의 현실을 목도한다면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맞서 싸운 상대는 참으로 강하고도 높은 벽이었다. 어떤 각오로 그 긴 싸움에 임했나. △뭐가 있었것소. 그저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당신들은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임했지요. 악한 행위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고 진실은 이긴다는 사필귀정 하나만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 나는 자상한 엄마, 평범한 직장여성, 아내였었지요. 교회를 통해서 신앙 활동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정의, 평화, 사랑 이 세 가지 뜻을 이루는 데에 전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병원으로 밀려들어 오는 사람들과 그들을 부여잡고 눈물만 흘리며 아이 좀 살려달라는 어머니들, 비명과 울분이 광주를 가득 메웠지요. 죽어버린 환자를 앞에 두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른 환자로 달려가면, 죽은 환자의 어머니가 치마를 잡아요. "내 아들 가슴팍이 이리 따뜻한데, 아직도 뜨거운데 어디가요. 좀만 더 보고 가요. 왜 응급실이 아니고 장례식장으로 보내요" 그 어머니 손을 잡고 나도 울고 말았습니다. 죄송하다고, 살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고. 벽이 높냐구요? 높지요. 절대 권력자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저리 큰소리치고 있으니 그전에는 오죽했을까요. 허나 그때 그 어머니들의 통곡을 들은 이라면, 벽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랬습니다. -무엇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란? △그러니까 말이요. 정의란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마이클 샌들의 책에선 정의는 상대적이라는 뉘앙스를 받았소. 그건 아니라고 보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절대적인 가치요. 올바른 것이며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봅니다. 인간의 삶이나 국가 또는 세계 어디서든지 반드시 기본이 되는 가치 말입니다.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또 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은 뭐가 됩니까. 아니 그건 희생이 아니지요. 목적에 의한 살인이지요. 정의란 그래서는 안 됩니다. - 지금 이 시대는 어머니,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이뤄지고 있는가 △(잠시 고민하더니) 글쎄요. 그동안 누적된 불법, 부당함을 바르게 하고자 문재인 정권이 몸부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통령 혼자서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변해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에 국민들의 의식이 변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온전한 정의의 시대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만 앞선 10년에 비해 희망은 있습니다. 정반합의 역사적 필연 속에서 정의는 이루어진다고 믿는데, 지금이 바로 필연의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안성례는 누구 80년 5월… 남편 명노근 교수 구속… '광주 오월의 어머니'로 민주화 운동 헌신 1980년 5월, 광주에서 비극이 발생한 이후 39년간 그녀의 목소리가 광주지역 미디어에서 사라진 날은 없었다. 빈도수가 줄어 들었을 뿐, 그녀는 늘 어딘가에 서 있었다. 안성례. 전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이자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전(前) 이사이며 오월어머니집의 설립자. 그 외에도 그녀를 지칭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지만, 가장 확실한 한마디는 '광주 오월의 어머니'다. 1938년 함평 출생. 엄한 아버지 밑에서 6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여자가 똑똑하면 사회에서 안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전남여중을 마치고 학업을 포기해야 했었다. 그때 그녀를 아까워 한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기숙사가 있는 간호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다. 21살에 아버지의 결혼 압박에 고 명노근 교수를 지인 소개로 받아 결혼한다.(본인이 소개팅을 해달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5남매를 낳았다. 여기까지가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이다. 그녀의 삶을 비튼 것은 시대였다. 세상에 크게 알려질 것이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남편과 오순도순 아이들 키우며 살고 싶었던 한 간호사가 광주 오월의 어머니가 되던 시대. "전쟁이었죠. 사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어요. 방금 숨을 거둔 시체를 지나쳐 다른 환자에게 가고 있는데, 그 어머니가 저에게 왔어요. 아직 가슴이 따뜻하다고, 이리 따뜻한데 왜 응급실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보내냐고. 한번만 더 봐달라고…" 이제 겨우 아이 티를 벗은 10대가 총에 맞았고, 곤봉에 머리가 터진 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손에 묻은 피가 닦아질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밀려들어왔다. 어머니들은 눈물마저 꾹꾹 눌러 참은채 자신의 아이를 간호사나 의사가 한번이라도 더 쳐다봐주길 간절히, 아주 간절히 손을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인도 미쳐갈 수밖에 없는 공포 속,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분노였다. 시퍼런 분노. "우리는 사람 하나를 살리려고 이리 발버둥 치는데 국민을 지킨다는 저 군인들은 손가락 까딱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가나. 이들이 뭘 잘못했다고." 잠을 자는 것, 먹는 것조차 미안하던 그 봄이 그렇게 피비린내 속에서 지나갔다. 그런데 세상은 고요했다. 광주를 제외한 어디서도 분노의 목소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간첩'이라고 했다. '빨갱이들이 내려왔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남편인 명노근 전남대 영문과 교수가 별 이상한 이유로 잡혀 들어갔다. 이를 악물었다. 5남매의 어머니 안성례에서 광주 오월의 어머니 안성례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장을 맡아 5·18 진상규명과 구속자 석방을 위해 투쟁해왔다. 그녀가 서울로 올라오면 관련 단체들은 문을 걸어 잠궜다. 그러나 지치지 않았다. 지칠 틈이 없었다. 이후 광주시의원으로 일하며 '전국 최초 3선 여성시의원'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초대 광주시의회 부의장,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했다. 이윽고 오월어머니집을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죠. 딸이 그랬어요. 엄마는 광주의 어머니일지는 몰라도 우리 엄마는 아니라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했다고. 그 엄혹한 시대에 맞서서 엄마들이 할 일은 자식들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 엄마들이 다치지 않도록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은 자신의 일이었기에 달려왔다는 그녀. "나와 명 교수(부군)는 '나라가 바로 돼야 하고, 평화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기본이다'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헌신했습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민주화 투쟁을 하다 보니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면에 어떤 타이틀로 나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곧바로 '오월어머니집 설립자'로 나갔으면 한다고 답했다. "오월 엄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일 중 하나입니다. 나는 정치인이었던 적이 없어요. 정치를 통해 오월을 이야기한 것 뿐이죠."
