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 ‘이팝나무 아래 흘러가는 시간’ 특별 전시장에서 장훈명(73) 작가가 1980년 5월19일 광주역 앞에서 택시기사들을 불러 모았던 당시의 상황을 그린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윤준명 기자 |
8일 오전 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 ‘이팝나무 아래 흘러가는 시간’ 특별 전시장에서 만난 장훈명(73) 작가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군홧발이 도심을 피로 물들였던 그날의 참혹한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었다. 장 작가는 5월20일, 임동-금남로 일대에서 벌어진 차량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로 현재 5·18민주기사동지회장을 맡고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 속 이야기에 영감을 준, 말 그대로 ‘진짜’ 택시운전사인 셈이다.
그는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폭력 진압을 피해서 환자로 위장한 대학생 승객과 화순으로 향하던 길에 들은 그들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며 “배움이 짧아 세상 돌아가는 건 잘 몰랐지만, 분노가 치밀어 곧장 광주역으로 달려가 동료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고 회상했다.
장 작가를 비롯한 택시기사들은 시민들을 구하자고 합심해 맨몸으로 금남로에 몰려갔지만, 무장한 계엄군과의 힘의 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그들은 유일한 생업 수단인 택시를 몰고 무등경기장에서 다시 모인 뒤 차량 시위에 나섰다.
그는 “시민들을 태운 시내버스가 앞장서고, 40여대의 택시가 줄지어 뒤따랐다. 금남로에 다다르기까지 차량들이 하나둘씩 합류하면서 어느새 거대한 행렬이 만들어졌다”면서 “경적을 울리며 라이트를 켜고 거리에 진입하자, 시민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눈가를 훔쳤다.
그러나 감동의 순간도 잠시, 계엄군이 최루탄을 쏘아대며 상황은 급변했다. 차 한 대당 군인 7~8명이 달려들어 유리창을 깨고, 택시기사들을 끌어내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장 작가는 당시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온몸이 피범벅이 돼 계엄군에게 끌려갔다가, 경찰이 빠져나갈 틈을 알려줘 주변에 있던 몇 명과 함께 도망쳤다”며 “광주의 상황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 8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자유공원 ‘이팝나무 아래 흘러가는 시간’ 특별 전시장에서 장훈명(73) 작가가 문학 작가 박진영씨가 작성한 글을 감상하고 있다. 윤준명 기자 |
장 작가는 “학창 시절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두각을 나타냈지만, ‘환쟁이(화가를 낮춰 부르는 말)는 굶어 죽기 딱 좋다’며 완강히 반대하신 아버지의 뜻을 넘지는 못했다”며 “수십년만에 다시 잡은 붓이 지금의 나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5·18기념재단이 주최·주관한 그의 특별 전시는 이날부터 오는 7월28일까지 두 달간 5·18자유공원 내 3개 동에서 열린다. 그날의 참담한 현실을 시간대 별로 묘사한 장 작가의 유화 20점과, 그 경험을 하지 못한 문학 작가 박진영씨가 장 작가의 그림을 보고 써 내려간 글이 함께 전시된다. 해당 전시는 이팝나무로 상징되는 1980년의 기억을 흘러간 시간의 경계를 넘어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마주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는 “운 좋게 미술대전 등 여러 전국 단위 대회에서 입상하게 되면서, 5·18기념재단으로부터 전시 요청을 받았다”면서 “박진영 작가의 훌륭한 글과 함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어 참 영광이다.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오는구나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장 작가는 앞으로도 광주의 기억을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에 힘쓸 계획이다. 자신의 경험은 물론, 오월 당사자들이 겪은 고통과 저항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불의에 맞선 광주정신이 후세대에 널리 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는 “계엄사태와 탄핵 정국을 겪으며, 오월열사들이 오늘을 지켜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과 구술의 힘은 희미해질 테고, 결국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게 될까 두렵다”며 “그 시대를 살아낸 지역민들의 기억에 대한 그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내 경험뿐 아니라 많은 시민의 이야기도 함께 전시해 보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한편 오는 13일 오후 2시에 열리는 ‘이팝나무 아래 흘러가는 시간’ 개막식에서는 장훈명 작가의 트라우마 치유 과정 속 창작 이야기와 그의 작품 세계를 직접 들을 수 있다. 또한 5·18사적지 제17호인 상무대 옛터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해설 투어도 함께 진행된다.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