(영상)상해 임시정부 요원이자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REP〉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에는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철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리고 그가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국무위원을 맡은 김철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었습니다. INT〉 김만선 일강 김철 후손 "일강 김철 할아버지께서는 호남의 대표적인 애국지사 독립운동가입니다. 임시정부의 요원으로서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시며 의정 활동을 하셨고, 신안청년단 조직과 한인애국단에 참여하셨습니다." REP〉 김철 선생은 1934년 중국 항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사인은 과로로 인한 급성폐렴. 그리고 11년후 그가 그렇게 염원한 광복이 되었지만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김철은 그렇게 사람들에게도 잊혀져 갔습니다. 하지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일강 김철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도 고향인 함평에 설립됩니다. 후손인 김만선씨는 지금이라도 조부의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려 그의 숭고한 애국혼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겠다고 다짐합니다.
"100년뒤의 대한민국은 자주독립을 이루었소?"
"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역사의 대의다.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독립신문 1921년 1월1일자 '신년의 감상'이라는 제하의 일강 선생의 글) ● 영웅의 탄생 천석꾼의 셋째 아들이었다. 비록 나라가 일제의 수탈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처신만 잘하면야 한 생 넉넉하게 지내고도 남았다. 더하여 공부도 오래했다. 어려서는 영광군 묘량면에 있는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8년 영광 광흥(光興)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했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1915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가 1886년 10월 생이니, 29살까지 공부를 이어간 것이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러한 배움을 가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그였으니 일제의 회유도 끊임없었다. 배운 지식으로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들을 억누르는데 앞장서라 권유한 것이다. 후손인 김만선씨는 "당시 그 학벌이었으면 어쩌면 자리 하나 크게 했을 수도 있었겠지요"라고 말한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의 가슴에 '조국 광복' 네 글자가 자리를 잡았다. 바로 영광 광흥학교 시절이었다. 광흥학교는 조승찬과 편용무 등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사학이다. 경술국치 후 한일합방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결국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된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가 배운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이런 마음은 유학 중 조선인들을 2등 국민 취급하는 일본인들을 마주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조선으로 돌아오자 김철 선생은 곧바로 형제들과 상의해 소작인들에게 논과 밭의 일부를 나눠주고 집에 딸린 종들을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줬다. 또한 김정자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일제의 횡포는 도를 넘었고, 고향 산천 곳곳에서는 일본말이 들려왔다. 이름을 바꿔야 하고, 조선과 관련된 모든 것은 금기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홀연히 편지 한통을 남긴다.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 그렇게 그는 중국으로 향한다. 거기에 몇몇의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다. 그가 몸을 열차에 실는 순간, 한 사내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대한민국을 탄생케 한 별들이 상해로 모이는 시점이기도 했다. ● 영웅의 활약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인 하층 노동자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는 등 그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허나 이러한 생활의 곤궁에 굴하지 않고 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등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고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백범일지) 1917년 2월 중국 상해로 도착한 그는 1년여간 독립운동가들과 만나며 1918년 8월20일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 백미로 25호에서 김철은 여운형,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한진교 총 6명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기관지인 '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조선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1919년 선생은 여운형과 협의한 끝에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독립을 호소토록 했다. 선생은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같은 해 1월 조선에 몰래 들어와 함평(영광)의 전답을 정리해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1만원을 마련했다. 그 사이 아내인 김정자 여사는 목을 메었다. 아직 새파란 20대의 나이였다. 김철 선생이 상해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좁은 마을에는 일본 헌병들이 들이 닥쳤다. 김 여사는 남편이 자신을 보러 찾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구봉마을 집 뒤에 있는 소나무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지독한 지아비와 지어미였다. 그럼에도 김철 선생의 행보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함평의 모든 재산을 정리한 돈을 들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인 2월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때 3‧1만세운동 거사도 계획했다. 3·1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1919년 4월10일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됐다. 곧 이어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만드는데 동참했다. 상해에서 조선의 별들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의 인생은 이제부터 하나의 선만을 달려가기 시작한다. 192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 12월에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 1931년 11월에는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 등 항일투쟁의 역사가 바로 그의 삶이었다. 1932년 군무장으로 있을 때는 김구선생과 함께 윤봉길, 이봉창 폭탄의거를 주도했으며 이로인해 항저우로 피신했다. 그리고 여기서 2년 뒤인 1934년 6월 29일 48세의 나이로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쳐 쓰러지고 만다. 급성폐렴이었다. 함평 천석군의 셋째 아들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먹을 것이 없어 위독해진 것이다. 결국 동지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숨을 거두고 만다. ● 나의 정의는 조국이다 "할아버지의 정의는 간단했습니다. 바로 조국이었지요. 가족을 버리고, 선대의 재산을 다 팔고, 목숨까지 내어 준 조국. 그 분에게 조국 독립은 신념이고, 그의 삶 자체이며, 전부였습니다." (김만선씨) 인생이 이리 하나의 색이기도 힘들다. 부잣집 아들이었고, 엘리트였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하나도 손에 들지 않았다. 상해의 좁디좁은 임시정부 청사의 침상에 누워 그가 밤마다 그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제 뿐만 아니라, 거기에 빌붙어 같은 민족의 고혈을 빠는 이들에 대한 철퇴와 완전한 자주독립이 아니었을까. 함평에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보고 있노라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조국 독립이 나의 정의요. 그래, 이 목숨 하나와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핏값으로 100년이 지난 지금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셨소? 그랬다면 다행이오." 정말 다행인가. 우리의 자주독립은 이뤄졌는가. 친일은 사라졌는가. 서늘한 3월의 어느 날이다.
"나, 일강 김철의 정의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이요. 100년 뒤의 그대들은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소?"
고향 함평을 떠나올 때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멀고 먼 상해까지 가는 길, 열차의 차창에 기대어 동지들과 만든 새로운 조국의 이름, '대한민국'을 마음으로 몇 번이고 서럽게, 벅차게 되새겼다. … 100년이 지난 2019년 대한민국, 그는 조국을 위해 쓰러졌지만 조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과연 그의 정의는 실현 됐을까? 김철 선생과 그의 손자 김만선씨/ 함평 일강 김철 기념관/ 김양배 기자
일강 김철 선생은 누구
조선이 국호였던 시대인 1886년 10월15일 생이다.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태어났다. 4남 1녀중 3남. 1908년 영광에 있는 광흥중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마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2년 뒤인 1917년 2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8년 8월20일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 백미로 25호에서 김철은 여운형,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한진교 총 6명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이 즈음 김철 선생은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했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했다. 1919년 1월 김철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해 자신의 전답을 정리해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益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신규식(申圭植),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프랑스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4월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됐고, 같은 달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에 임명됐으며 1920년 1월에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했다.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됐으며 같은 해 12월 김구(국무령) 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됐고,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에 임명됐다. 또 1930년 7월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14인 이사 중의 한명이었으며 1931년 11월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해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의 일왕 저격사건과 그해 4월29일 윤봉길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김구와 같이 주도했다. 같은 해 5월10일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해 자신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했다. 동년 5월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김철은 재무장에 임명됐다. 허나 안타깝게도 2년 뒤인 1934년 6월29일 중국 항주(杭州)소재 광자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리다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廟) 뒷산 호산당(湖山堂) 예수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유해가 안장된 중국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는 1978년 아파트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죽어서도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사후인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 됐다.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은 누구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스무살 신부 옆에는 키가 큰 신랑이 서 있다. 신부도 부끄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1940년 10월10일의 행복한 사진 한 장. 2년 뒤 남편은 일제에 의해 끌려갔다. 그리고 1943년 '길버트 제도 다리와에서 사망. 충렬(忠烈)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라는 전사 통지서 한 통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때부터 그녀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금주(99)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사단법인 태평양전쟁유족회 이사(1988년)이었으며 호남문화진흥회 고문(2006년)을 역임했고,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자문위원(2005년~2007년), 광주광역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실무위원회 위원(2005년~2009년), 일본의 강제동원 전범기업 및 한국의 청구권자금 수혜기업 등 한일협정 책임기업 피해자선정위원회 대표(2006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고문(2009~)을 맡았다. 한국보다 일본 시민단체에서 더 유명하다. 최근 발간한 일본 시민단체 소식지에서는 이 전 회장의 쾌유를 비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싸움은 1972년부터 시작됐다. 이 전 회장은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나누고 가끔 만나 활동계획 등을 논의한다. 이후 1988년 6월 서울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이 전 회장은 광주 유족회장을 맡게 된다. 1992년부터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진행했다. '광주 천인소송' '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 소송' '관부재판(종군 위안부) 소송' 'b c급 전범(포로감시원) 소송'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도야마 후지꼬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등이 이 전 회장이 참여한 소송이다. 무려 80여 회를 일본에 다녀왔다. 그러나 7건의 소송은 총 열아홉 번에 걸쳐 기각됐다. 첫 승소의 기쁨도 맛보았다. 1998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법원으로부터 일부 승소를 받아낸 것이다. '종군 위안부 소송'이었다. 2004년 2월에는 피해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에도 기여했다. 그 이후부터는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2년 자신의 일을 열심히 도우던 며느리를 잃었다. 몇 개월 후 하나 뿐인 아들도 세상을 떴다. 남은 것은 손녀 하나 뿐. 일제의 사과는 여전히 없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잘 못이 있냐고 묻는다. 그래서 99세의 이 전 회장은 아직도 버티는 중이다.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라고 부르지 마라.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사람들일 따름"
"인터뷰가 힘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전화기 너머로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대표는 3월 공프로젝트의 인물로 선정된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의 수제자 같은 존재였다. 오마이뉴스 기자였던 그가 소명처럼 이 길에 뛰어 든 것이 바로 이 전 회장 때문이었다. 때는 2008년 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국적포기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꼿꼿한 조선 여인, 그 자체였습니다. 당당하면서 품위가 넘치신 분이었죠.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를 직접 눈으로 본 느낌이었습니다." 이 대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뵌 이 전 회장님은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피해자였는지 모르지만, 해방 후의 이 전 회장님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여전히 해방을 맞지 못한 그래서 일제와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던 또 다른 의미의 독립투사들이었습니다." 이 전 회장의 정의가 무엇인지 들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사과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한세기가 다 지나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일이죠. 바로 일본이 그렇습니다." 이 대표가 말하는 와중에 침상에 누워있던 이 전 회장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필자를 빤히 쳐다본다. 아직도 눈빛이 힘이 실려 있었다. 인터뷰 중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아래 인터뷰는 이 대표와 이 전 회장의 이야기를 조합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단답형의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부득이 이 대표가 중간에서 조절했다. - 이 전 회장님은 치매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들었다. 이 전 회장이 정말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나. △사회적 관심을 바란 적이 있었죠. 한때는. 해방 후 국가가 피해자들 대신 돈을 받아서 도로를 깔고, 공장을 만들었지요. 정작 피해자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전 회장의 남편은 일제에게 징용으로 끌려가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가가 준 것은 약간의 위로금이었습니다. 그러니 피해자들이 참을수 있었겠습니까. 조국은 해방됐지만 이들은 해방되지 못한 것이죠. 그런 시대에 이 전 회장님은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유족회와 피해자들 모임을 이끌고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매번 졌지요. 일본이 그랬습니다. "너희 나라에게 가서 물어봐라. 우리는 해줄게 없다." 수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가 지옥같은 생활을 하게 한 일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도 외면했지요. 그 싸움을 지금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이제 그 싸움을 끝내는 것이 정말 이 전 회장님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이 전 회장님은 치매지만 지금까지도 일본에 대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이 전 회장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 전 회장님이 살던 진월동의 작은 집은 유족회 사무실로 이용됐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들이 드나들었지요. 모두 똑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전 회장님의 아들과 며느리도 나서서 도왔지요. 이 전 회장님이 말씀을 하실 때면 모두가 경청했습니다. 이 전 회장님은 항상 책상에 앉아 한쪽엔 사전을, 한쪽엔 각종 서류를 수북이 쌓아놓고 강제징용 피해자와 가족들의 기억을 손수 꾹꾹 눌러쓰며 정리했습니다. 만약 이 전 회장님이 그 싸움을 지속하지 않았다면 1273명의 징용 피해자들은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진월동 집은 팔렸습니다. 더 이상 운영할 돈이 없어서죠. 이 전 회장님은 치매와 병마로 인해 이 작은 요양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소식지를 읽으며 재판이 어떻게 됐느냐고 묻습니다. 이 전 회장님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이국언 대표) 모시면서 들었던 말은 '우리를 동정하지 말라.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였습니다. 요양병원에 오기 전 까지 남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 와서 이야기 하데요. 1942년, 갓 8개월된 갓난아이를 두고 남편이 강제 징용되던 날 "꼭 돌아 오겠다"고 말하며 떠난 남편의 구둣발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그 한걸음 한걸음마다 쏟아 낸 눈물이 여전히 기억난다고. 그래서 지금도 싸우고 있다고 이 전 회장님은 말했습니다. 싸움을 멈추면 그 기억마저도 사라져 버릴까봐서요. 이 전 회장님의 정의는 바로 '기억'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것 말입니다. - 2019년 현재 우리는 이 전 회장님께 무엇을 할수 있나. 어떤 것을 해야 그 삶의 깊은 무게를 덜어 드릴 수 있을까. △동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그들을 바라봐줘야 합니다. 이제 피해자들도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가진 것 없고 운이 없는 몇 명이 끌려갔다 살아온 게 아닙니다. 한 나라가 침략을 당했고, 자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조선인들이 끌려갔습니다. 아내를 부르며, 부모님을 부르며 죽어갔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됐다고 합니다. 이 전 회장님과 유족회는 "아직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와 싸움은 아직 끝난게 아니라구요. 그러니 이들의 외침을 단순히 피해자의 울부짖음으로 듣지 말아 주십시오. 이들의 외침은 아직 해방이 되지 않은, 그래서 일제와의 싸움을 멈출 수 없는 대한민국의 독립투사들의 외침임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들에 대한 2019년 우리들의 의무이자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영상)일제시대 전쟁 피해자를 위해 헌신한 이금주 할머니
REP>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 유족회. 일제시대 전쟁 피해자를 위해 헌신한 이금주 할머니 집에 걸려있던 현판입니다. 이금주 할머니는 일제 강제동원으로 남편을 잃은 피해자입니다. 1942년 신혼의 부부는 남편의 강제징용으로 인해 생이별하고 맙니다. 그 후 홀로 아들을 키운 이(금주) 할머니에게 돌아온 건 남편이 아닌 남편의 전사 통지서. 그렇게 이(금주) 할머니는 남편의 이야길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합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수많은 소송을 주도하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INT>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 (이금주 회장님은)"조그만 책상을 놓고 뭔가를 쓰고 계시고 자료를 방바닥에 놓고 이것저것 자료를 정리하시던 모습이었어요."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을 추슬러 온 모습이 꼭 꼿꼿한 조선 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한 힘과 기개가 느껴졌었죠." "본인의 상처는 뒤로하고 본인과 같은 피해자들, 유족들의 아픔과 눈물을 본인이 보듬어서 유족회를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20여년 이상 30년 가까이 끌어올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하시죠." 패소의 아픔보다 승소의 기쁨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하시던 이금주 할머니. 2012년 유족회 활동을 중단한 후 현재 전남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아흔아홉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에도 일본에서 활동하는 유족회의 소식지를 건네자 눈이 또렷해집니다. 소식지를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과거 유족회 활동을 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합니다.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이금주. 이거 내 이름이야." "이금주 상. 1920년 오말(午末)에 그때 나왔다."(태어났다)
"일본, 나쁜 사람들이지…암, 나쁘고 말고 징용가서 사망한 남편… 아직 해방 요원"
"어디서 오셨소?" 말투는 흐렸다. 허나 일본이야기가 나오자 안광에 힘이 돌아왔다. "나쁜 사람들이지…암, 나쁘고 말고." 징용 가서 사망한 남편 이야기를 묻자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더는 묻지 못하고 앉아 있자, 이번엔 이쪽을 바라보고 다시 묻는다. "어디서 오셨소?" 그 웃음이 너무 환해 마음이 미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순천 모 요양병원/ 김양배 기자
다시 정의다-이소아 변호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주저하지않고 자신 목소리를 낼수 있는 게 正義입니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 정의요? 음… 모두가 각자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 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또는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내가 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에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그로인한 피해를 입지 않는 것, 그것이 제 정의입니다." 이소아 변호사 / 광주 전남일보 사옥 / 김양배 기자
"침묵하라니요. 민주주의는 원래 수다스러운 거예요"
겨울치고는 생각보다 따뜻한 1월의 어느 날이었다. 프로젝트 섭외 대상이라는 전화에 쾌활한 목소리로 "그런데 어쩌죠. 저희 사무실은 비좁고 문패도 없어요. '같이돌봄가게'에 얹혀 살거든요. 오시는 것은 좋은데 사진 찍기가 힘드실 거예요"라고 답한다. 너무 쾌활해서 잠시 농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몇 군데의 장소가 거론되고 결국은 전남일보 본사로 결정됐다. 보통 이런 인터뷰는 편한 장소나 자신을 표현하기 좋은 장소에서 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허나 왜 그런지는 대화를 해보면 금방 알수 있다. 그녀는 '찾아오라고 말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서류 속에서 의뢰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 현장에서 만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소아 변호사. 1978년생,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2007년 사법고시 합격(사법연수원 38기). 부모님 고향이 전남이라는 이유로 본인의 유년기를 모두 광주에서 보냈다. 이 변호사가 공프로젝트의 2019년 두 번째 주인공인 된 이유는 아주 명확했다. 그녀는 약자를 대변하면서도 수임료를 받지 않는 공익 변호사이고, 이 공익변호사라는 개념을 광주에서 최초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의 창설자이자 상근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동행의 모토가 독특하다. 설명해 달라 △동행의 모토는 '존엄과 권리를 상실한 이들의 목소리를 법의 언어로 전달합니다'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민주주의는 수다스럽다'는 것을 법으로 증명하는 단체다.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모두 다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슷하지만 다 다르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도 있다. 그들이 각각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동행의 탄생 이유다. -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사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것은 개개인의 선택이다. 앞서 말했듯 모두가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강요하겠나. 문제는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폭력과 차별, 목소리 조차 못 내게 막는 사회적 분위기, 심지어 폭력을 행함에도 이게 폭력인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그것이 폭력이라고 말할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이 산재하는지는 사회적 약자가 돼보면 한다. 아울러 그렇게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 역시 언제 어느 때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 사고로 인한 장애인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아이가 성소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게 사회다'라는 말로 넘어가 버린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래서는 안된다. - 그렇다면 이 변호사에게 있어 정의는 '말하는 것'인가? △정확하게는 '그들(사회적 약자)이 말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듣는 것'이다. 몇 년전 소송을 벌였던 여수 유흥주점 여성 사망 사건의 경우,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성매매 자체가 여성의 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반인권적이며,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무도 모르게 덮어질 뻔했던 한 여성의 죽음을, 용감한 9명의 동료 여성들이 고발을 하면서 성매매의 착취 구조가 드러날 수 있었다. 그녀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그녀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인권이 없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이고 당연한 그 권리가 없었다. 성매매 유흥주점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인권이 없는 것은 그녀들 뿐만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반 조직적 언사는 용납이 잘 되지 않는다. 조직에 반할 경우 개인의 정의와 인권은 가장 먼저 무시된다. '그럴거면 나가라'가 돌아 올 뿐이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싸워야 하는데,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은 그저 목소리를 막아 버린다.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불의다. 그렇기에 이 침묵을 강요하는 대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 살면서 '정의가 실현 됐다'고 느꼈던 적은 있는가. △재판에서 이긴다고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바른 길로 가고 있을 때 그런 감정이 드는 것 같다. 살면서 여러 번의 그런 경험이 있지만 최근으로 한정한다면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 불이익을 가한 안태근 전 검사장이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다. 검찰이라는 조직내 약자의 목소리에 사회가 귀를 기울였고, 바른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내고, 거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래서 상식적이고 당연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동행을 만들기 전 난 죽을 뻔 했었다. 암이었다. '아 이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있다. 그런데 살았다. 살아나니 모든 게 쉬워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빈곤하고, 조금 더 피곤하고 확신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실제로 동행을 시작할 때 확신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주변의 만류도 엄청났다. 하지만 시작했다. 왜냐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때문에 공익변호사를 하냐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대학시절 카톨릭 동호회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하는 선배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자마자 곧바로 여러 시민단체의 변호사로 일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내 선택에 대해 많은 말들을 했다. 허나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의 청년층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지 마라. 아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말자. 자신은 자신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증명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시하라. 나의 결정은 온전히 내가 하는 것이다.
이소아 변호사의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은 어떤 곳?
"광주에 있는 많은 변호사들은 이소아 변호사에게 빚이 있습니다. 아니 최소한 저는 이 변호사에게 그런 부채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부채의식을 갈수록 확대시키고 있죠." 전두환 전 대통령 고소인들의 변호를 맡고 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광주·전남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정호 변호사의 말이다. 김 변호사에게 있어 이 변호사는 변호하는 이들이 가야 할 선한 길 중 하나를 걷는 이지만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변호사가 있는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은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돈이 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와 2명의 상근 변호사가 고군분투함에도 후원금이 없으면 사무실이 돌아가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해 온 일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잘한 재판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이 바로 일상의 우리이자,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면하고 보지 않는 것이다. 동행은 폭행으로 죽은 성매매 여성 사건을 맡아 입을 열지 않는 그녀의 동료들을 설득하고, 1급 장애에도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이와 장애인단체 활동가들의 분노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온 힘에 다해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이유로 업무상 과실치사 재판을 받은 세월호 민간 잠수사와 진도에서 세월호 가족들을 지원하다가 우울증과 트라우마로 자살한 경찰관의 유가족 등이 그들의 의뢰자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광주,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외계층 여성과 아동, 장애인, 이주노동자, 난민, 비정규직 노동자 등 우리 옆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투명해져버린 그들에게 색을 입히고 목소리를 나오게 하고, 끝내 울부짖게 한다. 이런 동행은 2015년 5월 만들어졌다. 서울에서 광주에 내려온 이 변호사가 광주, 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법률 자문이나 연대가 필요하면 꼭 연락해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했다. 그녀가 설립한 동행은 이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익소송, 자문, 연대활동을 하고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변호사들은 공익 변호사라고 불린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당연하게도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일이 있겠느냐 또는 수입이 생기겠느냐는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허나 일은 너무 많았다. 또 설립 당시 동행 상근 변호사는 이 변호사 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포함해 총 3명의 상근 변호사가 일하고 있다. 공익과 인권 관련 소송만 하고 선임비는 별도로 받지 않는다. 회원 340명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이들의 환경이 편해지거나 좋아진 것은 아니다. 후원금만으로의 운영은 여전히 힘들고 변호사들의 생계도 고민거리다. 그럼에도 이 변호사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하다. "동행은 소송을 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이슈에 대한 목소리를 엮어 세상에 전달하는 곳"이며 "약자들이 손을 내밀 수 있는 마지막 법률적 보루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한가지 가정해보자. 만약 내가 사회적 약자가 된다면? 사고로 나나 가족이 장애를 갖거나 아이의 선척적인 희귀병이 생겨 사회에서 외면당하거나,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한다면? 그때 내 손을 잡아 줄 곳은 어디일까. 이 질문의 답이 바로 이 변호사와 동행에게 부채의식을 가져할 이유가 아닌가 잠시 고민해본다. ●공익변호사와 함께 하는 동행 062-351-0518 후원계좌 신한은행 100-032-029907
다시 정의다-함세웅 신부
"가장 기본적이고도 변하지 않는 큰 가치 끊임없이 추구 해야 할 저의 정의 입니다" "정의는 변하지 않는 가치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큰 원칙이라고도 봐야 합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정의의 하부 개념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부를 추구하고 거기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고개를 들어 올려다 봐야 할 상부의 고결한 원칙은 보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것, 그것이 바로 저의 정의입니다" 정의(正義)를 다시 생각한다
"나의 정의는 '본질적인 관계의 회복'이다"
2018년이 채 열흘 남짓만 남아 있는 어느 목요일이었다. 택시가 갑작스레 전국적으로 파업을 하면서 오랜만의 서울행이 시작부터 꼬였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바빠지고 가슴은 묘하게 설렜다. 마치 오랫동안 뵈지 못했던 은사님을 찾아 뵙는 기분이었다. 함세웅 신부.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운동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이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창립한 사람이다. 인터뷰 대상과 나의 교착점이라는 그저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전부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여러 선배들을 통해 들어왔던 터였다. 솔직히 대학시절 그를 통해 종교가 지녀야할 사회적 책임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이야기일까. 엄혹했던 지난 1970년대를 정면으로 관통하고 1980년 군부독재와 맞섰으며, 2000년에 들어와서도 목소리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하도 쓴소리를 많이 해 상호 각별한 사이였으면서도 DJ가 자주 만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렇게 평생을 신부로 살았고, 앞으로도 신부로 살, 그를 만난 것은 햇살이 적당이 따사로운 오후 2시 서울 길음동 성가소비녀수녀원 내 인권의학연구소였다. △먼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 오늘의 주제는 '정의'다. 이것에 대한 답을 주기 전, 신부님이 앞서서 창설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 44주년을 맞았다. 만들어질 당시 참으로 엄혹한 시대였다. 종교인인 당신이 왜 사회에 전면으로 나서게 됐는가. - 하늘이 내린 사명이었다. 물론 하늘이 직접 나에게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던 청년들과 학생들의 입을 통해 말씀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대학생이란 존재는 졸업만 하면 미래가 보장된 계급이었다. 어쩌면 특권층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거리로 나왔다.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종교적 헌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스승인 지학순 주교님과 같이 감옥에 다녀온 사제였다. 엄혹한 시대를 체험한 것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시대적 부름과 열망에 사제로서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성서 전반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의의 권력에 맞서 민중을 편을 드는 것 말이다. △그런 시대에 그런 용기를 내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당신이 추구해온 정의는 무엇인가? - 일단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자리에서 말하는 정의는 신학적으로 풀어 말하겠다. 역사적 정의나 사회적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때에 따라서는 정의였던 것이 어느 순간에는 불의가 된다. 이것은 정의의 하부 개념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대개념에는 속하나 상황에 따라 해석과 가치가 달라진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아름다운 관계'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정의다. 이 정의는 불변하며, 초월적인 가치를 지닌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서의 원죄는 약속을 어겼기에 생긴 것이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긴 대가로 자연과의 조화도 깨졌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물론 현대에서 아담과 이브의 시대로 돌아 갈 수는 없다. 허나 바른 믿음과 바른 실천으로, 죄를 짓지 않고 유혹을 피하며 정화된 삶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정의의 가치와 의미가 불변이라고 말했다. 살아오면서 '이것이 정의다'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혹은 정의를 구현했다고 자부하는 순간들이 있는가. - 본질적인 정의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노력하고 또 도달하려고 한다. 질문자가 말하는 정의가 사회적 정의라고 해석한다면, 1979년 박정희가 사망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나는 영등포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면회를 다녀온 다른 이들에게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들었다. 눈물이 났다. '이게 기적이구나. 이것이 모세의 기적이구나'라고 해방의 기도를 드렸다. 억압과 압제의 상징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 기쁨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나의 악이 사라지자 전두환이라는 더 큰 악이 왔다. 그리고 잠시 비춘 햇살이 무색하게도 더 짙고 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허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악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전두환의 시대 역시 묵묵히 버텨낼 수 있었다. 그것이 또 1987년 6월 항쟁으로도 이어졌다. 허나 그 항쟁도 미완이었다. 그렇게 역사는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그토록 갈구하고 바라던 정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하는가. - 내가 말한 본질적인 정의가 도래한 사회는 아직도 멀었다. 어쩌면 인류가 계속 노력해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하부적 정의인 사회의 정의를 이야기 하자면, 이 역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 시대마다 어려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또한 세대마다 어둠과 빛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항상 50대 50인 것은 아니지만 때로 시대가 주는 열매가 정의가 아닌 그 열매를 맺기 위해 투신하는 자체가 정의다. 이 정권을 이야기 해보자. 촛불 혁명으로 시대적 소명을 완성하고 만들어진 정권이다. 그런데 최근 민주당은 자유한국당과 손을 잡고 2019년 예산을 통과 시켰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민주당이 스스로 존재이유를 상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에 들어서 첫 번째 좌절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허나 이것 역시 시대의 어둠과 빛 중의 하나다. 우리는 계속 이 어둠을 줄여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그 어둠이 예전보다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과 구성원들에게 조언이나 당부하고 싶은 말은. - 젊음은 그 자체로도 힘이고 은총이다. 얼마전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오후 4시임에도 허름한 교회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기도, 성가, 호소가 가득한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의 1970년대부터 2000년을 떠올렸다. 지금의 시대는 그 이전의 세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베트남의 지금 이 순간이 20년 뒤의 베트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성세대를 '오늘'만 가지고 평가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그들의 과거를 보고 과거에 그들이 했던 일들을 '존중'한 뒤 평가하기를 바란다. 앞선 선배들의 삶은 어쩌면 지금 세대보다 더 치열했고, 절박했으며 고통스러울수 있다. 그 삶의 끝이 지금 이런 모습이냐고 비웃기 전, 그들의 치열한 삶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회가 변했음을 인정하길 바란다. 그래야 지금의 젊은이들의 오늘이 다음 세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내 것이지만, 미래는 오늘의 나로 인해 변하거나 도태하게 된다. 시대적 정의를 추구했던 선배 세대들에 대한 존중이 곧 다음세대에 영향을 줄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안개 속의 인생에 대한 지표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함세웅 신부는 누구?
'그'라고 해서 대단하거나 매우 도덕적인 그래서 성인이나 성자의 삶을 살았다고 볼수는 없다. 함 신부 역시 인생의 굴곡에서 때로는 흠이 있었고 때로는 타인이 보기에 방향을 잘못 틀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 대한민국에서 존중받아야 할 위인 중 한명이다. 함세웅,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울은 일본식 표기로 경성부라고 했다. 어릴때부터 서울 용산구의 용산성당에 다니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문하였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며 유년기에 겪은 한국 전쟁 중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도 그리 서술하고 있다) 1960년에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했고, 군 복무 후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로마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귀국한 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성당에 부임하였다. 그가 천주교내 대표적 진보 인사가 된 것은 1974년부터였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주교 등 각계 인사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대거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창립을 주관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젊은이들이 요구했고 그 부름에 종교인으로서 응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곧바로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에 모두 참여하고 제4공화국에서 두 차례 투옥됐다. 1979년 10·26 사건 때도 수감 중이었다가,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된 뒤에 석방됐다. 이쯤에서 담배를 끊었다. 감옥이 금연을 도운셈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익히 알려진 1987년 6월항쟁 때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장위동성당, 상도동성당, 제기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냈다. 역사의 거대한 물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함 신부를 이야기 할 때 이 시대를 빼놓으면 말이 안된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대공분실(남영동) 조사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자, 경찰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으로 위장하려고 했다. 양심적인 의사(오연상)와 부검의(황적준), 직업정신에 투철했던 검사(최환)에 의해, 고문치사임이 드러났음에도 경찰은 고문 하수인 2명만 구속하고 사건을 덮었다. 하지만, 그해 5월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됐음을 폭로했다. 이것은 곧바로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거대한 역사의 바퀴가 천주교 사제들의 목숨을 건 고백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함 신부는 당시에는 폭로를 주저했었다고 한다. 성당에 폐를 끼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나서야 할 야당이 나서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사제단들이 앞장서야 했다. 그는 그 순간을 "요나가 되는 체험"이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앗시리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의 요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앗시리아 도성 니네베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고 했지만, 요나는 엄두가 안 나서 바다로 도망갔고, 그는 결국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하느님께 '약속대로 하겠다'고 기도한 뒤 생환했다. 그는 그때 자신이 요나의 짐을 부여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요나의 자리를 당시 사제단 단장이던 김승훈 신부가 맡았다. 김 신부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1976년) 때 함 신부가 구속됐고, 자신은 불구속된 데 대해 부채감을 늘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모든 짐을 짊어진 것이다. 아울러 그를 이야기 하자면 김근태 전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평생의 동지이자 친구로서 김 전의원을 지켜본 함 신부는 지난 2012년 주임신부 은퇴 후에도 김근태 전 의원의 사상과 생각을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알려오고 있다. 앞서 지난 2018년 11월17일에 광주를 찾은 그는 광주시 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광주한반도포럼 주최 김근태민주주의학교 첫번째 강좌인 '김근태 삶과 사상'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1980년 광주의 정신은 돈으로 보상되는 순간 순수성이 훼손됐다. 피해자와 가족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독재정권하에서 국가폭력이 이뤄진 과거의 사태가 다시는 이 땅에서 있어서는 안 되고, 더 나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1987년 이후에도 그의 삶의 흔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나 지면에 그의 삶 전체를 옮길 이유는 없다. 간단한 약력으로 가름한다. 함세웅(咸世雄, 1942년 6월28일 ~ )은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운동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창립하고 고문을 역임했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회장,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열정(熱情)이 세상을 바꿉니다'
열정은 성공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근대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인류 사회는 각 분야에 걸쳐 열정을 가진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발전하고 변화해 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불굴의 도전정신과 열정은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이끌고 현대사의 기적이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일궈냈다. 전남일보 연중 공공캠페인 '공 프로젝트'의 주인공들도 공통 분모는 도전과 열정으로 모아진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대한민국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켜 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공 프로젝트는 올 한해 '열정(熱情)'을 주제로 오직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온 12명의 주인공을 찾아 그들의 삶과 꿈을 들어봤다. 2018년의 끝자락, 대한민국을 바꾸고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를 꿈꾸며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올해 공 프로젝트의 주인공 12명의 이야기를 되돌아본다. 1월 마이크로의료로봇센터 박종오 센터장 박종오 마이크로의료로봇센터장은 '마이크로의료로봇'을 연구해 한국이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을 갖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1982년 독일 유학시절 로봇의 매력에 빠진 그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대장내시경로봇을 개발하고, 캡슐내시경과 혈관마이크로 로봇 등을 잇따라 개발해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열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게 그의 회상이다. 2월 前 광주시립발레단 김정희 씨 전국 최고령 발레리나 김정희 씨는 평생을 춤과 함께 살아왔다. 1994년 광주시립무용단에 입단한 김 씨는 '10년 장수하기 어렵다'는 발레계의 불문율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을 현역에서 뛰었다. '춤 외의 다른 분야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처럼 그에게 춤은 인생의 전부였다. 지금도 그는 광주의 발레 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고 있다. 3월 나전옻칠 최석현 명장(名匠) 최석현 명장은 모두가 포기한 나전옻칠이라는 전통을 50년 넘게 지켜온 장인이다. 그에게 나전옻칠은 처음에는 희망이었지만 나중에는 눈물이고 한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여지껏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전통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땀과 한이 뒤엉킨 삶이었지만 자부심으로 버텼다"는 그의 회상에 한 우물을 고집한 장인의 열정이 담겨있다. 4월 광주시 소방안전본부 박형주 소방위 광주시 소방안전본부 119특수구조단에 근무하는 박형주 소방위는 자타가 공인하는 '멀티 소방관'이다. 자신의 주특기인 구조업무 외에 응급처치 분야에도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재난현장으로 달려가는 그의 열정은 오직 '시민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소방관의 본분' 때문이다. 5월 그림으로 통일 염원하는 조규일 화백 조규일 전 백민미술관장은 '통일'을 화두로 평생 평화를 갈망해 온 노 작가다. 올해로 87세인 조 화백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높고 뜨겁다. 손발이 움직이는 한 붓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 통일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겠다는 다짐도 그의 일상이다. 평생 한길만 바라보며 살아온 노작가의 열정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6월 국제기후환경센터 임낙평 대표 임낙평 대표는 모두가 먹고 사는 문제에 전전긍긍할 때 환경보호를 외친 광주 환경운동의 대부다. "환경운동이 전쟁이었다"는 임 대표의 회상에 지난 시절 그가 겪었을 어려움이 농축돼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전쟁중이다. '싸움을 멈추는 순간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그는 열정의 화신이다. 7월 23년간 유라시아 탐험한 김현국 씨 탐험가 김현국 씨의 열정은 대륙을 닮았다. 1996년 대학을 막 졸업한 그는 홀홀 단신 러시아로 떠났다. 그리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1만2000㎞를 달렸다.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대륙횡단이었다. 2014년에는 부산에서 네덜란드까지 2만6000㎞를 왕복했다. 그의 꿈은 대륙 경영이다. '망설이면 이미 늦는다'는 그는 열정으로 똘똘 뭉친 진정한 탐험가다. 8월 37년 자기혁신한 서한순 인사혁신처 과장 섬소년은 눈이 맑고 똘똘했다. 장래 희망은 훌륭한 공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직에 나선 뒤 37년 만에 3급 공무원에 올랐다. 외딴 섬에서 육지로,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라갈수록 자리는 좁아지고 경쟁은 치열했지만, 인사혁신처서 서한순 과장은 도전과 열정으로 이겨냈다. 열정이 있는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9월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광주비엔날레 김선정 대표는 미술계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힌 문화CEO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장녀인 김 대표는 말 그대로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독립 큐레이터라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도전도 진행형이다. 언제든 달려가고, 뛰어야 할 일이 많다며 늘 운동화만 신는 김 대표의 열정이 한국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고 있다. 10월 인권지킴이 최봉태 변호사 일제 피해자 인권 지킴이 최봉태 변호사는 질게 뻔한 싸움을 마다치 않는 변호사다. 어쩌면 바보짓이고, 무능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그 싸움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도 갖고 있다. "비록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만 옳은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그의 열정이야말로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11월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 시민기자로 활동하는 김종술 씨는 취재비가 없어 막노동과 대리운전을 하며 금강을 지켜 온 '금강 지킴이'다. 그는 지난 2009년 4대강 공사가 시작된 이래 10여 년 가까이 금강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금강변에서 풍찬노숙하며 써 온 기사만 1300건이 넘는다. 지금도 그는 명절만 빼고는 매일 금강에 나간다. 옳다는 확신과 열정이 그의 힘이다. 12월 구세군 봉사 41년 김영애 씨 구세군 광주본영 김영애 가정단장은 40년이 넘도록 구세군 자선냄비를 따라 봉사 활동을 펼친 자원봉사자다. 그렇다고 나눔의 의미가 거창한 것도 아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경쟁하거나 비교 하지도 않는 그저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주변 사람 배곯지 않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김 단장의 열정이 추운 겨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나눔은 서로 만나서 주고받는 공감의 선물입니다"
'딸랑딸랑~딸랑딸랑'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세밑은 구세군 자선냄비와 함께 찾아온다. 바쁜 일상에 잊고 살아왔지만, 거리에 빨간 자선냄비가 등장하고 구세군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은 비로소 가는 세월을 실감한다. 추위 속에 살아가는 불우한 이웃을 생각하는 것도 이때다. 40여 년 넘도록 구세군 자선냄비를 따라 자원봉사 활동을 펼쳐 온 구세군 광주 본영 김영애(69) 가정단장과 남편 임양술(70) 씨도 마찬가지다. 이맘때만 되면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상징하는 구세군의 붉은 외투를 입고 날마다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모두가 힘겹고 어려울 때, 서로 나누는 마음에서 행복을 찾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김 단장은 지난 1977년 구세군에 들어와 올해로 41년째 거리에서 자선냄비 모금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구세군의 직급 가운데 하나인 가정단장은 일반 교회의 장로역에 비교할 수 있다. 남편 임양술 씨와 올해 47세인 큰 딸 등 그의 가족들도 평생 그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특히 남편 임 씨는 생업인 중장비를 운전하는 틈틈이 자선냄비를 지키고 차량 봉사를 하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김 단장에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작은 나눔으로 큰 사랑을 만들어 가겠다'는 게 이 부부의 가장 큰 바람이다. 1950년 장흥에서 태어난 김 단장이 구세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대 후반 셋째를 낳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난산으로 심하게 앓아누워 있을 때 구세군 윤학원 사관 동부인을 만나 정신적으로 많은 힘을 얻었고 봉사에도 눈을 떴다는 것이 김 단장의 설명이다. "어릴 때 정미소집 딸로 자라면서 무엇이든 이웃에게 퍼준다며 어머니에게 엄청 꾸지람을 들었어요. 아마도 천성인 것 같아요. 구세군을 떠나서 지금도 내 집에 오는 사람은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김 단장에게 나눔의 의미가 거창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우러나와서 하는 자발적인 행동인 만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구와 경쟁하거나 비교하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김 단장이 말하는 나눔의 의미다. 내가 지닌 재능이나 여유로움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다. "밥하고 음식 만들고, 빨래도 하고…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아요. 나는 그중의 하나를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찾아냈을 뿐입니다." 나눔에 대한 철학도 명확하다. 나눔이나 봉사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이 아니고 서로 만나서 주고받는 공감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구세군 표어 중에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말이 있어요. 손길은 관심입니다. 만나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봉사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하루는 매일 봉사의 연속이다. 연말이면 자선냄비를 통한 모금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평상시에는 독거노인들의 생활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그나마 쉬는 날에는 음식을 만들어 노인정이나 주변 장애인을 찾아간다. 노인, 장애인, 어린이 등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녀 광주 시내 복지시설이라면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다. 구세군에서도 그는 노인들을 위한 식사 봉사 등으로 잠시의 쉴 틈이 없다. "누구나 어려운 게 세상사 아닙니까. 자기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힘든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모든 분을 동생같이 언니같이, 우리 어머니같이 대합니다. 그분들을 돌보는 것도 내가 어려워지면 나도 누군가가 이렇게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고 할 때가 많죠. 해드린 음식 맛있게 드시면 뿌듯하고, 제가 발품 팔아 도와드리면 시원해하시고, 그분들 보면 제 배 부른 것 같고 제 등 시원한 것 같고 해서 이렇게 삽니다." 40년 봉사 활동을 하는 동안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구세군 생활을 회상해 달라는 질문에도 김 단장은 잠시의 망설임 없이 '힘들었다'고 했다.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면서 종일 선체로 사랑의 종을 흔드는데 시민들이 본체만체할 때는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단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종일 자선냄비를 지켰는데 모금액이 몇만 원이 채 되지 않을 때는 좌절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지나가던 한 시민이 악의적으로 자선냄비에 담뱃불을 넣어 절망감도 맛봤다. "그때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세상을 어찌 그렇게 사나.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고에 얽매인 듯한 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지만 지금도 서운함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저도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를 다시 현장에 서도록 만드는 힘은 시민들이 보여준 작은 사랑이다. "추운 겨울 자선냄비 앞에서 종을 흔드느라 손이 얼어붙었는데 지나가던 여학생이 군고구마를 손에 쥐여주고 가더라고요. 구세군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훈훈하고 행복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텐데.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10년 가까이 매년 수표로 100만원씩 기부하던 이름 모를 시민, 행색이 남루해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시민이 부끄럽다며 구겨진 지폐를 기부하던 모습, 장애인이 거리에서 구걸한 돈을 모두 자선냄비에 넣고 가던 모습들도 그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길거리에서 온종일 시주한 것으로 보이는 노스님이 시주받은 모든 것을 기탁했던 순간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랑과 나눔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하고 큰 가치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를 통해 이 가치의 소중함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과분한 행복입니다." 앞으로의 계획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오랫동안 꿈꿔온 그의 소망이다. "자선냄비가 가진 가치 중 하나는 모금 봉사나 모금에 동참하는 모두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세군은 빈부격차, 남녀노소, 지역, 인종,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참여할 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습니다. 모금된 성금의 배분도 어떤 차별을 두지 않고 공정하게 배분됩니다. 거창한 것 같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배곯지 않고,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이면서 구세군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오는 8일 첫 시종식을 앞두고 마지막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던 지난달 25일 충장로우체국 앞에서도 그는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자선냄비는 더욱 활활 타올랐습니다. 올해도 많은 시민이 '힘들고 어렵다'는 말보다 희망과 꿈을 얘기하고 기적을 만들어 줄겁니다. 저와 구세군은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